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7 ~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기천이고, 호는 사어이다.
1757년 정시 문과 시험에 을과로 합격하였다. 1762년 사헌부의 지평이 되어 6조의 관리들을 살피고 풍속 을 바르게 잡는 일에 힘썼다. 다음 해 충청도 지방의 감운 어사로 나가 양곡 운반의 실태를 살폈다. 그 뒤 사간원 의 정언이 되어 왕이 잘못한 일을 바로잡아 주고, 다른 사람들의 상소를 왕에게 올리는 일을 하였다. 홍문관의 부교리로 있으면서는 궁중의 유교 경전과 역사 책을 관리하여 문서를 처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였다. 부교리로 있을 때 거짓으로 남을 속였다 하여 벼슬이 깎였으나, 혐의가 없어서 원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2년 뒤에 수찬이 되었고, 1772년에는 사간원의 최고 벼슬인 대사간에 올랐다.
정조 가 왕위에 오르자 왕의 비서인 승지가 되었다. 그는 승지 로서 중국 사절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가는 도중 열하에서 은 1,000냥을 잃어버린 사건으로 사절단 일행과 함께 벼슬에서 쫓겨났으나 곧 다시 등용되어, 1777년에는 사헌부의 대사헌이 되었다.
대사헌은 사헌부의 최고 벼슬로, 그는 이 자리에 있을 때 정조에게 여러 가지 사안을 상소로 올렸다. 그 내용은 인재를 쓸 때는 당파에 구애 받지 말고 고르게 써서 조정을 항상 청신하게 할 것, 나라의 살림을 잘 관리하여 재정을 절약할 것, 미풍 양속을 바로잡아 나라의 기강을 바르게 세울 것,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왕에게 언제든지 호소할 수 있도록 언로(言路)를 열어 놓을 것, 현재 벼슬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대우를 개선할 것, 장차 나라일을 책임질 인재들을 양성할 것 등이다.
그 뒤 함경 감사가 되어 재해를 입은 지역의 경작지를 마음대로 나누어 준 사건 때문에 일시 자리에서 밀려났다가 다시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선조인 정렴·정작 등이 남긴 글을 모아 펴내어 그들의 행적과 도가적 분위기를 전하였다.
1790년 선혜청의 제조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경작지 측량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실시되기도 하였다. 그 뒤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잠시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판중추 부사에 올랐다.
그는 조정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정치가로서 이름을 알렸으나, 학자·문장가로서도 널리 인정받았다. 1782년에 《
송도지》와 《
송도잡기》의 내용을 더 보충하여 두 책을 합하여 펴냈고, 1784년에는 정조의 명을 받아 1784년 《
동문휘고》를 엮었으며, 1785년에는 《
십구사략통고》를 편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