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9년 조선 시대 인조 때 삼전도에 세워진 청나라 태종의 공덕비.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 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하여 짓기를 요구한 전승비로, 사적 제101호이다.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의 높이는 3.95m이며, 나비는 1.4m이고, 무게 는 32t이다.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 청태종 공덕비'이며, 서울 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소재한다.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이조 판서
이경석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전(篆)은 오이징이 맡았다. 비문의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와 조선이 항복한 사실, 조선이 항복한 뒤 청 태종이 조선에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고 곧장 회군하였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비의 앞면에는 한문, 뒷면에는 만문(滿文)·몽골문으로 번역되어 있다. 하나의 비 안에 3개국의 문자가 들어 있는 특이한 비석이다. 비 머리를 이루는 이수, 받침돌의 귀부 등의 형식을 갖춘 거대한 비석이다. 이수나 귀부의 조각 이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가장 우수한 조각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이 비는 병자호란 뒤에 만들어졌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던 무렵, 명나라를 무너뜨린 후금의 태종이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친 뒤, 청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섬기는 군신 관계를 조선에 요구해 왔다. 조선 조정에서 그 요구를 거절하자, 1636년 12월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병사로 쳐들어왔으며,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이었다.
청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 주화파
최명길 등은 우리보다 힘이 센 나라이니 청나라와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삼학사 등 척화파는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도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죽음으로써 싸워 청나라를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를 맞아 싸우기에는 조선은 전쟁을 위한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1만 4,000명의 병사와 50일 동안의 식량이 준비되어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조선의 왕 인조는 삼전도에 나와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고, 해마다 많은 물자를 조공으로 바치기로 약속하면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복하였다.
이렇게 하여 1637년 1월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청나라는 소현·봉림 두 왕자, 그리고 주전론자였던
김상헌과
홍익한 등 척화신들을 인질로 붙잡아 갔다. 그러면서 청나라 태종은 전쟁을 더 계속하지 않은 자기의 공덕을 기록한 비를 세우도록 요구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워진 이 청태종의 승전비는 우리 민족에게는 치욕을 상징하는 비이다.
원래 석촌호 주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이었는지 청·일 전쟁 때 땅에 묻혔다. 그 뒤 1895년에 다시 세워졌으나, 1956년 당시 문교부의 지시로 국치의 기록이라 하여 다시 땅 속에 묻었다. 그런 과정 끝에 다시 지금의 위치에 세워지는 등 이 비는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서울시는 후세에게 치욕의 사실(史實)을 그대로 보여 교훈이 되도록 한다는 뜻으로, 비 일대에 500평 규모의 소공원을 만들고, 당시의 모습을 그린 부조비를 세워 1983년 5월 비를 위한 공원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