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위험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전국적으로 벌어진 국권 회복 운동.
1905~1910년의 기간은, 강제로 맺어진 을사조약 으로 국권의 일부를 잃어버린 조선이 결국 한일 합병으로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까지의 아주 중요한 시기로, 이 때 조선의 각계 각층에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기 위해 벌인 활동은 크게 보아 의병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의병 운동은 그 이전에도 외국의 침략 등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일어났던 민중들의 자발적인 군사 활동으로, 특히 조선이 개항하기 전에 일본· 중국 을 비롯하여 서양 여러 나라의 개항 요구를 물리칠 수 있었던 데는 의병들의 활약이 컸다. 고종이 끝내 조약 맺기를 거부했던 을사조약이 일본의 조작으로 성사되고 나라의 권리를 일부 빼앗기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민중들은 또다시 힘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 초기에 의병으로 활약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만주 등지에서 일어난 독립군 활동에도 큰 기여를 했다. 의병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은 모두 나라의 권리 를 되찾고자 일어난 국권 회복 운동으로서 그 바탕에는 애국 정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 2가지 운동은 그 방법 면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즉, 의병 운동 은 무력을 사용한 군사 활동이었던 반면에 애국 계몽 운동 은 교육과 개화를 통해 국민 모두의 실력을 닦고 그 실력을 바탕으로 잃어버린 나라의 권리를 되찾고자 했던 비폭력적인 국권 회복 운동이었다.
애국 계몽 운동을 앞장서 이끌었던 사람들은 한말 개화파의 뜻을 이어받은 사람들로서 독립 협회나 만민 공동회 등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 밖에도 대한 자강회 등 각종 애국 계몽 운동 단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조선 전체의 국민 모두를 교육시키고 계몽시켜 개개인의 실력을 키우면 이것이 곧 나라의 힘으로 이어져 일본에 빼앗긴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애국 계몽 운동의 주인공으로서의 민중의 힘을 강조했다. 즉, 애국 계몽 운동은 한말의 개화파가 그랬던 것처럼 교육 받은 지식인들이 앞장서 무지한 민중들을 일깨우는 운동이었다. 애국 계몽 운동은 단순한 교육 활동에만 그치지 않았으며,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국권 회복을 꾀했다. 《대한 매일 신보》 《황성 신문》 등의 신문과 각 계몽 운동 단체들이 발행하는 신문을 통해 일제의 횡포를 비난하고 국민들, 특히 배우지 못한 많은 민중들에게 애국 정신을 일깨웠으며, 일본에 진 빚을 갚고자 국채 보상 운동을 벌여 전국적인 모금 운동이 이루어졌다. 이 밖에도 일제의 경제적인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산업 장려 운동을 벌였으며, 중국 만주 지역에 독립군을 길러 내기 위한 무관 학교를 세웠다.
애국 계몽 운동의 내용
애국 계몽 운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민 교육 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이유를, 지식 수준과 군사적인 힘이 일본보다 뒤떨어져 있다는 데서 찾은 계몽 운동가들은 각종 교육 활동과 강연을 통해 국민 전체의 수준을 높이면 곧 나라의 힘이 길러지고 빼앗긴 나라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학교를 세우고 실제로 국민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신교육을 가르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마침내 성과를 거두어 국민들 스스로가 돈을 모아 자기 지역에 학교를 만들게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립 학교가 전국에 걸쳐 수천에 달했다. 사립 학교에서 국권 회복 운동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일본은 갖가지 방법으로 사립 학교의 설립을 막고, 이미 문을 연 학교에 대해서는 법에 정해진 규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폐교를 명령했다. 그러나 교육열은 식을 줄 몰랐고 오히려 더욱 강해졌으며, 학교를 마친 젊은이들은 교사가 되거나 국권 회복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둘째, 신문· 잡지 등을 통하여 애국심을 고양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에 앞장섰던 신문으로는 《대한 매일 신보》 《황성 신문》 《만세보》 《제국 신문》을 들 수 있으며, 잡지에는 《소년》이 있다. 특히, 《황성 신문》은 1905년 11월 20일자 사설에 장지연이 쓴 ' 시일야 방성 대곡'을 실어 을사조약 을 강요한 일본을 규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사실을 안 일본에 의해 《황성 신문》의 발행이 얼마간 중지되었으나 다시 발행을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일본을 비판하고 애국심 을 드높이는 기사를 주로 실었다.
