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45] 고구려의 제23대 왕. 이름은 보연이고, 곡향강상왕, 또는 향강상왕이라고도 한다. 안원왕은 키가 7척 5촌이나 되고 마음이 넓으며 매우 어질었다고 한다. 안장왕이 왕세자가 없이 죽어 안장왕의 동생인 그가 즉위에 오른 것이다.
그 당시 중국은 선비족인 탁발씨가 세운 북위와 한족이 세운 양나라가 남북조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었는데, 고구려는 양면 외교 정책을 펼쳐 남북조와 외교 관계를 맺어 안정을 유지하였다. 또한, 534년 북위가 동위 와 서위로 나뉘는데, 이 때에도 고구려는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안원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양나라 고조로부터 안장왕이 가졌던 지위의 계승자로서 '영도장군 도독 영평이주제군사 고구려왕'이라는 지위를 인정받았다. 다음 해에는 북위로부터 '사지절산기상시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또 534년 동위로부터는 '표기대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장수왕과 문자명왕대의 남하 정책에 위기 의식을 느끼고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고 있었지만 큰 싸움은 없었다. 단지 백제가 540년에 우산성을 공격해 왔는데 곧바로 군사를 보내어 물리친 일이 있었을 뿐이다.
안원왕이 통치를 하는 동안에는 대외적으로 큰 사건이 없었고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535년에 나라 안에 큰 홍수와 지진과 전염병이 일어났고, 그 다음 해에는 가뭄까지 겹쳐 민심이 동요하였다.
그리고 안원왕 말년에 정부인 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없어 계승자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중부인과 소부인이 서로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음모를 꾸몄다. 이 때 그들을 후원하는 귀족 세력이 각각 추군과 세군으로 나누어져 결국엔 무력 충돌까지 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세군측 사람이 2,000여 명이나 죽었다.
이러한 권력 투쟁으로 고구려의 국력은 급격히 약해졌으며, 551년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게 한강 유역을 잃게 되었다.
안원왕은 추군과 세군의 권력 투쟁이 격렬하게 진행되는 도중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