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불교 18개 종단 가운데 최대 종파.
우리 나라 불교의 최대 종파로는
선종과
교종을 들 수 있다. 불교의 교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으로 바른 도를 얻고 중생을 구하려 하는 교종에 비하여, 선종은 어려운 불경에 의하지 않고 이심전심의 참선 수행을 중요하게 여기는 불교 종파이다.
선종의 하나인 조계종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떨쳐 깨달음을 얻는 동시에 남도 깨닫게 하는 석가모니의 깨달음(自覺覺他)을 근본 교리로 받든다. 그리고 교종 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교리를 생각하거나 계행을 닦지 않고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을 지도하여 불심을 얻게 하여 중생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며, 따르는 경전은 《금강경》과 석가모니 이래의 법맥과 법어가 수록되어 있는 《전등록》 등이다. 기타 경전을 연구하거나 염불 또는 주문 등도 제한하지 않고 있다.
고려 시대에 퍼져 있던 불교계의 11 종파 가운데 하나였으며, 조선 시대의 7 종파 가운데 하나였던 조계종은 근대 불교계 유일의 종파로 재발족한 종단이다.
조계종의 성립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중국 선종의 조계
혜능 선사 계통의 선(禪) 사상이 우리 나라에 전하여지기 시작한 것은 신라 말부터였다.
'조계'는 중국 선종의 제6조인 혜능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조계종은 이 혜능을 법조로 하고, 그의 선 사상 을 따르는 종파이다. 혜능의 선 사상이 전하여진 신라 말 이후에서 고려 초까지 각 산문에 9개의 선파가 이루어졌다. 이를 구산 선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종파를 이루지는 않았다. 이들 9개 선파가 하나로 묶여 조계종 이라 이름하였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부터 조계종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다르다. 어떤 이들은 지눌이 조계산에 있는 지금의 송광사인 길상사터에 수선사를 세워 선풍을 크게 펼친 때로부터 조계종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하여 내려오는 사료에 의하면, 조계종이라는 분명한 명칭을 찾아볼 수 있는 첫 사례는 고려 명종 때인 1172년에 세워진 왕사 탄연의 비문에서이다. 그런데 이 탄연의 비는 지눌이 15세 때 세워진 것이다. 이로써 지눌 이전부터 조계종이란 명칭이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탄연비 외에 1185년 예천에 세워진 용문사 중수비 등 몇 가지 사료는 지눌의 수선사 이전에 이미 조계종의 명칭이 사용되어 왔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이들 사료는 모두 대각 국사 의천이 1097년에 국청사를 세우고 천태종을 펴기 시작한 이후의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들에서 9개파로 나뉘어 선 사상을 닦고 있던 구산 선문들은, 의천에 의하여 천태종이라는 강력한 종파 가 나타나자, 조계종이라는 보다 확실한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한 종파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 뒤 조계종 은 화엄종· 법상종· 천태종과 함께 고려의 불교계를 이끄는 4대 종단의 하나가 되었다. 이 때에는 국가에서 조계종 의 승려들을 대상으로 한 승과를 별도로 시행할 정도였다. 그리고 13세기 초에는 지눌이 조계산에 수선사를 열어 선풍을 진작시킴으로써 조계종의 세력은 크게 성장하였다. 14세기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보우가 국왕으로부터 승정권을 위임받아 불교계를 이끌면서 사실상 조계종이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로 바뀌면서 유교를 국가 의 통치 이념으로 선택한 조선의 억불 정책으로 불교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 왕조에 들어 태종 이후 배불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래서 1406년에는 조계종 의 승려 성민이 조정의 억불 정책에 반발하여 수백 명의 승려들과 함께 신문고를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해 3월 조선 조정에서는 전국적으로 70여 개의 절만을 남겨 두고 절에 따른 토지와 노비 등의 범위를 정하여 대부분의 절과 토지 등을 몰수하여 버렸다. 그리고 총지종과 조계종을 합하여 조계종이라 하는 합종 정책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1424년에는 모든 불교 종파를 폐합하여 선종 과 교종만이 남게 되었다. 이 때 조계종은 천태종·총남종과 함께 선종으로 합쳐졌다. 그 결과 고려 시대를 통하여 불교계를 이끌어 온 조계종은 선종이라는 범위 안에 묻혀 그 명칭마저 잃어버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어지는 성종의 억불 정책 과 연산군· 중종의 폐불 정책이 이어지며, 위축된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이라는 두 종파마저 그 존재가 위태롭게 되었다. 사실상 종단은 해체되었으며, 승려들은 산 속으로 몸을 숨겨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한 중에도 미약하나마 법맥을 이어온 것은 조계종이었다. 불교 탄압에 의한 조선 중기의 불교 암흑기에서 산중에서나마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이들은 휴정과 그의 제자 유정이다. 휴정과 유정은 ' 조계 종유(曹溪宗遺)'라 하여 스스로의 계통이 선 중심의 조계종임을 확실하게 하였다.
