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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최무선(崔茂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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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崔茂宣)
[? ~ 1395] 고려 말기의 장군, 발명가. 일찍부터 화약 연구에 몰두하던 중 화약 기술자인 원나라의 이원(李元)에게서 그 제조법을 배웠다. 1377년에 정부에 화통 도감을 설치하도록 건의하고, 화약을 만들면서 대장군·이장군·석포·화포· 신포· 화통· 화전 등의 각종 무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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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포(鎭浦)서 화포 맞은 왜구 우왕좌왕
우왕6년 (1380년) 8월에 경상도 원수 우인열은 고려 조정에 급히 아뢰기를 ‘나졸의 말에 따르면 왜구들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고 밀려오는데 돛대가 잇달았다 하오니 조저원수를 급히 보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조선 태조(太祖) 최무선(崔茂宣) 황산 대첩(荒山大捷)
이성계 황산대첩 진군로 (1)
진포(鎭浦)서 화포 맞은 왜구 우왕좌왕
 
용담현령(龍潭縣令) 피원량(皮元亮) 등 목책 세워 방어
급할수록 쉬어간 지명 ‘새벼리’ 남아
 
 
용담(龍潭) 진안(鎭安)
 
우왕6년 (1380년) 8월에 경상도 원수 우인열은 고려 조정에 급히 아뢰기를 ‘나졸의 말에 따르면 왜구들이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고 밀려오는데 돛대가 잇달았다 하오니 조저원수를 급히 보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당시 수도행정의 책임자인 라세와 심덕부, 그리고 화통도감의 화약주임인 최무선을 급파하여 전함 1백 척으로 왜구를 쫒아 잡았고 여기에서 쫒긴 왜구들은 다시 해안을 돌아 진포(지금의 금강하구)를 타고 상륙하여 노략질과 방화 살인을 마음대로 자행하였다.
 
 
진포에서의 화약 맛
 
때에 최무선이 진포에 이르러 사상 최초로 화포를 써서 왜구의 배를 불태우니 여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쳐 왜구들이 거의 다 타 죽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으며 온통 바다는 피로 물결을 이루었다. 이처럼 화포를 맞고 기겁하여 죽음에서 겨우 벗어난 왜구들은 옥주로 달아나서 육지에 있는 왜구와 합세하여 이산, 영동을 불태운 뒤 황간 어모를 분탕질 하고 중모,화령,공성,청리 등을 침범하고 드디어 상주마저도 불사르고 선주까지도 분탕질을 하였다. 당초에 왜구들이 상주에 있을 때에 전라도 원수 지용기 휘하의 배검이 적진으로 가서 적정을 정탐해 올 것을 자청하므로 여러 원수들이 이를 허락한 바 있었다. 그래서 배검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을 찾았는데 왜구들은 이를 죽이려 들었다. 때에 배검이 말하기를
 
“천하에 사자를 죽이는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의 여러 장수는 각각 정병을 수없이 많이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나 너희 무리를 다 죽인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너희들이 한 고을을 택하여 차지하고 살면 어떻겠는가?”
 
라고 물었다. 이런 말을 들은 왜구들은
 
“이것은 우리를 속이는 말이다. 너희 나라에서 참으로 우리를 살려 주려면 왜 우리 배를 빼앗았는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하고 배검에게 술을 주고 철기로 호위하여 보내었다. 째는 왜구들의 만행은 극도에 이르렀다. 두 서 너 살 된 계집아이를 잡아서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깨끗이 씻어 쌀과 술을 차려 놓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반드시 풍악을 올렸으며 제사를 마치자 그 쌀을 쥐어 먹고 술을 마신 뒤 그 아이를 불태워 점을 쳤다. 그러자 홀연히 창자루가 꺾어졌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반드시 패하고야 말 것이다”
 
하며 곧 군사를 끌고 상주로 달아났다. 진포에서 화약 맛을 단단히 본 왜구들의 우왕좌왕하는 꼴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허약한 고려 조정은 바람 앞의 등불 바로 그것이었다.
 
