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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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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영화 (英國映畵)
영국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특징과 감수성에 의해 영국에서 제작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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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영화 (英國映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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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감상 독본 근/현대 수필 박인환 (18) 전후 미ㆍ영의 인기배우들 근/현대 수필 박인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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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특징과 감수성에 의해 영국에서 제작된 영화.
 
영화가 최초로 영국에서 제작되기 시작한 시기는 다른 외국과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세기 말에 등장하였다. 발명가인 W. 프리즈 그린에 의하여 원시적인 영화 카메라로서의 활동 사진의 촬영기가 만들어진 것이 1889년으로서 그 후 7년 뒤에 이르러 R.W. 폴에 의하여 만들어진 영화가 처음으로 상영되었다. 이에 앞서 프랑스 출신의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대중에게 알려졌다. 폴이 만든 극영화의 뒤를 이어서 S. 헤프워스와 함께 출신 지명을 본따서 브라이턴파라고 불린 J. 윌리엄슨과 G.A. 스미스·프랭크 모터쇼 등이 만든 영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이 만든 영화들은 1900년을 전후한 때에 이미 오버랩이라든가 몽타주· 클로즈업 등의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거의 대부분이 1분도 안 되는 짧은 것들이었다. 1911년에서 1913년에 걸쳐 허버트 H. 폰팅에 의하여 1시간 30분짜리의 장편 기록 영화 인 《스콧의 대탐험》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외국 영화와 함께 영국의 영화도 무성 영화 시대로서의 흥행에는 성공하였다고 하겠지만 제작은 미미하였다.
 
초기의 영국 영화의 특징은 표현 기법의 실험과 현실에 근거를 둔 사회적인 소재의 선택 등에서 매우 뛰어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910년대에 영국에서 발표된 영화는 프랑스 영화가 36%, 미국 영화가 28%, 이탈리아 영화가 17%이며, 이에 비하여 영국 영화는 16% 정도에 그쳤다. 무성 영화 시대의 후기라고 할 수 있는 1926년에 이르러서는 총 상영된 영화 중 영국 영화의 비율은 5%인 34편 정도로 크게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내 영화의 보호 차원에서 쿼터법을 만들었는데 제작 편수는 증가되는 경향을 띠었지만, 수준은 크게 떨어져 우수한 영화는 매우 드물었다.
 
이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작품들로서는 A. 히치콕에 의하여 1926년에 발표된 《하숙생》, 하버트 윌콕스에 의하여 1928년에 발표된 《새벽》, 앤소니애스키스와 A.W. 브랜블이 합작으로 1927년 발표한 《유성》 등을 들 수 있다.
 
