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숙종 9년(
1104)에 여진을 정벌할 목적으로 세운 임시 군사 조직의 하나.
여진이 함경도 정평(定平)의 장성(長城) 부근에 나타나자, 고려는 그들과 정면 충돌하여, 두 차례에 걸쳐 판동 북면 행영 병마사이던
임간(林幹)과 추밀원사이던
윤관을 잇달아 보내어 막게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임간은 파직되고, 윤관이 숙종에게 정규군 외에 기병의 양성과 보병의 증설을 건의하여 과거를 치르지 않은 20세 이상의 양반· 승려·이서(吏胥)· 상인·노예 등을 동원하여, 신보(보병)·신기(기병)· 항마군( 승려 )과 연호군(노예)으로 나누어 조직하였다. 대부분은 백정 이었다. 이들은 토지 급여 등의 생활 대책을 마련하여 주지 않고 종군하도록 하였으므로, 여진을 정벌한 후 해체되었다.
신보군· 신기군· 항마군·연호군 등은 정규군과 함께 훈련을 받게 하였다. 신보군은 신보·도탕·경궁·정노·발화 등의 특기 부대로 편성하여, 병기와 병술 및 전술을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써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예종 2년(1107), 윤관을 원수(元帥)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여 동북계에 출병한 고려 17만 대군은 함흥 평야의 여진족 소굴을 급습하였다. 적 5,000명을 죽이고 5,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350개 부락을 수복하였다. 그리고 이 때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鎭)·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하였다.
윤관은 그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 공신·문하 시중·상서이부 판사·군국중지사가 되었다.
그 뒤 여진은 9성을 돌려 줄 것을 고려에 요구하면서 강화를 요청하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