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6 ~ 1715]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여시, 또는 여화이며, 호는 존와, 또는 명곡이다. 처음의 이름은 최석만(崔錫萬)이다. 시호는 문정이다.
최석정의 할아버지는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오른 완성 부원군 최명길(1586~1647)이고, 아버지는 한성좌윤을 지낸 완릉군 최후량이다.
최석정은 응교를 지낸 최후상에게 입양되었으며, 남구만(1629~1711)·박세채(1631~1695)를 스승으로 삼아 그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 남구만은 소론 의 우두머리로 영의정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며, 박세채는 소론의 우두머리로서 탕평론을 주장하여 당쟁을 뿌리 뽑기 위하여 노력하고 예학을 바로세우려고 한 인물이다.
최석정 은 어렸을 때 신동으로 이름이 났으며, 1666년 진사시·생원시에 동시에 합격하였다. 1671년(현종 12)에는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외교 문서를 맡던 승문원에 발령을 받았다. 그 후 한림회천에 뽑혀 사관이 되었으며, 홍문관원이 되었다. 임금의 명으로 시문을 짓던 응제시에서는 성적이 우수하여, 임금이 내린 호랑이 가죽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숙종 6) 서인인 김석주 등이 남인인 영의정 허적의 서자 허견이 복창군 3형제와 역모한다고 고발하여 많은 수의 남인들을 몰아 냈다. 이 사건 이후 최석정은 정5품 벼슬인 병조 정랑, 정3품 벼슬인 승정원의 동부승지를 지내다가 부모의 상을 당하자 사직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숙종이 숙원 장씨(?~1701)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삼으려 하는 데 대하여 반대한 서인이 패배함으로써 정권이 남인에게 넘어갔던 1689년(숙종 15)까지 최석정은 승정원 승지,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제학을 지냈다. 1694년 벼슬자리에서 물러났던 소론의 김춘택·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일으키자, 남인인 민암 등이 소론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화를 입었다. 이 사건 이후 최석정은 한성판윤·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면서 장 희빈의 오빠인 장희재(?~1701)를 사형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 홍문관 대재학·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697년(숙종 23) 우의정의 자리에 올라 단종 복위를 성사시켰다. 1699년에 좌의정과 홍문관 대제학 을 겸직하였으며, 1701년(숙종 27) 영의정이 되었다. 그 해 8월에 인현 왕후가 죽고 난 뒤, 장 희빈이 궁인과 무당 을 시켜서 인현 왕후를 죽게 하려고 신에게 빌고 방술을 쓴 것이 발각되었다. 이 때 최석정은 왕세자를 위하여 생모인 장 희빈에게 사약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반대하였다. 또 붕당 문제보다 도학이 쇠퇴한 것이 문제라고 하여 관직을 파면당하고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에 석방되었다. 1703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예기유편》이 주자의 주와 다르다고 비판받고 노론에게 많은 공격을 받자 사직하였다. 최석정은 관료로서 의리와 명분을 앞세우기보다는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으로 번거롭고 해로운 일을 더욱 잘 처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당쟁으로 인한 재앙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소론의 우두머리로서 8차례나 영의정 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 사이의 일들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 그는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당시 배척받던 양명학을 발전시켰다. 양명학 은 명나라 때 왕양명이 부르짖은 유학으로, 마음 밖에 사리가 따로 없으며 사람마다 양지를 타고났으나 물욕이 있기 때문에 성인과 평범한 사람이 구별되는 것이므로, 이 물욕을 물리칠 때 지행 합일이 된다는 철학이다.
최석정은 조선 역대 임금의 뛰어난 공적을 적은 《국조보감》 속편과, 성종의 명으로 노사신 등이 조선 각도의 지리· 풍속 따위를 기록한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편찬하는 것을 지도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훈민 정음을 그림으로 설명한 책이며 2권 1책으로 구성된 《경세훈민정음도설》과 《명곡집》이 있다.
숙종의 묘정에 위패가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