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 ~ 1920] 독립 운동가. 일명 최재형(崔在衡) 또는 최도헌이며, 러시아 이름은 뻬돌소오 또는 최뻬찌카이다.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최재형이 9세 되던 해에 그의 부모는 시베리아 노우키예프스크로 가서 살았는데, 이 때 최재형도 부모와 함께 러시아의 국적을 얻어 그 나라 국민이 되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의 어용 상인이 되어 많은 돈을 벌었으며, 러시아 관리가 되어 두 차례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에 가서 러시아 황제를 만나 보고 황제로부터 5개의 훈장을 받았다. 노우키예프스크 도헌(都憲)이 되어서는 일 년에 3,000 루블의 봉급을 받게 되자, 이 돈을 은행에 맡겨 두었다. 그리고는 그 이자로 해마다 러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 나라 학생 1명씩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켜 인재를 키우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1904년 2월부터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을 러·일 전쟁이라고 하는데, 1905년 10월 11일 일본이 우세한 가운데 강화 조약을 맺게 되어 전쟁이 끝남과 아울러 일본이 우리 나라에서의 정치 · 경제·군사적인 면에서 우월권을 가지게 되고, 러시아는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하였다.
최재형은
러·일 전쟁 때에 러시아 해군의 소위가 되어 경무관 부속 통역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남부 소집회 감독으로서 러시아 국적을 가진 우리 나라 사람들을 모아서 일본에 대항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1907년 8월에 대한 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는데, 이 때 해산된 군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 국경을 넘어 노우키예프스크로 모여들었다. 최재형은 이들에게 군량과 군자금을 제공하여 주었으며, 의리로써 형제 관계를 맺은 전 간도 관리사
이범윤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고, 의병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최병준·
엄인섭 등을 각 지역으로 보냈다. 1908년 3월에는 헤이그 특사였던
이위종으로 부터 군자금 1만 루블을 지원 받았다. 그 해부터 이듬해까지 때때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일대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수비대와 전투를 벌였다. 1909년에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과 함께 독립군 600여 명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그 해 7월에 대장이 되어 200여 명의 날쌔고 용감한 병사들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원에 있는 신아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켰다. 또 회령에 있는 영산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여 일본군을 쳐부수었다. 그 후 노우키예프스크에 박춘근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를 만들었다. 최재형은 한편으로 러시아 군대에 필요한 물자를 대어 줌으로써 군자금을 마련하고, 우리 동포들이 그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최재형은 또
엄인섭·
김서윤 등과 함께 독립 운동 단체인
동의회를 만들고, 이 단체의 회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한국국민회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동 공보》를 창간하였는데, 자주 독립과 국권 회복을 주장하는 글을 주로 실었다. 이 신문은 1 주일에 2회 발행되었으며, 소련 ·미국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비밀리에 발송되었다. 그러나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폐간되자, 1910년에 최재형이 이 신문을 맡아 다시 발행하였다. 그는 이 신문에 일제를 규탄하고 독립을 부르짖는 격렬한 글을 실었다.
최재형 은 또 노우키예프스크 한인(韓人) 중학교를 세워 교포 자녀들의 민족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토크 국민회를 만들어 회장에 취임하였다.
1911년 5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홍범도·
이종호·
김익용·
강택희·
엄인섭 등과 함께 항일 독립 운동 단체인
권업회를 조직하여, 이 단체의 회장이 되었다. 그 후 권업회는 효과적인 활동을 펴기 위하여 《해조 신문》을 발간하였으며, 1914년에 러시아와 일본의 항의로 강제 해산되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최재형은 신한촌에 있는 윤능효의 집에서 10여 명의 동지들과 모여, 재러 한인 대표로 2명의 의원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계획하고, 이것을 실행에 옮겼다.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을 끝내고 각 나라가 서로 화해할 것을 의논하기 위하여 1919년 파리에서 열린 회의이다. 그 해 4월 10일 상하이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자, 최재형은 초대 재무 총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독립단을 조직하여 신한촌에 본부를 두고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4월 일제는 시베리아로 군대를 보냈다. 이 때 최재형은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우리나라 의병을 모두 끌어모아 시가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과 함께 붙잡혀 헤이룽장성에 있는 일본 헌병 본부로 끌려가다가 도중에 탈출하였다. 그러나 군사 경계선 부근에서 다시 붙잡혀 살해되었다. (
4월 참변)
대한 민국 정부에서는 1962년 그에게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