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5(선조 38)~1663(현종 4)]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청풍, 자는 태숙(泰叔), 호는 사천(沙川) 또는 운촌(雲村)이다.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김인백(金仁伯)의 셋째 아들이다. 20세에 박지계(朴知誡)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스승을 극진히 섬겨서 박지계가 어려운 일을 당하자 상소하여 용서받도록 하였으며, 1635년(인조 13)에 스승이 죽자 1년간 상복은 입지 않았어도 부모를 잃은 자식의 마음으로 옷차림과 행동을 삼가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쟁을 피해 호서(湖西)의 산골로 들어갔다. 독실한 학문으로 이름이 알려지자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아 창릉참봉(昌陵參奉)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후 고향인 광주(廣州) 백운산 아래에 살면서 학동을 가르쳤다. 그리고 얼마 후에 공조정랑을 거쳐 화순현감(和順縣監)이 되어 흉년으로 굶고 있는 백성들을 돕는데 힘썼다. 배우고 행동함이 일치하여 벗어남이 없었다.
항시 책을 아껴 읽었으며, 연구하고 강론과 토론함에 먹고 자는 것을 잊은 때가 많았으며,
송시열(宋時烈)과 성선체용설(性善體用說)을 변론하는데 편지로 의견교환을 수없이 많이 하였다. 학식이 박통하였으며 행하는 바와 마음가짐 등 일체가 의리에 벗어남이 추호도 없었다. 공이 25세(인조 8) 때 인조의 생부를 원종으로 추증하여 제사를 받들라는 상소를 올려 부자의 의리를 주장하였다.
충북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능암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