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 일대에 위치한 백제 사비시대의 궁원지(宮苑池)이다. 별궁 인공 연못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 연못의 동쪽 일대에는 대리석을 팔각형으로 짜 올린 어정, 기와편, 초석(礎石)이 남아 있다. 1964년 대한민국 사적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궁남지에 대한 조사는 1990년부터 현재까지 9차에 걸쳐 수행되었다. 조사 결과 사비시대에 조성된 인공수로, 목조저수조, 우물지와 도로유구, 수정 경작지, 토기 가마터, 굴립주건물지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고, 6~7세기와 3~4세기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주로 6세기 무렵 조성하여 사용된 인공수로와, 목조저수조 내부의 퇴적된 개흙층에서 출토되었는데, 행정 구역명, 인명, 지명 및 수전을 개간했던 사실이 적혀있다.
관련 기록 및 설화
관련 기록
궁남지에 대해서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35년(634년)에 '3월에 궁성(宮城)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되는 긴 수로로 끌어들였으며, 물가 주변의 사방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고 되어 있다. 백제 웅진(熊津)시대의 왕궁이었던 공산성(公山城) 안에서는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연못이 왕궁터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함께 발굴된 바 있다.
《삼국사기》무왕 37년조에는 "8월에 망해루(望海樓)에서 군신(群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39년조(年條)에는 "3월에 왕이 왕궁(王宮)의 처첩(妻妾)과 함께 대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궁남지는 처음 만들어질 때 붙은 이름이 아니고 백제시대에는 단지 대지라고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뱃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규모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며 현재는 1만평 정도만 남아 있다.
《삼국사기》 의자왕(義慈王) 15년조에 "2월에 태자궁(太子宮)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造景) 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설화
궁남지는 백제
무왕(武王)의 출생 설화와 관련이 있다. 백제시대 법왕(法王)의 시녀였던 여인이 못가에서 홀로 살던 중 용신(龍神)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서동(薯童)으로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