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탄금대 전투(彈琴臺戰鬪)
탄금대 전투
자 료 실
▶ 지식지도
▶ 원문/전문 (없음)
▶ 시민 참여 콘텐츠 (없음)
▶ 관련 동영상 (없음)
about 탄금대 전투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탄금대 전투 (彈琴臺戰鬪)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을 주장으로 한 조선군과 왜군이 충주에서 벌인 전투.
▣ 지식지도
◈ 요약정보
탄금대 전투 (彈琴臺戰鬪)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신립(申砬)을 주장으로 한 조선군과 왜군이 충주에서 벌인 전투. 고니시(小西行長)가 거느린 왜군에 조선의 관군은 대패하였다. 신립은 탄금대로 돌아와 부장 김여물과 함께 적병 수 십 명을 사살한 뒤,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충주의 사민(士民)과 관속은 아군을 믿고 피난하지 않아 왜군에게 희생된 사람이 다른 지방보다 많았다. 신립의 패보(敗報)가 조정에 전해지자 민심이 극도로 혼란해지고, 선조는 서울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하게 되었다.
◈ 지식지도
탄금대 전투 (彈琴臺戰鬪) 1583년 1588년 1558년 고니시 유키나가 신립 이일 김여물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권율 김류 김성일 김시민 니탕개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선조 신입 이순신 이이 정철 황윤길 이경록 동의보감 임진왜란 경주 전투 정유재란 진주성 전투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
▣ 참조 카달로그
◈ 참조 키워드
임진왜란 (4) 백과 신립 (3) 백과 김여물 (2) 백과 인조 반정 (2) 백과 정철 (2) 백과
▣ 백과사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을 주장으로 한 조선군과 왜군이 충주에서 벌인 전투.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왜군 대병력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북방 방비에서 용맹을 떨친 신립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임명, 이를 막게 하였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뒤 4월 24일 부장 몇 사람과 조령(鳥嶺)으로 달려가 형세를 살필 때, 먼저 경상도로 남하했던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해 돌아왔다.
 
이 때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岉) 등이 “적은 군대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마땅히 지형이 험한 조령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이곳에서는 기병(騎兵)을 쓸 수 없으니 마땅히 평원에서 일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6일 그는 드디어 충주의 서북 4㎞ 지점에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앞에 논이 많아 말을 달리기에 불편하였다. 27일 고니시(小西行長)가 거느린 왜군은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丹月驛)에 이르렀다. 이에 충주목사 이종장(李宗長)과 순변사 이일이 척후로 나갔지만, 적군에게 길이 막혀 신립은 적정(敵情)을 정탐할 수 없었다.
 
28일 새벽 왜군은 부대를 나누어 본진은 충주성에 돌입하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으로 숨어 내려왔으며, 우군(右軍)은 산으로 숨어 동쪽으로 나가 강을 건넜다. 신립은 당황해 충주성으로 급히 말을 달렸으나, 군대의 전열이 미처 정비되기도 전에 성안의 왜군이 나팔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출격, 조선의 관군은 대패하였다.
 
신립은 탄금대로 돌아와 부장 김여물과 함께 적병 수 십 명을 사살한 뒤,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충주의 사민(士民)과 관속은 아군을 믿고 피난하지 않아 왜군에게 희생된 사람이 다른 지방보다 많았다.
 
신립의 패보(敗報)가 조정에 전해지자 민심이 극도로 혼란해지고, 선조는 서울을 떠나 평안도로 피난하게 되었다.
 
【인용】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기본항목(E)
내서재 추천 : 0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