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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장안사(長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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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사 (長安寺)
북한의 금강산 장경봉 아래에 있는 큰 절.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시민 참여 콘텐츠
조회수 : 47 (2 등급)
◈ 만덕 방문 30여 년 전 친구들과 다녀와...당시 체험 바탕 ‘김신선전’ 소설 써
연암 박지원과 금강산 비로봉
장안사는 오랜 세월에 걸쳐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법당, 종루, 요사채, 장경고, 삼문을 세웠다. 유람객들은 장안사 산내 암자로 지장암, 안양암과 영원암, 금장암을 많이 찾았다. 지장봉에 위치한 영원암(靈源庵)은 신라의 영원조사가 창건한 암자로 금강산 일원에서 가장 맑고 고요한 수도처로 소문나 한 철 지내러 오는 선객이 많았다.
금강산(金剛山) 김만덕(金萬德) 박지원(朴趾源) 장안사(長安寺) # 김신선전
연암 박지원과 금강산 비로봉
 
 
장안사는 오랜 세월에 걸쳐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법당, 종루, 요사채, 장경고, 삼문을 세웠다. 유람객들은 장안사 산내 암자로 지장암, 안양암과 영원암, 금장암을 많이 찾았다. 지장봉에 위치한 영원암(靈源庵)은 신라의 영원조사가 창건한 암자로 금강산 일원에서 가장 맑고 고요한 수도처로 소문나 한 철 지내러 오는 선객이 많았다.
 
근대에 들어 성우, 만해, 백성욱이 함께 방부를 들여 수도했던 도량이다, 《일만이천봉 조선금강산》 책에는 영원암을 “참선(參禪) 도량으로 산중 최고의 청적(淸寂)한 영지(靈地)”라고 소개했다.
 
 
▲ 만해가 주석했던 영원암
 
 
장안사는 조계종 초대 종정인 한암 스님과 석성우 스님의 출가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 복원하려는 사찰이다. 인근의 옥초대(沃焦臺)는 영원조사가 수도하였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고 그 앞의 넓고 반듯한 바윗돌은 영원조사가 공부하던 곳이라 하여 산중 사람들은 ‘책상바위’라 이름을 붙였다.
 
안양암은 장안사 동북쪽 3km 지점에 있는데, 고려왕조 성종 때 화정선사가 창건했다. 이후 회도(懷道) 선사가 수도했다. 작은 암자에는 미륵불과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어 찾는 이들이 많았다.
 
지장암(地藏庵)은 1921년 금강산 건봉사 조실로 추대된 한암(漢巖) 스님이 주석했다. 전강(田岡)이 출가 전에 고승 한암과 서찰로 선에 대해 문답을 주고받다가 1923년 한암을 직접 찾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내금강 금장암(金藏庵)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삼층 석탑에서 갑석을 머리에 이고 있는 석탑이 있다. 이 탑은 고려왕조 초기에 조성된 탑으로 높이가 3.7m로 기단부와 삼층의 탑신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치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탑과 그 모양이 닮아있어 신기하다. 불교에서 사자는 불법을 수호하는 동물로 부처님을 상징한다.
 
 
▲ 가을의 금장암 사사자석탑
 
 
만덕이 금강산을 방문하기 30여 년 전에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친구들과 금강산을 찾았다. 연암은 영조 41년(1765) 가을에 친구 김이중(金履中)이 나귀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유언호(兪彦鎬, 1730~1796)와 신광온이 함께 금강산을 찾았다.
 
연암은 아버지가 벼슬이 없어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에 의해 양육됐다. 1760년 할아버지 지동녕부사(知敦寧府事) 박필균(朴弼均, 1685~1760)이 돌아가신 후에는 가세가 점차 기울어 집안이 가난했다. 박지원은 1765년 과거에 실패한 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다.
 
연암은 금강산을 다녀와 기행문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훗날 《金神仙傳》를 썼다. 소설 《金神仙傳》의 주인공 이름은 ‘홍기’이다. 홍기가 열여섯 살 때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고는 이후 아내와는 같이 살을 섞지 않고 혼자 지냈다.
 
홍기는 매일 곡식을 물리치고 벽을 보고 수행하다 두어 해 만에 몸이 아주 가벼워져 국내의 이름난 산을 두루 찾아 노닐면서 한숨에 수백 리를 달리고는 해가 느리다고 불평했다.
 
다섯 해 만에 처음 신을 바꿔 신었고, 험한 곳을 만나면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홍기는 밥도 먹지 않고,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았다. 여름에 아무리 더워도 부채질을 하지 않아 사람들은 홍기를 신선으로 여겼다. 홍기는 정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놀라운 기행을 펼쳤다. 이 소설에서 박지원은 화자가 되어 질문한다. “산에 들어가 보니 단풍나무가 많아서 한창 타오르는 듯이 붉다.
 
