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 ~ 1943] 독립 운동가.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고, 호는 백산이다.
24세에 양정 의숙 경제과를 졸업하고, 1907년 동래의 구포에 구명 학교와 의령에 의신 학교를 세웠다. 1908년 고향에 창남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에 종사하였다. 1909년에는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서상일·
박중화·
신성모 등과 함께 항일 비밀 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11년에는 북간도와 시베리아를 돌면서 독립군 기지를 돌아보고 독립 운동가들과 접촉을 가졌다. 3년 후에 귀국하여 부산에서 백산 상회를 열고 무역업에 종사하는 한편, 국내 독립 운동 단체의 연락처로 삼았다.
1919년에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여 각지에 배포하는 활약을 하였고,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바꾸고, 독립 운동의 자금을 조달하였으며 애국 청년 학생들을 해외에 유학시켜 교육 사업도 벌였다. 1925년에 중외일보사를 인수하여 중앙일보사로 이름을 바꾸고 사장이 된 후 총독 정치를 비난하는 글을 발표했다.
1931년부터
대종교를 믿기 시작하고, 1933년에는 중국 헤이룽장성 둥진청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세워 중국인 지주에게 착취당하는 교포들의 생활 개선과 청소년의 민족 교육에 힘썼다. 그리고 대종교의 총본사 전강·교적 간행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종교를 통하여 민족 자주 정신을 고취하였다.
1942년 11월 일본 경찰은 대종교 조직을 독립 운동 단체로 보고 대대적으로 21명을 체포한 임오 교변 사건이 터졌는데, 이 때 안희제도 구금되었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병을 얻고, 9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무단장 병원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기념·유적
백산기념관 및 백산 안희제선생 동상
동상건립문 (1989.9.7)
"새는 한가로움을 좋아해 후미진 골짜기만 찾아드는데 해는 치우침을 싫어해 중천에서 비추인다 (님이 17세에 지은 시)
1885년 8월 4일(음력)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난 님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워 선비의 서슬푸른 의리 정신을 몸에 익혔다. 1905년 을사조약의 소식을 듣고 구국의 한마음으로 서울로 올라가 보성전문, 양정의숙에서 경제학을 배웠다. 이때 교남 교육회를 만들어 의령을 비롯하여 영남 각지에 학교를 설립, 민족 교육의 씨앗을 뿌렸다. 나아가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격동된 서른살 안쪽 청년 80여명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 청년단을 조직하였다. 기어코 나라를 빼앗기자 나라 밖으로 떠나 러시아와 중국을 무대로 민족해방운동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4년 가을께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창립하고, 장차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발돋움케 하였다. 이로써 민족자본을 육성하는 한편 국외의 독립군 단체에 군자금을 보냈으며 나라 안팎의 민족해방운동 세력들 사이의 연락 거점노릇을 하였다. 그리하여 3.1 운동의 전민족적 봉기를 준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건을 지원하고 스스로 연통제의 동맥이 되어 그 기관지 《독립신문》의 국내 보급통로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기미육영회를 만들어 청년들에게 국외 유학의 길을 터주고, 부산청년회를 만들어 지역 사회 운동의 터를 닦았다. 1927년에는 민중 생활 방위, 민중에 의한 산업 관리를 목적으로 협동조합 운동에 뛰어들었고, 이를 위해 잡지 《자력》을 발간하였다. 일찍이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했던 님은 1929년에 중외 일보사를 경영하여 민족언론 수호에 진력하였다. 한편, 님은 1927년에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힘을 모아 신간회를 결성하자 이를 지지하고, 영남의 유림 지주들이 영남친목회를 결성하려 하자 그것이 지역 감정을 불러일으켜 신간회로 민족 역량을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하여 분쇄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가 첨예한 항일투쟁의 무대가 되자 발해의 옛 수도 동경성으로 들어가 드넓은 땅을 개간하여 발해 농장이라 이름 짓고 발해 보통학교를 설립했으며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겨오게 하였다. 이로써 동포 이주민의 생활을 안정시킴과 함께 항일투쟁의 경제적 기반을 쌓고 민족교육을 베풀고, 대종교를 민족 정신의 고갱이로 삼아 이곳을 독립운동 근거지로 육성하고자 함이었다. 이렇듯 민족해방의 불씨를 지펴 나가던 님은 일제 경찰의 손아귀에 붙들려 아홉달 동안 모진 고문과 옥살이에 시달리다가 "집안 일이든 나라 일이든 오직 자력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는 유언을 남긴 채 1943년 9월 2일(음력 8월 3일) 쉰 아홉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일제에 맞선 투쟁에서 한 걸음도 비켜서지 않고, 그 한가운데로 나아가 비타협 절대 독립의 독립전쟁 노선을 굳게 관철해 나간 님의 의리정신, 민족의 협동 단결로 민족 해방을 달성하고 민중의 협동 단결로 민중경제를 건설해야 한다는 님의 협동정신, 자력을 중심으로 민족자주독립, 민족자립경제 건설을 이룩하고자 하였던 님의 자력정신을 이어받아 올곧은 부산정신, 민족정신으로 뻗어 내리게 하고자 이곳에 님의 흉상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