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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국민 보도 연맹(國民保導聯盟)
국민 보도 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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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보도 연맹 (國民保導聯盟)
1949년 6월 5일에 8·15 광복 후 좌익 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화를 목적으로 하여 구성되었던 단체. 정식 명칭은 국민 보도 연맹이었으나, 통상 보도 연맹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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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5일에 8·15 광복 후 좌익 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화를 목적으로 하여 구성되었던 단체. 정식 명칭은 국민 보도 연맹이었으나, 통상 보도 연맹으로 불렸다. 이 단체를 만든 목적은 1948년 12월 국가 보안법이 시행되면서,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것이었다. 보도 연맹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었던 시국 대응 전선 사상 보국 연맹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시국 대응 전선 사상 보국 연맹은 민족 운동 · 사회주의 운동을 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친일자로 변절한 사람들이 모여 1938년에 조직한 친일 전향자 단체이다. 이 단체는 사상 탄압을 목적으로 사상 정화·생활 쇄신·주의자 포섭을 위한 활동을 하였으며 《사상 보국》이라는 기관지 를 발행하다가, 1941년 12월 28일에 재단 법인 대화숙에 흡수되었다.
 
보도 연맹의 활동 목표는 5가지 방침으로 요약된다. 첫째, 대한 민국 정부를 절대 지지하고, 둘째, 북한 괴뢰 정권을 절대 반대 타도하며, 셋째,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 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배척하여 물리치며 여지없이 쳐부수고, 넷째, 이론 무장을 강화하여 남로당·북로당의 멸족 파괴 정책을 폭로함으로써 여지없이 쳐부수며, 다섯째, 민족 진영의 각 정당과 사회 단체와 협력하여 총력을 결집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 정부는 반공 노선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하여 전향자들을 보호 지도할 기관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당국의 주도 아래 민주주의 민족 전선의 조직 부장이었던 박우천을 초대 간사장으로 하여 보도 연맹을 결성한 것이다.
 
이 단체의 구체적인 대상자는 남로당· 노동 조합 전국 평의회·인민 위원회· 민주주의 민족 전선· 조선 민주 애국 청년 동맹 따위의 남로당계 단체의 구성원들이었으며, 그 밖에 북로당· 조선 민주 애국 청년 동맹· 조선 부녀 총동맹·민주 학생 연맹·혁명단· 조선 보건 연맹·인민당·민중 동맹·인공당· 조선 음악가 동맹· 조선 연극가 동맹· 조선 영화 동맹 · 조선 과학자 동맹· 조선 노동 조합 전국 평의회· 조선 농민 조합 총연맹·전국 출판 노동 조합·근민당·인민 위원회·신민당·민주한독당 따위 단체의 구성원들이었다.
 
1949년 말까지 보도 연맹의 가입자 수는 30만 명에 달하였으며, 서울의 가입자 수는 1만 9,800명이었다. 그 당시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으면 강제적으로 보도 연맹에 가입해야만 하였다. 또한 지역별 할당제라는 것이 있어서 그 숫자를 채우기 위하여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보도 연맹에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당사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입된 경우도 많았다.
 
보도 연맹 가입자 가운데 주요 인사로는 조선 공산당 출신의 정백, 국회 프락치 사건에 관계된 원장길·김영기 의원, 소설가 황순원, 국어학자 양주동, 시인 정지용· 김기림 등이 있었다.
 
1950년 6월 초에는 서울의 경우 완전히 전향되었다고 인정되는 6,900여 명의 사람들에 대하여 보도 연맹에서 탈퇴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보도 연맹 참가자들은 자신의 전향의 진실성을 밝히기 위하여 좌익 분자들을 찾아 내어 밀고하고 자수를 권유하는 등 반공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러한 활동이 중지되었으며, 서울을 제외한 전국, 특히 오산 이남 지역 에서 정부와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보도 연맹원들을 무차별하게 검속하여 집단 총살을 단행하였다.
 
경상 북도 문경군 영순면 포내 마을에서 300여 명이 집단 학살되었으며, 호계면 별암리에서는 200여 명이 학살되었다. 이 집단 학살 사건은 동족 상잔의 민족적 비극인 6·25 전쟁 중 벌어진 최초의 집단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후에 북한 인민군 점령 지역에서 좌익 세력이 보복 학살을 일으킨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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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