〈풍악당집서〉에 의하면 그 무렵 내금강의 內圓通庵에서 楓嶽大師 普印(1701~1769)이 수행하고 있었고, 준(俊) 대사는 그와 시를 주고받는 절친한 사이였는데 연암 일행은 그 들을 잘 몰랐다.
 
연암은 엿새 동안 줄줄 계속 내리던 비가 그치자마자 벽곡하는 사람이 머물고 있다는 선암을 향해 떠났다.“ 연암은 〈髮僧菴記〉와 〈楓嶽堂集序〉, 〈觀齋記〉 등의 산문에서 금강산 유람을 언급했다.
 
연암은 장안사에 머물며 산에 오르며 가마를 메고 가는 승려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싸리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豫章나무는 다 서리를 맞아 노랗고, 삼나무와 노송나무는 더욱 푸르러 보였으며, 사철나무가 특히나 많았다.
 
산중의 온갖 기이한 나무들은 다 잎이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어, 사방을 둘러보고 단풍을 즐겼다. 이 산중에 도술을 터득하여 함께 교유할 만한 중이 있느냐?” 가마를 멘 승려는 “없습니다. 선암(船菴)에 벽곡(辟穀: 오곡을 먹지 않는 도교의 수련법)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누구는 말하기를 영남 선비라고 합디다. 그러나 사실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선암은 길이 험하여 도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연암은 금강산 유람 길에 불경에 정통하고 한시도 잘 짓는 고승을 만나 교유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지만, 승려를 만나지 못했다. 연암은 1768년 종로 백탑 근처로 이사를 가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과 교류하며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하였다.
 
 
▲ 비봉폭포(사진:현대아산)
 
 
당시 생활도 어렵고 정치 세력간의 갈등으로 정세가 불리해져 황해도(黃海道)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했다. 이후 이곳 지명이 아호가 되었다. 박지원은 청나라 가는 사절단을 수행하여 베이징과 열하(熱河)를 다녀온 뒤 《열하일기》를 지었다. 박지원은 서학에도 관심이 많았고, 청의 발전한 문물을 수용해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졌다.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에서 뻗어 나온 주 능선의 분수령인 안무재(內水岾)를 기준으로 그 서쪽 내륙지역을 內山(내금강)이라 하고, 바다를 향한 그 동쪽 지역을 外山(외금강)이라 한다.
 
만덕은 금강산에 들어온 이후 염불하듯 소리를 내어 산과 암자 이름을 열심히 외웠다. 만덕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법당에 다녀온 후에는 승려들을 따라 사자목과 전망이 좋은 습경대, 귀면암을 보고는 유선암 주변의 오만물상(奧萬物相) 쪽에 있는 연주폭포와 이단폭포를 구경했다.
 
비로봉으로 가는 날은 사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른 날보다 더욱 분주하고 활기가 넘쳤다. 산이 높고 멀기도 하지만 함께 가는 인원이 많아 가져갈 음식도 많아 마치 소풍을 떠나는 행렬처럼 보였다. 승려들도 비로봉에 올라가 본 사람이 많지 않아, 만덕 보살이 비로봉을 찾을 때 함께 가려고 나섰다.
 
비로봉은 금강산의 주봉으로 동해의 푸른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만덕은 넓은 비로고원에서 누운 잣나무, 누운 향나무, 누운 측백나무, 만병초 등 고산식물을 보면서 바람이 세서 한라산에 바짝 엎드린 나무들을 생각했다. 아래로 소비로봉이 보이고 금사다리 은사다리로 불리는 절경을 끼고 있어 정말 장관이었다.
 
승려들은 정상에서 만덕에게 산의 방향과 산에 얽힌 많은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덕은 금강산에서 나이 많은 포수를 만나 짐승에 대해 물었다. 포수는 “산에 동물이 아주 많다.”라고 대답했다. 금강산에는 사향노루, 곰, 산양이 많고 2백 종의 조류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 겨울 비로봉(1,639m)(사진:현대아산)
 
 
금강산 비로봉에 오르면서 승려들은 ”배가 고프면 이 산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구경할 수 없습니다. 떡도 드시고 감자도 드시고 물도 충분하게 드십시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만덕은 만물상을 보고는 비탈길이 없는 편안한 하산길인 동석동 쪽으로 걸었다. 이 길에는 기암괴석이 많아 선하동과 미인송군락지와 영춘대를 보았다.
 