1895년에는 조선 초 억불 정책에 의하여 내세워졌던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었다. 그리고 1899년에는 동대문 밖에 원흉사를 세워 한국 불교 총종무원의 일을 볼 수 있게 하였다. 1902년에는 국가 에서 관리서를 세워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1908년 전국 승려자 대표자들이 한국 불교 종단의 명칭을 원종이라 하였다. 1910년 서울 수송동에 각황사를 세워 조선 불교 중앙 회무소 겸 중앙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1911년 1월 영·호남의 승려들이 원종에 반대하고 임제종을 창설하였다. 원종이 일본 불교인 조동종과 연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1911년 6월 조선 총독부에서 사찰령을 발포하였다. 이에 의한 사찰령 시행 규칙에 따라 원종과 임제종은 소멸되었다. 1915년 초 전국 불교 30본산이 중심이 되어 30본산 연합 사무소가 각황사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 연합 사무소는 30본산의 연합 사무만을 보았을 뿐 전국 사찰을 관할하고 모든 승려들을 통제하는 기능 및 권한은 가지지 못하였다.
조선 시대의 억불 정책 이후 이러한 긴 시일을 거친 우리 나라 불교는 1920년대에 들어서 현재와 같은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1922년 1월에는 조선 불교 선교 양종 중앙 총무원이 각황사에 설치되었고, 이에 가담하지 않은 본사들에 의하여 5월 조선 불교 선교 양종 중앙 교무원이 각황사에 세워졌다. 이들 종무 기관은 서로 의견을 모아 1925년 재단 법인 조선 불교 중앙 교무원이라는 통일된 종무 기관 을 이루었다.
1941년 북한산에 지금의 조계사로 바뀐 태고사를 세우고, 이를 총본산으로 하여 ' 조선 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법'으로 인가를 받았다. 조선 초의 불교 억압 정책 에 이은 조선 중기의 폐불 시기를 겪은 때로부터 긴 세월이 지난 뒤, 이렇게 하여 조계종은 제 명칭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이로부터 조계종은 우리 나라 불교의 가장 유력한 종단으로서 31본산을 비롯한 전국 사찰을 관할하며, 모든 승려들을 통제하게 되었다.
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대한 불교 조계종'으로 그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 이후 비구승과 대처승의 갈등과 분규가 깊어져 갔다.
1962년 불교계 고승들의 노력으로 조계종을 재건하기 위한 비상 종회를 열고, 종헌을 만들어 통합 종단을 출범시켰다. 그리고는 ' 불교 재산 관리법'에 의하여 대한 불교 조계종으로 단체 등록을 하였다.
그러나 출가하여 도를 닦는 비구승과 재가승인 대처승의 수행에는 차별성이 있어 다시 분규가 일어나 소송으로까지 번졌다. 1969년 대법원에 의하여 조계종의 종권은 비구승에 있다는 판결이 나왔으며, 1970년 대처승들은 한국 불교 태고종이라는 종단으로 분리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 불교 조계종은 비구승의 종단으로 독립되었다.
현재 조계종의 체제는 종단을 대표하는 종정 아래, 감찰원·총무원·원로 회의·중앙 종회를 중앙 조직으로 하고, 전국에 25개 교구 본사를 두고 있다. 조계종은 종정이 상징적으로 종단을 대표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총무원장이 중심이 되는 체제로 되어 있다.
1989년 현재 조계종의 교세는 전국에 사찰이 1,694개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승려의 수는 1만 3,387명, 신도의 수도 912만 5,991명에 이르고 있다.
종단에 소속된 교육 기관으로는 동국 대학교를 비롯하여 대학교 2개교, 중· 고등 학교 18개교가 있다. 사회 사업 기관 으로는 고아원 2개소, 유아원 4개소, 유치원 16개소, 양로원 1개소가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