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201 ~ BC 168] 중국 전한 초기의 사상가이다.
낙양(洛陽) 출신으로서 18세에 이미 수재라는 평판이 높았고, 22세 때에 박사관(博士官)에 임영되었으며 다시 태중대부(太中大夫)에 발탁되었다. 그는 그때 한(漢)의 제도와 역법을 개정할 것을 문제에게 진언하였지만 주발(周勃) 등의 수구파 대신의 반대를 받아 25세 때에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전출되고 말았다.
그러나 1년 남짓하여 중앙에 소환되고, 문제의 막내 아들인 양회왕(梁懷王) 유읍의 태부가 되어 국사에 관하여 누누이 의견을 상주하곤 하였지만 그 치안책은 문제에 의하여 실현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얼마 후 양회왕의 낙마로 인한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병들어 이듬해 33세로 죽었다.
사상
그의 주장은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한 왕조의 권력을 내외로 향하여 강화하는 일에 중심을 두었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한의 황제와 대등하게 행세하는 제 왕국을 분할하여 그의 세력을 삭감하고, 밖으로는 흉노를 회유하여 한의 위세를 높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가의는 유가적인 이상 밑에서 전개하였다.
그러나 장사(長沙)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굴원을 조위(弔慰)하는 부(賦)』나, 『복조의 부(賦)』에는 세상의 인사에 얽매이지 않고자 하는 도가적 심경이 보인다.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