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장안사(長安寺)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장안사 (長安寺)
북한의 금강산 장경봉 아래에 있는 큰 절.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시민 참여 콘텐츠
조회수 : 20 (2 등급)
◈ 4. 금강산 장안사를 찾아서
오늘은 노정(路程)을 바꿔서 서울서 철원(鐵原)을 거쳐서 창도(昌道)를 지나 내금강(內金剛)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하여 장안사(長安寺)로 가보려고 한다.
금강산(金剛山) 장안사(長安寺) 절(寺) 정태혁(鄭泰爀) 회양군(淮陽郡)
北韓 寺庵 紙上巡禮記
④ 金剛山 長安寺를 찾아서
鄭泰爀 (哲博·東國大佛教大教授)
 
 
오늘은 노정(路程)을 바꿔서 서울서 철원(鐵原)을 거쳐서 창도(昌道)를 지나 내금강(內金剛)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하여 장안사(長安寺)로 가보려고 한다.
 
이 길을 밟으려면 옛날에는 금강산전철(金剛山電鐵)이 창도(昌道)까지 개통(開通)해 있었으므로 창도(昌道)까지 전철(電鐵)로 가서 여기서부터는 자동차로 백여리를 달려가던 묵파령(墨坡嶺)이란 높은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었다. 이 고개에 올라서면 기도한 금강산(金剛山)의 산형(山形)이 눈앞에 펼쳐져 맞이한다. 그러나 보행(步行)하는 이는 창도(昌道)에서 통구(通口)를 거쳐서 단발령(斷髮嶺)을 넘으면 길이 빨라지는데, 이 단발령(斷髮嶺)은 속세(俗世)에 살던 사람이 금강산(金剛山)을 구경하러 길을 떠나서, 이 고개에 올라서면, 금강산(金剛山)의 영기(靈氣)에 끌려서 머리를 깎고 세상을 떠나 출가(出家)할 생각이 든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지만, 하여튼 보행(步行)이면 이 단발령(斷髮嶺)에 올라 금강(金剛)의 웅자(雄姿)에 접(接)할 때, 미(美)의 극치인 묘경(妙境)에 들게 된다. 원산(元山)에서 온정리(溫井里)를 거쳐서 온정령(溫井嶺)을 가는 길과, 단발령(斷髮嶺)을 넘거나 묵파령(墨坡嶺)을 넘어서 장안사(長安寺)로 가는 모든 길은 말휘리(末輝里)라는 곳에서 합쳐진다. 이 말휘리(末輝里)를 지나서 고개를 넘으면 동금강천(東金剛川)을 끼고 숨차게 달리면 차창 넘어로 보이는 청류(淸流)에 눈을 씻고, 시선을 우측으로 돌리면 천봉만옥(千峰萬獄)이 구름 사이에 늘어서 있는 것이 멀리 보이니, 이것이 금강산(金剛山)의 먼 용자(容姿)이다. 발 아래로 굽이치는 금강천(金剛川)은 금강산(金剛山) 북부의 여러 골짜기에 흐르는 물이 몰려 나오는 것인데, 만폭동(萬瀑洞) 물을 합쳐서 鳴淵川·松坪川·新淵川으로 되어 春川에서 소양강(昭陽江)과 합해서 한강(漢江)의 상류(上流)가 되는 것이다.
 
멀리 만폭동(萬瀑洞)에서 흘러 나오는 동금강천(東金剛川)을 끼고 소나무 숲속으로 들어가면서 보니, 고아(古雅)한 작은 사정(祠亭)이 보인다. 이것은 이태조(李太祖)가 왜구(倭寇)를 토평(討平)하고 돌아가는 길에 활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잠시 쉬면서 전로(戰勞)를 푸신 곳이라는 괘궁정(掛弓亭)이다.
 
여기서 조금 가서 탑(塔)거리라는 거탑리(巨塔里)에 이르면, 여기서부터는 금강(金剛)의 분위기에 싸이게 된다. 금강(金剛)의 연봉(連峰)이 수려(秀麗)하게 나타나고, 멀리 관음봉(觀音峰)의 영자(靈姿)가 뚜렷이 보이고 바위에 부딪치는 물소리가 자못 그윽히 들리기 시작한다. 이곳은 옛날 장연사(長淵寺)라는 거찰(巨刹)이 있던 옛 유적지(遺蹟地)로써 오른쪽 작은 언덕에 정교하게 조각한 석탑(石塔)이 겨우 하나가 남아서 당년(當年)의 성세(盛勢)를 말할 뿐이다. 이 탑(塔)은 15척(尺) 남짓한 대리석(大理石) 고탑(古塔)인데, 자못 외로운 그림자를 던지고 서 있으나, 4면(面)을 둘러보면 정교무비(精巧無比)한 조각이 금강산(金剛山) 중에 있는 많은 석각(石刻)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다. 탑은 3층(層)으로, 상단(上壇)의 4면(面)에는 각각(各各) 좌우에 호법신상(護法神像)이 새겨져 있는데, 수법이 우수하고 장중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니,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石彫)의 풍운(風韻)을 짐작하게 한다.
 
