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5 ~ 1612]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에 활약하였던 의병장. 본관은 영일이고 자는 화숙이며, 호는 호수이고 시호는 강의이다.
사성 종소의 현손(손자의 손자)이며 윤량의 아들로 출생하였고, 영천에서 대대로 살았다. 1558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비 가문으로서, 향촌의 자제들을 모아 대오를 편성하고 군사를 모집하는 글을 붙여 900여 명에 이르는 의병을 모아 대장 이 되었다.
당시에는
곽재우가 의령에서
권응수가 신령 에서 의병을 일으켜 서로 격려하였는데, 정세아는 8월에 영천의 박연에서 왜적을 맞아 영천의 의병장 정대임·정천뢰· 조성·신해 등과 더불어 권응수의 지휘로 싸움을 벌였고, 이 곳에서 크게 이겨서 영천성을 다시 찾았다.
이어서 이들은 경주에서 왜적과 싸워 그들을 물리치고 낙동강의 왼쪽을 지켰다. 그 뒤 이듬해에 평양을 되찾고 이어서 서울도 다시 찾게 되자, 그가 이끌던 의병들을 조희익에게 맡기고 자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체찰사
이원익이 그를 추천하여 여러 번 관직에 기용되었으나, 그는 극구 사양하였다. 나중에는 황산도 찰방으로 잠시 재직하기도 하였으나, 이내 그만두고 장현광·조호익· 이준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가 죽은 뒤에 병조 판서의 벼슬이 내려졌고, 영천의 환고사에 위패가 모셔졌다.
정세아의 실기와 시문집으로 《호수실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