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 있던
삼별초가 몽고의 세력에 대항하여 일으킨 항쟁이다.
몽고의 침략 아래서의 조정에 대한 반란이자 항몽의 싸움이었다.최씨의 무인 정권이 무너지자 강화도에 피란해 있던 조정은 환도 문제로 논란이 심했다.
1270년 임유무(林惟茂)가 살해되어 무인정권이 종식되자 원종은 몽고의 지시에 따라 출륙환도를 단행하였다. 삼별초가 출륙환도의 방침에 불응하자 개경에 도착한 원종은 강화에 장군 김지저를 파견하여 삼별초를 혁파하고 삼별초의 명부(名簿)를 압수하였다. 지금까지 삼별초는 무인정권이라는 정치권력의 중심과 연결하여 몽고와의 항전에 참여해왔다. 그러나 이제 무인정권이 붕괴하고 그 정치권력이 변동하여 몽고와 완전히 결탁함으로써 그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입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당한 상황에서 명부가 몽고군에 넘어가면 보복을 각오해야만 했다. 이에 장군
배중손(裵仲孫)이 야별초지유
노영희(盧永禧) 등을 설득하여 일단의 삼별초를 규합해서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새 국왕으로 옹립해 1270년 6월 봉기하였다.
그들은 1,000여 척의 배로 강화에 있는 가족들과 재물을 싣고 남으로 내려가 진도를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경과
삼별초는 진도 용장성(龍藏城)을 거점으로 삼고 자신들이 고려의 정통정부임을 자처하면서 황제국가를 표방하였고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합포(合浦: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 · 금주(金州: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 · 동래 · 거제 · 남해도 · 나주 등 전라 · 경상도 연안의 내륙 지역을 점거하였고, 제주도까지 확보함으로써 후방의 안정지대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로써 전라도 · 경상도의 조운이 차단되어 정부는 큰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
원종은 김방경(金方慶)을 추토사(追討使)로 삼아 몽고군 1천명과 함께 해상으로 추격하게 하고 뒤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 신사전(申思佺)을 전라도토적사(全羅道討賊使)에 임명하여 전주부사 이빈(李彬)과 함께 삼별초의 진압을 맡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양군은 모두 위축되어 삼별초와 접전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나주에까지 이른 신사전은 삼별초군이 출륙한다는 소식에 놀라 서울로 도망치고 말았다.
1270년 9월 조정에서는 추밀부사(樞密副使) 김방경을 전라도추토사로 새로 임명하고, 몽고의 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토벌하도록 하였다. 고려 · 몽고의 연합군은 진도의 맞은 편에서 진을 치고 삼별초군과 접전했으나 바다에 익숙한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활용한 삼별초군을 제압할 수 없었다.
고려 · 몽고의 연합군은 계속해서 진도를 공격했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삼별초 우두머리 배중손을 회유하는 정책을 써서 삼별초군을 분열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1271년(원종 12) 5월 홍다구(洪茶丘)가 새로운 몽고군 지휘관에 임명되고
김방경 ·
흔도(忻都) ·
홍다구의 대규모의 연합군이 진도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자 삼별초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연합군의 진격 방향에 성안의 지휘부는 혼란에 빠져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무너졌고, 배중손과 승화후 온 등도 희생되었다. 진도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포로로 잡힌 채 일부만이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하에 진도를 빠져나와 제주도로 옮기게 되었다.
삼별초군은 제주도로 이동해 우선 방어진지의 구축에 힘쓰고, 제해권 유지에 힘을 기울였다. 점차 세력을 확보한 삼별초군은 이듬해인 1272년(원종 13)부터는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 연안 지역에 진출하여 개경으로 운반되는 조운선(漕運船)을 공격해 세곡을 약탈하였다. 11월에는 거제도에 들어가 현령(縣令)을 사로잡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지금의 경기도 부천)를 공격해 부사(府使)와 그 처를 납치했으며, 또 합포에서 전함 20척을 불태웠다. 즉 삼별초는 제주도로 옮긴 초창기를 제외하고는 연해 지역에 대한 제해권을 가지고 있었고, 고려의 관리와 몽고군 등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반정부 · 반몽고의 성격을 계속 유지하였다.
결과
삼별초가 경기 지역까지 출몰하자 원종은 삼별초의 진압에 온 힘을 기울였고,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 또한 일본정벌의 기지로서 제주를 중요시해
1272년 8월 사신을 보내 제주 공략을 촉구하였다. 이에 홍다구는 처음에는 김통정에게 회유공작을 폈으나 성과가 없자,
1273년(원종 14) 2월
김방경 ·
흔도 ·
홍다구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연합군이 제주를 공격하였다. 이 때 연합군은 병선 160척, 수군 · 육군 1만 인(고려군 6천 인, 몽고군 2천 인, 한군 2천 인)이었다. 연합군의 대대적인 협공으로 삼별초의 수령 김통정은 70여 명의 휘하 부장과 함께 산 속으로 피신했지만 부장들은 연합군의 수색에 의해 거의 체포되어 홍다구의 손에 의해 처단되었다. 김통정은 자결한 시체로 발견되었으며, 남은 1,300여 인도 포로가 되었다. 이리하여 삼별초의 항쟁은 약 3년 만에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