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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30년 전쟁(三十年戰爭)
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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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三十年戰爭)
[1618 ~ 1648] 주로 독일을 무대로 하여 크리스트교와 가톨릭교 간에 벌어진 종교 전쟁 . 종교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이 전쟁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종교적인 갈등만이 아니라, 왕조와 영토 및 통상 등에서의 적대 관계와 같은 다양한 이유에 의하여 일어났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30년 전쟁 (三十年戰爭) 종교 전쟁 1618년 신성 로마 제국 1648년 마자랭 베스트팔렌 조약 위그노 전쟁
▣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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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팔렌 조약 Treaty of Westphalia 국제법(근대이전)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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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키워드
신성 로마 제국 (3) 백과 1610년대 (2) 백과 1648년 (2) 백과 30년 전쟁 (2) 베스트팔렌 조약 (2) 백과 인목대비 폐비 사건 (2) 백과 종교 전쟁 (2)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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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 ~ 1648] 주로 독일을 무대로 하여 크리스트교와 가톨릭교 간에 벌어진 종교 전쟁. 종교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이 전쟁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종교적인 갈등만이 아니라, 왕조와 영토 및 통상 등에서의 적대 관계와 같은 다양한 이유에 의하여 일어났다. 그리고 싸움이 있었던 지역도 독일에 한정되지 않고 유럽 대륙의 거의 전역에 걸쳐서 일어났다.
 
인류사상 최대의 종교 전쟁이며, 그리고 마지막이 될 종교 전쟁인 삼십년 전쟁이 진행된 그 기간은 대체로 4 기로 나누어진다. 앞의 2기는 비교적 종교적인 색채가 짙고, 뒤의 2기는 종교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색채가 짙었다.
 
1618년에서 1620년에 걸친 제1기에는 독일의 크리스트교와 가톨릭교 간의 대립과 반목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들의 반목은 뿌리 깊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宗敎和議) 이후에도 전혀 풀리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17세기 초에는 두 교파의 여러 제후들이 각기 크리스트교 연합과 가톨릭교 연맹을 만들어 서로 맞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1617년 가톨릭 교도인 페르디난트가 보히미아의 왕위에 올랐다. 보히미아의 새로운 왕이 된 페르디난트 2세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영토 안에서 가톨릭 절대 신앙을 강요하려 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민감한 반응 을 보이며 보히미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619년 보히미아의 페르디난트 2세는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으며, 이에 보히미아의 크리스트 교도의 제후들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받들고 맞서 싸웠다. 신성 로마 제국은 당시 독일 제국 의 정식 명칭이었다. 1620년 바이서베르크 싸움에서 크리스트교 쪽이 패배하여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였으며, 보히미아의 크리스트 교도들은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1625년에서 1629년에 걸친 제2기는 덴마크가 독일에 선전 포고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 5세가 페르디난트 2세와의 싸움에서 패한 뒤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는 크리스트 교도로서의 명분을 내세워 영국 및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을 보충받았다. 그리고는 1625년 크리스트교 군대의 총수로서 독일에 침입하였다. 그런데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는 이전에 스웨덴에 발트해 연안 지방을 빼앗긴 손실을 보상하기 위하여 독일에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는 황제군의 장군 발렌슈타인과 틸리에게 패배하였다. 그 뒤 1629년 독일과 덴마크는 뤼베크 화해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따라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배상령을 내려 종교 제후의 영지 회복을 선언하고, 루터파의 공인 을 선포하였다.
 
1630년에서 1635년에 걸친 제3기는 스웨덴이 독일에 침입해 옴으로써 시작되었다. 뤼베크 조약이 맺어진 다음 해 프랑스의 후원을 얻은 스웨덴왕 구스타프 2세가 크리스트교를 옹호한다는 명분 아래 다시 독일에 침입하였다. 스웨덴군은 맞서 싸우는 황제군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격파하고, 황제군의 장군 틸리를 전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여러 제후들을 자신이 내세우고 있는 반가톨릭·반신성 로마 제국의 노선으로 끌어 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632년 뤼첸 전투에서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2세도 전사하였다. 왕이 전사한 후에도 스웨덴군은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거듭 패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트해의 강국을 꿈꾸어 온 폴란드가 러시아를 침공하는 등 여러 열강의 정치적 야심으로 전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1634년 모반 혐의를 받은 황제군 사령관 발렌슈타인이 암살되었다. 그 뒤 1635년에는 황제 와 크리스트교 군대의 작센 선제후 사이에 프라하 화의가 이루어졌다.
 
1635년에서 1648년에 걸친 제4기는 프랑스가 전쟁의 전면에 나선 시기이다. 1631년 이래 배후에서 크리스트교 세력을 지원하고 있던 프랑스가 프라하 화의 직후인 1635년 전면에 나섰다. 스웨덴과 연합 전선을 펴면서 프랑스는 독일에 출병하는 한편, 에스파냐에도 선전 포고 를 하였다. 전쟁은 별 성과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1637년 페르디난트 2세를 이어 황제 자리에 오른 페르디난트 3세는 1641년 종전을 제의하였다. 전세의 불리함과 국내 제후들이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매우 시달려 효과적인 전쟁을 치를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644년부터 열린 강화 회의는 각국의 이해가 얽혀 성과 없이 오래 끌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이 성립되어 30년 동안 계속되었던 종교 전쟁은 그 끝을 맺었다. 이로써 독일 제후국에서는 가톨릭· 루터파·칼뱅파들이 각각 동등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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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