 
용담현령의 선방
 
애당초 쌀 도둑질에 목적을 둔 왜구들이었기 때문에 대마도를 출발하여 곡창 호남일대를 노략질하기 위해 진포(금강)에 배를 정박 시켰던 것인데 뜻밖에도 화포공세를 맞게 되자 그들은 일단 허겁지겁 흩어져 우왕좌왕 떠돌며 내륙 깊숙이까지 방황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끝내는 흩어졌던 대오를 재정비하여 이제는 다시 금강의 지류를 타고 목적했던 호남 침공을 감행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리라. 이런 눈치를 챈 고려조정에서도 가뜩이나 긴장하여 서울 방어는 물론 호남침공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지발도를 위시한 저들의 주력부대는 일단 함양으로 지결하여 운봉을 치고 남원을 손아귀에 넣은 뒤 장차 전주나 아니면 광주로 들던지 양단간에 다시 작전을 세워 어떻게든 호남을 차지하려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왜구들은 함양-운봉-남원으로 총하는 길만을 공격로로 택하였던가. 물론 그렇지만은 않았다. 가뜩이나 잔꾀로 뭉친 그들은 이미 정병을 뽑아 김천,영동으로 부터 무주를 거쳐 용담을 넘보기도 하였다. 한편 (용담현고지)에 따르면 ‘이미 상주와 선주를 불 지르기 이전에 옥주(옥천)를 약탈한 왜구는 금강의 지류를 타고 용담을 치려했으나 당시 용담현령 피원량은 염군리 고윤덕 등과 힘을 합쳐 혀의 남쪽 용담천에 돌다리를 놓고 건너편 고남산성에 목책을 세워 이포(지금의 고창)에 쌓아든 세곡을 지키기 위한 방비소로 여섯 군데나 두어 가까스로 쳐 들어온 왜구를 무찔렀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이런 기록을 참조해 보더라도 당시 굶주림에 허덕이면 쌀 도둑떼들의 침략이 얼마나 집요하였던가는 더 이상 설명할 나위조차 없는 것이다.
 
 
새벼리의 이유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미 원수 배극렴 등 아홉 장수를 급파하여 사근산성에서 왜구를 맞아 싸웠으나 번번이 패하자 저들은 운봉까지 쳐들어와 그곳을 불사르고 인월역에 둔치고 있었으며 쫒긴 우리 장수들은 남원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로 삼고 찬성사 변안렬을 체찰사로 삼아 부장이 되게 하고 우인열,박임종,홍인계,이성미,이원계를 원수로 삼아 모두 이성계의 절제를 받도록 하여 인월에 둔치고 있는 왜구를 섬멸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크고 자은 왜구의 침입이 있는 이래로 가장 참혹한 아지발도의 만행을 치기위해 출정한 이성계는 비로소 개성을 떠나 장단에 이르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는 기적을 보고 이를 점치도록 하자 점치는 자는 말하기를 승전할 징조라고 하였다. 이같은 경로로 금산을 거쳐 지난날 왜구의 정병이 쳐들어왔다가 물러간 용담의 고남이재를 넘어 급히 인월을 향해 달리던 이성계는 어느 산골에 이르러 마치 앞을 가로막는듯한 좁은 길을 보고 일단 해군을 멈추게 한 뒤 구사를 동원하여 그 길을 넓히고 나서 다시 장수로 떠났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좁은 산골길이 넓혀졌다는 뜻에서 지금까지도 새벼리(일명 새김치 또는 명치: 진안군 정천면 용평리)라는 이름이 저해져 온다는 내용이<동국문헌비고>에 기록되어 있다. 급할수록 정신차려 쉬어간 명장 이성계의 여유가 바로 이 지명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다.
조선 태조(太祖) 최무선(崔茂宣) 황산 대첩(荒山大捷)
【향토】1. 진포(鎭浦)서 화포 맞은 왜구 우왕좌왕
(게재일: 2023.12.26. (최종: 2023.12.26. 22:09))  황산대첩 진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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