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아라 가야(阿羅伽倻)
아라 가야
자 료 실
▶ 지식지도
원문/전문
시민 참여 콘텐츠
▶ 관련 동영상 (없음)
about 아라 가야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아라 가야 (阿羅伽倻)
가락국(駕洛國)의 6 가야 가운데 한 나라.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한 12국의 하나로 나오는 안야국(安邪國)이 아라 가야의 모태인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었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아라 가야 (阿羅伽倻) 금관 가야 대가야 함안군 가야 562년 554년 522년 209년
▣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 참조 원문/전문
▣ 시민참여콘텐츠
◈ 인기순 (1 ~ 4 위)
2019.10.30
【문화】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박종익)는 지난 4월부터 시작한 함안 가야리 유적(경남 함안군 가야리 289번지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아라가야 판축토성을 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목조 구조물과 이를 사용한 축성기술을 처음으로 확인하였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 등록순
2019.10.30
【문화】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박종익)는 지난 4월부터 시작한 함안 가야리 유적(경남 함안군 가야리 289번지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아라가야 판축토성을 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목조 구조물과 이를 사용한 축성기술을 처음으로 확인하였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 참조 카달로그
◈ 참조 키워드
고령 가야 (4) 백과 대가야 (4) 백과 금관 가야 (3) 백과 성산 가야 (3) 백과 소가야 (3) 백과 변한 (2) 백과
▣ 백과사전
가락국(駕洛國)의 6 가야 가운데 한 나라.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한 12국의 하나로 나오는 안야국(安邪國)이 아라 가야의 모태인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었다.
 
《삼국 유사》 '기이편' 5가야조에는 아야 가야(阿耶伽耶)로 전하고, 《삼국 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 또는 아나 가야(阿那加耶)로 전하여지며, '광개토왕릉비'와 《일본 서기》에는 안라(安羅)로 전하여진다. 이처럼 그 명칭이 다양하게 전하지만, 음운상 모두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아라 가야는 209년 7월 포상 8국(浦上八國)의 침입을 받았는데, 이 때 아라 가야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신라 내해 이사금(奈解尼師今)의 둘째 왕자인 날음(捺音 ?~220)의 도움을 받았다.
 
아라 가야는 4세기 말경까지 금관 가야와 함께 전기 가야 연맹의 양 세력을 이루었다.
 
전기 가야 연맹은 5세기 초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없어지고, 후기 가야 연맹이 고령 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5세기 후반에 형성되었다. 이 때 아라 가야는 후기 가야 연맹체의 구성원으로 편입되어 남서부 지역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522년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가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고 신라에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고, 신라는 529년 탁기탄(啄己呑)을 멸망시켰다. 이 일로 인하여 가야 남부 지역의 여러 세력들은 대가야를 믿지 못하고 아라 가야를 중심으로 스스로 살 길을 도모하게 되었다.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활동의 폭이 매우 제한되어, 554년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오히려 562년 신라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아라 가야는 백제· 신라·왜(倭)의 사신을 초대하여 국제 회의를 여는 등 여러 모로 세력을 과시하였으나 통합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 후 가야 남부 제국은 신라와 백제의 영향권에 각각 편입되어 분열되어 갔다.
 
남동부 지역의 가야 제국은 신라에 병합되었고, 아라 가야를 비롯한 남서부 지역의 가야 제국은 자립성을 그대로 지닌 채 백제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540년대에 가야 남서부 지역의 중심 세력으로 떠오른 아라 가야는 외교적으로 신라· 백제와 접촉하면서 독립과 안전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간섭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이에 아라 가야는 고구려와 비밀히 내통하여 548년경 고구려 · 백제 간에 전투를 유발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고구려가 백제에 패배함으로써 아라 가야를 비롯한 가야 연맹은 다시 백제에 기대게 되었다. 그 뒤 신라가 550년대 전반 한강 유역 쟁투에서 백제를 물리치고 그 여세를 몰아 가야 지역을 병합하고자 하자, 대가야와 금관 가야의 가운데에 위치한 아라 가야는 자구책으로 신라에 투항하였다. 신라는 이를 받아들여 군사적 개입의 구실을 얻어 가야 연맹체를 견제하였다.
 
아라 가야는 559년경 신라의 아시촌 소경(阿尸村小京)이 되었다. 아시촌은 아라 가야가 있던 곳으로, 경상 북도 경주시 안강읍, 또는 경상 북도 상주시를 아시촌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아시촌 소경은 신라 최초의 소경으로서, 지금의 경상 남도 함안 일대로 추정되며, 지증왕(재위 500~514) 15년(514)에 설치되었다. 지증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 를 확장하여 나갔으며, 특히 지방 제도를 새롭게 마련하였다. 즉, 주·군·현을 정하고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는 등 군현제를 실시했는데, 군현제의 실시는 연맹체 내에 있던 부족들의 반발을 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신라 왕실에서는 이들 부족들을 달래고 억누르는 양면 정책 을 쓰게 되었다. 그리하여 투항하여 오는 소국들을 회유 하기 위하여 소경이라 하여 속국처럼 대우하면서 그들에게 자치권을 주었다가 적당한 시기에 주에 편입시켜 직접 통치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시촌 소경도 이와 같은 정책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함안 일대에 남아 있는 말산리(末山里) 대형 고분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고분군은 후기 가야 연맹 시기 아라 가야의 세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기본항목(E)
내서재 추천 : 0
▣ 참조정보
백과 참조
가야 연맹의 하나.
목록 참조
 
외부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