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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삼학사(三學士)
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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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사 (三學士)
조선 시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고 청나라를 배척하자는 '척화를 주장한 세 사람의 학사'. 평양 서윤 홍익한, 교리 윤집, 부교리 오달제 등으로, 이들을 척화 삼학사라고도 한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삼학사 (三學士) 갑자사화 기호 학파 노론 문묘 사육신 생육신 서인 소론 예송 논쟁 정묘호란 1671년 1636년 김상헌 남효온 송시열 오달제 윤집 홍익한 권상하 김굉필 김석주 김수항 김시습 김자점 김장생 김종직 김집 박팽년 봉림 대군 성삼문 소현 세자 신흠 유성원 유응부 윤선도 윤증 윤휴 이개 이이 이정구 이황 임경업 정호 최명길 하위지 효종 민유중 윤선거 허적 박세채 유근 홍서봉 국립 중앙 박물관 육신전 삼학사전 산성 일기 송자대전 추강집 사우명행록 이안눌 병자호란 인조 반정 경신환국 갑술환국 조선 효종의 북벌 계획 남한 산성 숭양 서원 화양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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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고 청나라를 배척하자는 '척화를 주장한 세 사람의 학사'. 평양 서윤 홍익한, 교리 윤집, 부교리 오달제 등으로, 이들을 척화 삼학사라고도 한다.
 
이들은 청나라를 오랑캐 나라라 하여 항복을 반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뒤 청나라의 서울 선양[瀋陽]으로 잡혀가 참혹한 죽임을 당하였다.
 
그 무렵 중국에서는 {후금}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고 있었다. 1636년에는 후금의 태종이 조선과 선린의 관계를 맺어 온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로 국호를 고친 뒤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였다. 그러고는 조선에 대하여 신하의 나라로서 청나라를 섬길 것을 요구해 왔다. 청나라의 이러한 무례한 요구에 조선 조정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격분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대국이었던 명나라를 무너뜨린, 조선의 힘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청나라의 무례한 요구에 조정 신하들의 대응책은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청나라와 조선의 힘의 차이를 현실로 인정하고, 승산 없는 싸움을 하기보다 외교적 교섭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주화론자들로 {인조 반정}을 주도하였던 {최명길}·{이귀} 등의 {공신}들이었다.
 
다른 한 쪽은 힘은 약하지만, 명분을 따라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를 도운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우리 나라에 대한 모욕을 풀기 위하여 청나라와 맞설 것을 주장한 척화론자들로, 삼학사들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마침내 명분론이 우세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전쟁의 준비도 없이 청나라와 정면 대결하기로 하였다. 청나라의 요구를 조선 조정에서 거절하자 청 태종은 그 해 12월, 10만의 병사로 쳐들어왔으며,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이었다.
 
청나라 태종이 10만 대군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했을 때에도 조선의 조정 신하들 사이의 의견은 일치하지 못하였다. 최명길 등은 계속하여 청나라와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삼학사는 죽음으로써 청나라와 싸워 물리쳐야 한다고 되풀이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를 맞아 싸우기에는, 조선은 전쟁을 위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1만 4,000명의 병사와 50일간의 식량이 준비되어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조선의 왕 인조는 삼전도에 나와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고 해마다 많은 물자를 조공으로 바치기로 약속하면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복하였다. 이렇게 하여 1637년 1월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청나라는 소현·봉림 두 왕자, 그리고 주전론자였던 김상헌홍익한 등 세 사람의 척화신, 곧 삼학사를 인질로 붙잡아 갔다.
 
청나라에서는 이들 삼학사에게 가족과 함께 청나라에서 살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홍익한 등은 청나라 태종의 국문에도 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자기 주장을 펴다가 심양(瀋陽)에서 참형되었다. 청나라 태종까지도 이들의 기개에 감탄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 삼학사의 충의와 절개를 기리기 위하여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 윤집에게는 충정(忠貞), 오달제에게는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들의 충절과 절개를 기리기 위하여 후대의 송시열은 《삼학사전》이라는 삼학사의 전기를 쓰기도 하였다. 이 책은 홍익한·윤집·오달제 순으로 그들의 약전과 언행을 기록하고, 그들이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 갈 때부터 심양에서 죽기까지의 여러 사건과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삼학사의 저항 정신과 함께 《삼학사전》은 남효온이 지은 사육신의 전기 《육신전》과 더불어 조선의 대표적인 전기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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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