1929년에 히치콕은 영국에서 처음으로 토키 영화 즉 발성 영화인 《공갈》을 발표하였으며, 이 때부터 영국 영화 전반에 걸쳐 우수한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무성 영화 시대에는 미국 영화가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으나, 언어를 같이 전달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영국 의 영화 제작계는 활성화되기 시작하였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에 따라 1932년 헝가리 출신의 A. 코르다에 의하여 '런던 필름'이 설립되었고, 그 자신이 직접 감독한 《헨리 8세의 사생활》을 만드는 것과 함께 프랑스로부터 초빙되어 온 R. 클레르에 의하여 1935년 《유령 서쪽으로 가다》가 만들어졌고, 브뤼셀 출신의 J. 페데가 감독을 맡은 《갑옷 없는 기사》를 만드는 등 활기찬 제작 활동을 보였다. 또한 이 무렵에 외국 출신의 G. 파스칼 이 B. 쇼에 의하여 《피그말리온》이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코르다의 작품의 색채는 국제적인 성향을 띠었으므로 엄격한 의미에서는 순수 영국 영화로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에 의하여 영국 영화가 국위를 선양한 공로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순수하게 영국적인 색채를 띤 대표적인 작품들에는 A. 히치콕에 의해서 1935년에 발표된 스릴러 영화 《39야》와 V. 새빌에 의해서 1935년에 발표된 《영원한 초록》을 꼽을 수 있다. 이 무렵에 있어서 인기 스타로 이름을 날린 사람은 R. 도너트와 여배우 A. 니글이 있었다. 또한 1929년은 J. 그리어슨의 다큐멘터리 작품으로서 영국 영화사에 기록될 만한 작품인 《유망어선》이 발표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가 부르짖은 ' 다큐멘터리 필름 운동 즉 기록 영화 운동 은 몇 년 만에 큰 호응을 받았으며, B. 라이트와 P. 로더 에 의하여 이론의 전개와 제작이라는 양면을 통하여 큰 활약이 있었다. 기록 영화는 현실의 분석과 창조적인 표현으로서 영국적인 색채가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하나의 예술 양식 으로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조차도 1937년 중에 이르러서는 극영화와 더불어 한계 상황에 부딪치는 시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전시에 기록 영화가 활기를 띤다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영국에서는 극영화에 대한 강력한 영향으로 침투되었다. 이와 같은 유형의 작품에는 P. 잭슨이 1944년에 발표한 《새벽의 뇌격전》과 C. 리드가 1944년에 발표한 《최후의 돌격》 등을 꼽을 수 있다. 전쟁 기간 중에는 제작 편수가 크게 감소된 경향이 있었지만, 영국 영화의 경우에는 오히려 이전보다 활기를 띤 극영화와 더불어 D. 린에 의해서 1943년에 발표된 《행복한 종족》과 1944년에 발표된 《쾌활한 유령》 등과 같이 전쟁 소재가 아닌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또한, R. 올리비에는 1945년 《헨리 5세》를 천연색 거작 영화로 전시에 만들었다는 것을 보아도 활기찬 작품욕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장편의 전쟁 기록 영화로는 R. 볼팅이 1943년 발표한 《사막의 승리》와 C. 리드가 미국 출신의 G. 케닌과 합작으로 1945년 발표한 《진정한 영광》이 서로 우열을 겨룰 만큼 뛰어난 작품들이었다. 이와 같이 전시에 활기를 띠었던 영화 부흥에 대한 기운은 1945년에서부터 1948년에 걸쳐 최고로 발전하였다. 영국 영화의 르네상스 라고 할 수 있는 이 무렵 영화 제작자로부터 A. 랭크를 주축으로 훌륭한 대작들이 계속적으로 발표되었다. 린이 1945년 발표한 《밀회》라는 작품은 문학적인 정서를 사실에 입각한 영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리드가 감독한 1947년의 작품 《심야의 탈주》는 스릴러 영화의 명작으로, 이들 두 작품 모두가 기록 영화의 기법을 쓴 전형적인 영국 영화라는 관점에서 세계적으로 많은 호응을 받았다. 드라마와 기록을 잘 접목시킨 것은 M. 발콘이 제작하는 작품에서 잘 나타나 있으며, 색채 영화로서는 M. 파웰과 E.P 버거가 공동으로 1947년에 제작한 《흑수선》과 1948년에 제작한 《분홍신》에서 독창적인 수법이 잘 나타나 있으며, 고전적 영화로서는 올리비가 1948년에 발표한 《햄릿》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연기면에서는 T. 하워드, J. 메이슨 등과 같은 남자 배우와 데보라 카 같은 여배우가 이 무렵 크게 두각을 나타냈으며, V. 리의 경우는 미국 영화에 출연하는 횟수가 크게 늘어났다. 1948년 영국 경제의 안정적 기반을 구축한다는 차원에서 외화에 대하여 고율의 관세를 적용하여 외국 영화의 상영이 줄어든 반면 국내에서는 졸작들이 판을 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전쟁 중 문을 닫았던 런던 필름 이 다시 문을 열면서 랭크계에 속해 있던 영화인들의 대부분이 런던 필름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리드는 이 곳을 통하여 1948년 《떨어진 우상》과 1949년 《제3의 사나이》 등의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왕성한 활동을 한 배우들로는 R. 리처드슨과 J. 밀스를 들 수 있다. 또한 이 무렵에는 새로운 형식을 띤 희극을 만들게 되었는데, H. 코넬리어스의 1949년 작품 《핌리코로 가는 여권》과 A. 매캔드릭의 1951년 작품 《흰 옷 입은 사나이》 등이 속속 제작되었다. 이들 작품들은 위트와 유머를 통한 예리한 풍자로 엮어졌으며, 영국 영화에 있어서 하나의 전통을 만들어 냈다. A. 기네스와 같은 사람은 이러한 희극을 통해서 나온 연기자이다. 1956년 초에 런던 필름을 세운 코르다가 사망하자 미국의 영화 자본이 영국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영화 제작 편수가 급격하게 늘어나 리드나 린과 같은 유명한 감독과 배우들이 대거 미국 영화로 그 활동 무대를 바꾸었다. 린이 미국 영화사 소속으로서 연출한 1957년 작품 《전장에 놓은 가교》나 P. 오툴이 1962년에 주연한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과 같은 작품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영국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때를 맞추어 텔레비전의 위력에 따라 문을 닫는 극장이 잇달아 나오게 되면서 또 다른 불황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1959년에는 J. 크레이턴의 《연상의 여인》이나 T. 리처드슨이 감독을 맡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와 같은 작품들이 나왔으며, 신진 감독들의 작품도 속속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리처드슨 은 1961년 작품 《꿀맛》과 1963년 작품 《장거리 주자의 고독》, 1963년 작품 《톰 존스의 화려한 모험》 등을 감독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프리 시네마파와 같은 기록 영화 를 다시 만들고자 하는 영화 작가들에 의하여 뛰어난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K. 라이스의 1960년 작품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 R. 앤더슨의 1963년 작품 《고독의 보수》 등이 그 계통에 들어가는 영화들이다. 이들 영화를 통하여 신진 배우들로서 A. 피니와 같은 사람이 나왔으며, 이 외 신예 감독의 작품에는 J. 슐레징거의 1962년 작품 《어떤 애정》이나 B. 포브스의 1962년 작품 《L자의 방》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 신예 작품들의 성향은 현실적 불만 세력인 서민 생활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면서 기록 영화의 수법을 가미하였다는 점에서 영국 영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영국 영화는 이와 같이 현실적인 표현과 정서를 내면에 두고, 희극의 웃음을 새로운 측면에서 만들어 내는 동시에, 스릴러 영화를 강조하면서 1962년에 이르러 《007 시리즈》와 같은 스파이 액션 영화를 만들어 오락 영화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모든 영화들에는 언제나 기록 영화 의 색채가 가미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상승과 쇠퇴를 반복해 오면서 영국 영화는 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으로서 외국과의 합작을 통한 영화를 만들고자 노력하면서 끈기 있는 저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항상 그들 나름대로의 영화적 특질을 작품에 투영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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