길을 안내하는 승려가 “북쪽의 영랑봉(1,601m), 옥녀봉(1,424m), 상등봉(1,227m), 오봉산(1,264m) 등이 있다. 남쪽으로는 월출봉(1,580m), 일출봉(1,552m), 차일봉(遮日峰, 1,529m), 미륵봉(1,538m), 그리고 전망 좋은 백마봉(1,510m), 호룡봉(虎龍峰, 1,403m), 국사봉(1,385m)이다.
 
산들이 형성한 분수계를 경계로 하여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으로 구분한다. 내금강에는 북한강의 상류인 동금강천과 금강천이 흐르고 외금강에는 고성 남강 및 지류인 온정천 등이 흐른다. 이들 하천이 태백산맥의 분수계를 향하여 활발한 두부침식(頭部侵蝕)을 진행하여 이른바 일만 이천 봉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비로봉, 영랑봉, 채하봉(彩霞峰, 1,588m) 일대에는 태백산맥이 융기하기 전의 원지형으로 비교적 평평한 고위평탄면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라고 말했다.
 
 
▲ 세지봉 밑의 망양대(사진:현대아산)
 
 
세지봉 끝에 위치한 망양대는 세지봉 줄기에 있는 온갖 형태의 기암괴석들과 서쪽 오봉산을 바라보기 좋은 곳으로 만덕은 길을 안내하는 승려가 알려준 자리에서 봉우리를 바라보았는데 정말 산이 정말 달랐다. 산이 요술방망이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 자꾸만 달라졌다. 망양대에서는 푸른 동해와 주변의 작은 섬들을 조망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보는 금강산의 모습은 약 1천만 년 전인 신생대(新生代) 제3기 중신세 이후 진행된 경동성 요곡운동(傾動性撓曲運動)으로 형성되었다. 암석은 흑운모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대부분으로 오랜 세월 동안의 풍화와 침식으로 온갖 천태만상(千態萬象)의 기암괴석과 함께 수많은 골짜기마다 노암(露巖)의 수직 절벽, 암대(巖臺), 폭포, 분류(奔流), 심담(深潭)을 형성해 놓았다.
 
내금강을 흐르는 북한강 상류의 하천들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나, 외금강의 하천들은 길이가 짧고 경사가 매우 급하여 침식력이 더 크므로 산세의 험한 정도나 골짜기의 깊은 정도에 있어서 외금강 쪽이 훨씬 뛰어나고 지역적 범위도 넓다. 시인 묵객들은 “내금강은 온자우아(蘊藉優雅)하여 여성적이고, 외금강은 웅건수특(雄健秀特)하여 남성적이다.”라고 비교한다. 금강산의 동쪽 해안에는 수원단(水源端)으로부터 구선봉에 이르기까지 입구가 모래로 막힌 아름다운 호수와 기암이 어울린 해금강이 있다.
 
만덕은 선녀와 나무꾼 전설의 배경인 상팔담에 오르고자 기다렸으나 산에 비가 내려 조금 실망했다. 다음 날 날씨가 좋아지자 승려들과 함께 상팔담으로 걸었다. 안개가 걷히자 8개의 맑은 웅덩이가 보였다. 호수에서 떨어져 흐른 물이 높이 74m, 너비 4m로 흘러 구룡폭포가 되고 다시 옥류동 계곡을 지나 동해 바다로 나간다.
 
구룡폭포 아래에는 깊이 13m의 구룡연이 있다. 구룡폭포는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3대 폭포이다. 만덕은 외금강 지역의 바위산으로 유명한 금강산을 대표하는 만물상을 바라보면서 또 한 번 넋이 빠졌다. 만물상의 본래 이름은 만물초(萬物草)였다. 만물초는 조물주가 이 세상을 창조할 때 금강산을 초(草)를 잡아 만들었다는 뜻이다.
 
금강산의 산악미가 돋보이는 만물상은 온정천 상류의 한하계 골짜기, 만상계, 온정령의 명승 구역으로 깎아지른 층암절벽과 천태만상을 나타내는 기암괴석들로 특이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만덕은 용기를 내어 만상정, 삼선암, 칠층암, 절부암, 안심대, 하늘문, 천선대, 망양대에 이르는 힘든 길을 걸었다.
 
만덕은 천선대에 오르면서 하늘 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기어서 갔는데 너무 힘들어 법기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만덕은 하늘 문에 이르러 파란 하늘을 보면서 금강산의 오묘함을 찬탄했다.
 
 
▲ 여름의 금장암 사사자석탑(사진:국립문화재연구원)
 
 
만덕은 장안사로 돌아오면서 사자를 신비로운 동물로 생각했다. 현재 금장암 암자는 사라지고 그 터에 석탑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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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일: 2024.05.23. (최종: 2024.05.25. 12:43))  궁인창의 독서여행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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