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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김징(金澄)
김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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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김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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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징 (金澄)
[1623 ~ 1676]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원회(元會), 호는 감지당(坎止堂)이며 본관은 청풍이다. 공조정랑과 화순현감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된 사천(沙川) 김극형(金克亨)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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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인조 1)∼1676(숙종 2)]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풍, 자는 원회(元會), 호는 감지당(坎止堂)이다. 계(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인백(仁伯)이고, 아버지는 공조정랑 극형(克亨)이며, 어머니는 정호(鄭頀)의 딸이다. 어릴 때 이식(李植)에게 글을 배웠고, 그 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 되었다.
 
1650년(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學諭)·주서(注書)·병조좌랑·정언(正言) 등을 역임하면서 과감하게 언론을 행사하여, 높은 관리들에게 미움을 받아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전임되었다.
 
1656년 홍관(虹貫)의 변으로 만언(萬言)의 봉사책(封事策)을 상소하였고, 또 관서지방의 적폐(積弊)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657년(효종 8) 병조정랑으로 일본사신을 맞는데 사사로이 관화(官貨)를 사용했다는 무고로 청양(靑陽)에 유배되었다.
 
1660년(현종 1) 강진현감으로 재직할 때에는 향리를 단속하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데 힘썼으며, 1661년 병조에서 황해도사, 1666년 정언·장령·헌납 등 언관을 다시 역임하였다. 이듬 해 정월 헌납에 있으면서 장령 신명규(申命圭) 등 여섯 명과 함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좌의정 홍명하(洪命夏)의 죄를 논핵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벽동(碧潼)에 유배되었다. 1668년 직강(直講)이 되고, 시강원문학, 사간·동부승지를 거쳐 1670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검소하게 하였는데도 수령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다는 헌납 김석주(金錫胄)와 대사간 김우형(金宇亨)의 탄핵을 받고 의금부에 투옥, 배천(白川)에 유배되었다. 1672년 풀려나 강음(江陰)·광주(廣州) 등지에서 여생을 보냈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이 일자 송시열 등이 주도하는 서인의 대공설을 지지하다가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자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는데, 당시 김수흥(金壽興)·정지화(鄭知和)가 공의 죄가 아닌데도 죄를 받은 것이므로 벼슬을 주도록 건의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후 1676년(숙종 2) 2월에 복관되고,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묘역은 왕곡동 홍치골에 위치한다. 신도비는 좌의정 권상하(權尙夏)가 찬하고, 좌참찬 이건명(李健命)이 썼으며, 형조판서 민진원(閔鎭遠)이 전액을 올렸다. 김징 사후 원래 모락산에 장사지냈다가 1683년(숙종 9)에 선영이 있는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 『韓國人名大事典』, 『金澄神道碑銘』, 『의왕의 전통과 문화』(의왕시, 1991)
 
【의왕문화원 > 의왕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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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김유,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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