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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정지화(鄭知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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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화 (鄭知和)
1613~1688 조선 후기의 문신.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비교
정지화 (鄭知和) 1613
▣ 백과사전
1613~168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예경이고, 호는 남곡이다. 1633년 진사와 생원을 뽑는 시험인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37년 제릉 참봉이 되었다. 같은 해 정시 문과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그는 홍문관에 있으면서 유교 경전과 역사 책을 관리하고 여러 문서를 처리하였다. 1639년 사간원 정언이 되었는데, 정언으로서 왕의 잘못이 있으면 지적하고, 다른 사람들이 왕에게 올리는 상소를 맡아 보았다. 이어서 세자 시강원 사서가 되어 청나라의 심양으로 가는 세자를 모셨다. 1640년 귀국하여서는 홍문과 수찬·교리·이조 정랑과 의정부와 사헌부의 벼슬을 지냈다. 그러다가 1649년 초 원주 지방의 목사로 나갔으나, 효종이 왕이 되면서 다시 조정으로 들어왔다. 다음 해 왕의 명을 받고 진주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조선에서 바치는 공물을 삭감하는 데 성공하고 돌아왔다. 그 뒤 병조 참의가 되어 당상관에 올랐고, 이어 승지· 대사간이 되어 왕이 내리는 명령을 받아 6조에 내려 나라의 행정이 이루어지게 하였다. 전라도· 함경도· 평안도의 관찰사로 나가 주민들을 잘 다스리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1664년에는 형조 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1666년과 1667년 두 차례 동지사로 청나라 연경을 방문하였고, 다녀와서는 예조 판서가 되었다. 1673년 예조 판서로 있을 때 영릉 을 보살피는 일을 소홀히 하였다고 하여 벼슬을 빼앗겼다. 약 1년 동안 시골에서 지내다가 현종이 죽기 몇 달 전인 1674년에 좌의정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나, 몸에 병이 생겼다고 하여 중추부 판사로 물러났다. 그가 벼슬을 내놓은 것은 제2차 예송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제2차 예송은 현종 때 효종의 왕비인 인선 대비가 죽자, 효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의 상복 문제를 놓고 일어난 논쟁이다. 즉, 조대비가 상복 을 몇 년 동안 입고 있어야 하는지를 놓고 당시 조정의 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과 남인 사이에 논쟁이 일었다. 서인은 8개월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만 1년을 주장하였다. 결국, 남인이 주장한 대로 만 1년설이 채택되어 조정의 세력권은 남인에게 넘어갔고, 송시열을 비롯하여 서인들은 모두 화를 입게 되었다. 정지화는 서인이었지만 항상 중간 입장을 취해 왔는데, 이 때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어서 남인들로부터 화를 면하였고, 많은 서인들을 구해 내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1680년 다시 좌의정이 되어 한동안 조정의 정치를 맡아 보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중추부의 판사나 영사로 있으면서 한가히 보내다가 76세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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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