거탑리(巨塔里)의 시냇물을 뒤로 두고 향선교(向仙橋)를 건너면 길가에 서 있는 늙은 소나무가 창울(蒼鬱)하여 마치 높은 솔문을 이룬 것 같다. 그윽하고 유취(幽翠)한 맛은 이를 데 없다. 솔가지 사이로 앞길을 내다보니 혹은 푸른빛 창공(蒼空)이 솔인지 솔이 창공(蒼空)인지 의심하게 된다. 좀더 앞으로 나가면, 좌측(左側)으로 보이는 계반(溪畔)에 장안사(長安寺)호텔이 있다.
 
 
▶ 금강산 장안사의 전경
 
 
장안사(長安寺)로 들어가는 남천교(南川橋)가 보인다. 창취(蒼翠)가 녹아 흐르는 노송(老松) 숲에 서서히 만보(漫步)를 옮겨 솔 냄새를 담아다 주는 시원하고 싱그러운 바람을 가슴에 가득 들이마시면, 그야말로 일도산문만사휴(一到山門萬事休)란 시구(詩句) 그대로의 감회이다.
 
바람도 향그럽고 물소리도 정적을 더한다. 여기서 좀더 가노라면 산문에 이르게 된다. 들어가보면 운성문(雲性門), 나오다보면 유일문(唯一門)이라고 하였다. 이 문을 지나면 장안사(長安寺) 앞 계류(溪流)로 나온다. 자연석(自然石)으로 된 만천교(萬川橋)라는 다리가 걸려있는데 이 다리는 아담하기 짝이 없으니, 교상(橋上)에 저립(佇立)하면 스스로 장엄한 우주 속에 자기가 서 있는 것을 깨달아 숙연해진다.
 
나무숲 사이에 은복(隱伏)한 금강화각(金剛畵閣)을 다정스레 껴안은 수려한 산용(山容)과 청류(淸流), 만천교(萬川橋)를 건너, 만수정(萬水亭)을 지나면 금강산장안사(金剛山長安寺)라고 크게 쓴 현액(懸額)이 있고, 액(額)의 양측(兩側)에 임제종제일가람(臨濟宗第一伽藍)이라는 편액(扁額)을 걸어놓은 누문(樓門)이 보이고, 이 문 밑으로 들어가서 돌아보면 헌(軒)밑에 범왕루(梵王樓)라는 편액(扁額)이 보인다. 누방(樓傍)에 범종문(梵鍾門), 오른쪽으로는 대향각(大香閣), 왼쪽으로는 극락전(極樂殿), 막 다른 것이 장안사(長安寺) 본전(本殿)인 대웅전(大雄殿)이다. 현재는 6전(殿)7각(閣)1문(門)으로, 장경(長慶) · 안양(安養) · 지장(地藏) · 영원(靈源) 등 수사(數寺)를 가지고 있어 금강산(金剛山) 중에 있는 4대찰(大刹)의 하나이다.
 
장안사(長安寺)는 신라(新羅) 법흥왕대(法興王代)에 창건한 古利이다. 그러나 장안사(長安寺)가 가장 흥륭(興隆)한 것은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때이다. 당시 고려(高麗)의 여자로써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황후(皇后)가 된 기씨(奇氏)는 황제(皇帝)와 태자(太子)를 위해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금강산(金剛山)의 이 장안사(長安寺)에, 여러 해를 두고 많은 내탕(內帑)과 많은 공인(工人)을 보내서 전당(殿堂)과 상전(像殿)을 만들게 하니, 그 정교(精巧)함이 역내(域內)에 관절(冠絶)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재난(災難)은 금강산(金剛山)에 까지 미쳤으니, 이러한 명건축(名建築), 대옥우(大屋宇)를 재로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에 있는 6동(棟)의 전당(殿堂)과 일곱의 전각(殿閣), 네 루(樓)와 한 문(門)은 그 뒤에 오랜 세월을 거쳐서 중흥(重興)한 것이요, 그나마 여러번 헐고 고치고 해서 이룩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우리 손으로 만지고 아끼고 받들지 못하니 적마(赤魔)의 손에 할퀴어진 자죽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이다.
 
