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부르봉가의 왕(재위 1643~1715년).
다섯 살에 왕위에 오른 루이는 자신의 열세 번째 생일 날짜인 1723년 2월 15일까지 그의 재종조부이자 이복 왕고모부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섭정과 함께 통치하였다. 그 뒤로는 자신이 직접 정식으로 국가를 다스렸다. 이때
플뢰리(André-Hercule de Fleury)를 재상으로 등용, 평화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3~3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48년)에 휩쓸렸으며 이어서
7년 전쟁(1756~63년)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7년 전쟁에서는 해상과 인도(印度) 및 미국 식민지에서 패배하여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으며, 많은 비용의 지출은 재정난을 초래하였다. 로렌의 병합(倂合)(1766년)과 코르시카의 구입(1768년)은 그의 치세(治世)때이다. 정치상에서는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 뒤바리 백작 부인 등의 충동으로 인하여 실패가 많았고, 계몽사상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부르봉 왕가의 절대주의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이다.
갑작스럽게 죽은 대부분의 왕족보다 오래 살아남은 그는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인자한 행동으로 명성을 얻어 “친애왕” (le Bien-Aimé)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백성이 그의 결핍된 도덕성과 프랑스와 군주 정치를 효과적으로 개선하지 못한 점 그리고 외교 정책의 실패를 지각하면서 그에 대한 애정이 식자, 결국 그는 프랑스의 인기 없는 왕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역사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루이 15세를 무자비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그가 실제로는 매우 지적이며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통치하는 과업에 일신을 바쳤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가 통치기간 내내 나쁜 결과만 가져온 이유는 전제군주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그의 뿌리 깊은 소심함과 문제를 앞당겨 혼란만 가중시키는 인식 때문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루이 15세는 19세기 낭만주의의 “부르주아적 통치자들”의 형상을 미리 나타낸 인물이었다. 선왕이자 증조부인 루이 14세가 강력한 군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던 데 반해, 루이 15세는 사실상 화려한 겉치레와 궁정 의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사생활에만 몰두하였다.
어린 나이에 일찍 어머니를 여의어 위안을 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를 갈망했던 그는 자신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믿음직한 여자를 찾고자 1745년 이후 많은 여인을 가까이하여 나라 살림을 소홀히 하고 나라 재정에 큰 손실을 냈으며, 이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