셋째, 국채 보상 운동 을 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의 김광제와 서상돈 등이 일본으로부터 얻은 조선의 빚을 국민들의 힘으로 갚자는 내용의 글을 전국에 뿌렸고 각지의 국민들이 이에 크게 동조함으로써 일어났다. 이 빚은 원래 일본이 조선에 강요해 억지로 꾸어가게 만든 돈으로 약 1,300만 원 가량 되었다. 국민들은 빚이 있다는 사실이 국권 회복을 막는 걸림돌이라는 생각에서 기꺼이 성금을 모았다. 전국적으로 무수히 많은 모금 단체가 생겼는데, 성금을 내기 위해 남자들이 담배 를 끊었는가 하면 여자들은 생활비를 아끼고 얼마 안 되는 금부치까지 팔았다. 이에 놀란 일본은 신문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탄압의 방법을 찾아 나섰는데, 결국 대한 매일 신보사의 국채 보상 기성회 간부인 양기탁이 성금으로 걷은 공금을 사사로이 써버렸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그 뒤로 국채 보상 운동은 활기를 잃었으나 국민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계기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넷째, 경제력을 기르기 위한 민족 산업 장려 운동을 하였다. 조선땅에 차츰 일본의 투자와 경영으로 이루어지는 산업이 늘어나면서 경제적인 위기를 느낀 애국 계몽 운동가들은 경제력을 기르는 것도 지식을 늘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민족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돈을 모으고 조선인 스스로 회사를 설립하도록 장려했다.
다섯째, 중국에 독립군 활동지를 마련하였다. 애초에 군사력으로 일본에 맞섰던 의병 활동과 달리, 무력을 쓰지 않는 국권 회복 운동을 벌여 온 애국 계몽 운동가들이었지만 많은 활동이 일본의 감시와 탄압 앞에서 흐지부지되자 차츰 군사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감시가 떠나지 않는 조선땅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자연히 외국에서 알맞은 장소를 찾게 되었고, 결국은 중국 만주 지역에 독립군 거점이 생기게 되었다. 이 곳에는 독립군을 길러 내기 위한 무관 학교 가 세워져 앞으로 있을 독립 전쟁에서 활약할 장교를 교육시켰다.
애국 계몽 단체
애국 계몽 운동은 1904년
보안회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보안회는 황무지를 개척한다는 핑계로 조선의 토지를 빼앗으려 한 일본의 계획을 막는 데 성공했으나 1905년 일본의 강요로 해산되었다. 그 해 5월 보안회를 이은
헌정 연구회가 만들어져 계몽 활동을 펼쳤으나 일본은 을사조약 체결 반대 등 정치적인 활동을 금지하고, 오직 문화 활동만을 허락했다.
1906년 3월에는 헌정 연구회를 키워
대한 자강회로 다시 출발했다. 서울에 본부를 둔 대한 자강회는 전국에 25개의 지회를 설립하고 각지를 돌면서 강연회를 열어 민중 계몽 운동 을 활발하게 펼쳤다. 특히, 새로운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 활동과 근대적인 공장· 회사 등 민족 산업을 키우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대한 자강회도 1907년 8월 일본인 고문 오가키[大垣丈夫]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대한 자강회의 뒤를 이어 1907년 11월에는
대한 협회가 만들어져 이제까지의 애국 계몽 운동을 이어 나갔다. 대한 협회의 기본 정신은 대한 자강회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이들 단체 외에도 계몽 운동가들은
서우 학회 ·
한북흥학회 ·
호서 학회 ·
호남 학회 ·
관동 학회 ·
기호 학회 등을 조직하여 기관지를 펴내고, 사립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활동을 해 나갔다. 그러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일본의 감시를 받으며 이루어지는 애국 계몽 운동의 한계를 절실히 느낀 일부 사람들은 1907년에 비밀 조직인
신민회를 만들었다.
신민회는 특히 중국 만주에 무관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길러내는 일에 앞장을 서 실제로 1911년
신흥 무관 학교, 1913년
동림 무관 학교·
밀산 무관 학교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의 탄압을 받아 신민회는 거의 해체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