기황후(奇皇后)가 중창(重創)했을 당시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비롯하여 53위(位)의 부처님과 1만,5000불(佛) 등 어마어마하게 많은 불상(佛像)이 안치(安置)되었으나, 그동안에 이럭저럭 없어지고, 바뀌어져서, 어느 것이 그때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대법당(大法堂)의 왼쪽에 있는 지성지전(至聖之殿)에 봉안(奉安)한 여러 나한상(羅漢像)은 크기도 하려니와, 수법(手法)이 범속(凡俗)을 떠나서 자재(自在)한 변화와 융통무초(融通無礎)한 신의(神意)가 자못 경탄할 만하니, 필시의 뛰어난 명공(名工)의 신앙과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이리라.
 
장경봉(長慶峰) · 관음봉(觀音峰) · 지장봉(地藏峰) 등 여러 봉우리가 죽순(竹筍)처럼 앞에 빼어나고, 그 봉우리마다 같은 이름의 암자(庵子)가 있으니, 먼저 장경봉(長慶峰) 밑에 있는 장경암(長慶庵)을 찾자. 이 암자(庵子)는 신라(新羅) 때에 창건한 것인데 많은 청정범행자(淸淨梵行者)들이 여기에서 수도(修道)한 곳 이다. 장경(長慶)이라고 하는 이름은 북방천왕(北方天王)의 제자(弟子)로서 천왕(天王)을 수호한다는 인도의 신화(神話)에 의거한 것이다.
 
다시 발길을 장안사(長安寺) 동북쪽으로 돌려 안양암(安養庵)을 찾는다. 장안사(長安寺)에서 약 8정(丁)쯤 되는 백천동(百川洞) 왼쪽에 절벽(絶壁)을 깎아 세운 천주봉(天柱峰) 밑에 있다. 고려(高麗) 성종(成宗) 때에 회도선사(懷道禪師)가 창건한 것으로, 여기에서 회도화상(懷道和尙)이 수도(修道)한 곳이라고 한다. 경내(境內)는 자못 유수하고, 백천동(百川洞) 오른쪽에 보이는 봉우리를 멀리 등진 것은, 마치 한 폭 의 풍경화를 펼친 듯하다. 암내(庵內)에는 미륵불(彌勒佛)의 석각(石刻)과 나한상(羅漢像)이 안치(安置)되어 있다.
 
장안사(長安寺)를 뒤로 두고 백천(百川)의 급한 청류(淸流)를 건넌다. 장안사(長安寺) 앞으로 흘러가는 이 물을 백천(百川)이라고 하는 것은, 속설(俗說)에 의하면 내금강(內金剛)의 모든 물이 모여서 흐른다는 뜻이다. 황천(黃泉)의 유곡(幽谷)으로 들어 가서 숲속으로 뚫린 좁은 석경(石逕)을 오르기 수(數)정(丁), 좌측(左側)으로 황천강류(黃泉江流)를 끼고 서있는 고성축지(古城築趾)가 보인다. 고목과 칡넝쿨, 등넝쿨이 얽혀진 오랜 석성(石城)이 동구(洞口)를 가로막았는데 지금은 무너져 있으나 드나드는 길에 옛 문의 자취가 남아 있다. 이것이 태자성(太子城)이라고 일컫는 옛 성이다. 신라(新羅)가 망하자, 경순왕(敬順王)의 태자(太子)가 유한(遺恨)을 품고 금강산(金剛山)으로 가서 외문(外問)과의 통섭(通涉)을 끊기 위해 쌓은 것이라고 한다. 이 성(城)터를 지나서 반두봉(半頭峰)의 협곡(峽谷)을 바라보면 문득 업경대(業鏡臺)의 덜미가 보인다. 업경대(業鏡臺)는 명경대(明境臺)라고도 하니, 그 중턱 쯤에 대문만한 큰 구멍이 뚫린 것이 있다. 이것이 황사굴(黃蛇窟)이요, 그 옆의 좀 작은 구멍은 흑사굴(黑蛇窟)이라고 하는 것이다. 황사굴(黃蛇窟)은 극락(極樂)으로 가는 통문(通門)이요, 흑사굴(黑蛇窟)은 지옥(地獄)으로 가는 통구(通口)이다. 그래서 이 문을 지옥문(地獄門)이라고도 하니, 죄인(罪人)을 잡아들여서 명경대(明境臺) 앞에서 염라대왕이 죄의 유무(有無)를 따져, 심사를 받으면, 그가 지은 죄의 유무(有無)를 따라서 이 두 구멍으로 민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경대(明境臺)에 비치는 죄상으로 염라대왕이 안다는 것이다. 북한의 모든 반역자들의 심판날에는 이 흑사굴(黑蛇窟)의 문이 메어질 것을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명경대(明境臺) 일대가 명부(冥府)와 흡사하고, 황천담(黃泉潭)이니, 명부담(冥府潭)이니 하는 이름부터가 몸을 오싹하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옆에 서 있는 봉우리가 우두봉(牛頭峰) · 죄인봉(罪人峰) · 사자봉(使者峰) · 판관봉(判官峰)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김일성도당(金日成徒黨)들이 염마왕청(閻魔王廳)에 있는 명경(明鏡)에 비치어 이 굴문(窟門)을 끌려가는 날에 다시 그 광경을 구경 오기를 결심하면서 명경대(明境臺)를 떠난다. 영원암(靈源庵)으로 가는 길이다.
 
