[1858 ~ 1940] 조선 말기의 문신· 서예가. 본관은 여흥이다. 자는 경소(景召), 호는 시남(詩南)·의재(毅齋) 등이다.
1880년 문과에 급제한 뒤 1883년 승지, 1884년 참의군국사무에 등용되었다. 승지로 있을 때, 수구파로서 갑신 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장은규를 자객으로 보내어 암살하게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대사성·강화부 유수·제도국 총재·헌병대 사령관 등을 지냈다. 1894년 청일 전쟁 중에 대원군의 밀서를 받아 청나라 장군과 연락, 일본 세력을 축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이듬해 원주에 유배되었다. 그 해 민씨 세력의 부활과 함께 다시 요직에 등용되었다.
1910년 국권 피탈 뒤 일본 정부의 자작과 은사금을 받았고,
이왕직 장관을 역임하였다.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의 부친이다.
서화에 뛰어났으며 행서에 능하여 서울 광화문에 ' 고종 황제 보령 육순 어극 사십년 칭경 기념비'를 썼고, 편서로 《덕행교범》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