큰 바위가 천막처럼 덮쳐 누르는 석문(石門)을 지나오면 황사굴(黃蛇窟)과 흑사굴(黑蛇窟)을 왼쪽에 두고, 이리저리 멋대로 흰돌이 굴러 있는 계곡을 오르게 된다. 늙은 단풍나무와 노송(老松)이 울창한 사이로 좁은 들길을 따라 한 시간쯤 가면 지장봉(地藏峰) 북록(北麓)에 영원암(靈源庵) 옛 절에 도달한다. 이 암자(庵子)는 신라(新羅)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창건한 수선도장(修禪道場)이요, 후생선사(後生禪師)가 그 뒤를 이어 수도(修道)한 곳이니, 금강산(金剛山) 중에서 가장 맑고 고요한 영장(靈場)으로 이름난 곳이다. 아늑한 당우(堂宇)의 정취는 그야말로 티끌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있다. 영원암(靈源庵)에서 오른쪽으로 뻗은 등성이에 수(數)10인(人) 되는 우뚝한 석대(石臺)가 있어 여기서 영원동(靈源洞)의 전경(全景)을 모조리 보고, 아울러 지장(地藏) · 관음(觀音) · 우두(牛頭) · 석가(釋迦) 등 여러 연봉(連峰)과 죄인(罪人) · 사자(使者) · 시왕(十王) · 판관봉(判官峰) 등 봉우리가 마치 용이 금시에라도 꿈틀거리며 하늘로 올라갈 차비를 하는 것 같으니, 여기가 옥초대(沃焦臺)라는 곳이다. 이르기를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자심참구(自心參究)한곳이라 하며, 앞에 놓인 반듯한 돌은 그가 경(經)을 놓고 보던 바위라고 한다.
 
영원암(靈源庵)을 뒤로 황천강(黃泉江)으로 돌아서 약10정(丁)쯤하여 망군대(望軍臺)로 향하는 기로(岐路)에 이른다. 여기서 미구(未久)에 한 청계(淸溪)를 건너, 그 계류(溪流)를 끼고 험난(險難)한 뉴경(紐徑)을 밟고 올라가노라면 홀연(然)히 일대기관(一大奇觀)에 접(接)하여 안계(眼界)가 활연(豁然)히 트이면서 한 비폭(飛瀑)이 하늘을 나른다. 이것이 유명한 수렴동(水簾洞)의 수렴폭(水簾爆)이다. 망군대(望軍臺), 백탑동(百塔洞)의 여러 물이 모여서 이 폭포(瀑布) 위에서 쏟기니, 10여척(尺)의 반석(盤石)에 거꾸로 떨어지며 이리저리 퍼져 깔리니, 마치 주렴(珠廉)을 늘려 푸른 절벽을 바라보는 듯하다. 그래서 수렴폭(水簾爆)이라고 하고 이 동네를 수렴동(水簾洞)이라고 한 것이다. 쉴 사이도 없이 이 수렴동(水簾洞)으로 부터 반리(半里)쯤 가면 현석(玄石)이 쌓여 마치 사람이 탑을 쌓은 듯한 백탑동(百塔洞)이 보인다.
 
어떤 것은 우산을 쓴 듯하고, 어떤 것은 5층(層) 또는 30층(層)으로도 된 탑 모양의 괴석기암(怪石奇岩)이 계곡(溪谷) 사이에 가득하다. 이러한 조탑장(造塔場)으로부터 다시 도솔암(兜率庵)의 왼편으로 우거진 숲속을 헤쳐 오르기 수정(町), 갑자기 수10장(丈)의 암벽(岩壁)이 앞을 막고, 그 정상(頂上)으로부터 철광(鐵鑛)이 걸려있는 것이 망군대(望軍臺)이다. 여기서부터 내금강(內金剛)의 군봉(群峰)과 만학(萬壑)이 발 아래에 전개되는 것이다. 비로봉(毘盧峰)이 연맥(連脈)을 이어 월출(月出), 일출(日出), 차일(遮日), 백마(白馬)의 제봉(諸峰)은 마치 계관(鷄冠)과 같아, 창공(蒼空)에 닿았으니, 부지부각(不知不覺)에 쾌재(快哉)를 부르게 할 뿐이다.
 
여기서 내려와 명연담(鳴淵潭)을 배재령(拜再嶺) 밑으로 나가게 된다. 여기는 탑동(塔洞)으로부터 표훈사(表訓寺)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즉위(即位) 원년(元年)에, 이 금강산(金剛山)에 오니 먼저 단발령상(斷髮嶺上)에서 1만2,000의 영봉(靈峰)들을 바라본 즉 봉상(峰上)에 불보살(佛菩薩)이 나타나 왕의보관(王衣寶冠)으로 장엄(壯嚴)하고 금색광명(金色光明)이 허공(虛空)에 가득한 것을 친관(親觀)하시고 무한히 기뻐하셨다는 곳이 여기이다. 그래서 이 령(嶺)을 배재령(拜再嶺)이라고 부른다
 
배재령(拜再嶺)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걸으면 영선교(迎仙橋) 턱에 닿는다. 다리를 반쯤 건너 눈을 돌러보면 망군대(望軍臺) 꼭대기가 운무(雲霧)에 떠있는데, 이윽고 향로봉(香爐峰)의 청아(淸雅)한 모습이 나타난다. 다리를 건너 거암(巨岩)에 조각(彫刻)한 장여(丈餘)의 삼암불(三岩佛)이 있다. 나옹조사(懶翁祖師)의 서원(誓願)으로 자신(自身)이 조각(彫刻)한 것이라고 하는 바, 우(右)는 미륵존불(彌勒尊佛), 중앙(中央)은 석가불(釋迦佛), 좌(左)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시다. 그리고 삼불암(三佛岩) 외(外)에 좌우에 두 부처님이 있으니, 이것도 나옹조사(懶翁祖師)이 조각(彫刻)한 것으로 우(右)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다. 여기서부터 더 들어가면 백화암(白華庵)이라는 고암(古庵)이 있다. 근년(近年)에 화재(火災)로 소실(燒失)됐으나 300여년전(餘年前)에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창립(創立)한 것이다. 암중(庵中)에 나옹(懶翁) · 청허(淸虛) · 유정(惟政) 등 여러 명승(名僧)의 화상(畫像)이 안치(安置)되어 있었으나 없어지고, 현재에는 수(數)기(基)의 사리탑(舍利塔)만이 남아 있다. 이 사리탑(舍利塔)은 나옹(懶翁) · 청허(淸虛) · 유정(惟政)의 사리탑이나 구조가 정교함이 비할 데 없는 일품이다. 이 백화암지(白華庵趾)로부터 2정(町) 쯤 떨어져서 사영교(舍影橋)를 건너면 표훈사(表訓寺) 경내(境內)에 들어가니 표훈사(表訓寺)는 금강산(金剛山) 4대찰(大刹)의 하나로 장안사(長安寺) 다음 가는 대찰(大刹)이다.
 
 
- 북한 1977년 8월호(통권 제68호)
금강산(金剛山) 장안사(長安寺) 절(寺) 정태혁(鄭泰爀) 회양군(淮陽郡)
【문화】4. 금강산 장안사를 찾아서
(게재일: 2024.06.14. (최종: 2024.06.14. 18:47))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기본항목(E)
내서재 추천 : 0
▣ 카달로그 작업
관련 의견 모두 보기
자유 의견
지식지도
원문/전문
시민 참여 콘텐츠
▷ 관련 동영상 (없음)
▣ 참조정보
백과 참조
우리나라의 사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