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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백석(白石)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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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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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白石)
[1912 ~ 1996] 일제 강점기와 북한의 시인이자 소설가, 번역문학가이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백석 (白石) 조만식 조선 물산 장려회 조선 민주당
▣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편지 근/현대 수필 백석 (20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근/현대 시 백석 (白石) (126) 멧새 소리 근/현대 시 백석 (49)
◈ 참조 원문/전문
백석론 白石論 근/현대 수필 오장환 (24) 백석시집 사슴 평 근/현대 수필 박용철 (20)
▣ 시민참여콘텐츠
◈ 인기순 (1 ~ 4 위)
2017.08.16
3년의 사랑, 60년간 이별 (2017. 8. 16)
【여행】 서울 성북구 길상사를 휴일 둘러보았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길상사(吉祥寺)란 이름을 남기고 간 길상화(吉祥華, 故 김영한)에 대하여 포스팅합니다.
 
◈ 등록순
2017.08.16
3년의 사랑, 60년간 이별 (2017. 8. 16)
【여행】 서울 성북구 길상사를 휴일 둘러보았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길상사(吉祥寺)란 이름을 남기고 간 길상화(吉祥華, 故 김영한)에 대하여 포스팅합니다.
 
▣ 참조 카달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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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2) 백과 1938년 (2) 백과 문학평론 (2) (2) 백과 평론 (2) 백과
◈ 참조 키워드
성북구 (3) 백과
▣ 백과사전
[1912 ~ 1996] 일제 강점기와 북한의 시인이자 소설가, 번역문학가이다.
 
본명(本名)은 백기행(白夔行)이고 아명은 백기연(白夔衍, 1915년에 백기행(白夔行)으로 개명.)이며 1945년 일본국 패망 및 조선국 광복 후 사실상 백석(白石)으로 개명(改名)한 그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석(石)이라는 이름은 일본 시문학가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작품을 매우 좋아하여 그 이름의 석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생애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백시박(白時璞)과 이봉우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백시박은 자가 용삼(龍三)이고 후에 백영옥(白榮沃)으로 개명했다. 백영옥이 태어난 해는 1882년으로 되어 있으나 호적 신고를 몇 년씩 미루는 당시의 관습과 후에 백석의 신상조사서에 적힌 것으로 비춰볼 때 1875년에 태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 기사 생활을 했던 아버지 백영옥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으나, 오산고보의 설립을 위한 건축기금을 마련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37세에 백석을 낳은 백영옥은 그를 귀하게 여겼다. 어머니 이봉우는 1888년생으로, 24세에 서울에서 시집을 왔다. 백석의 외조부 이양실과 그의 기생 출신 첩 사이에서 태어난 만큼, 나이 차가 많은 백영삼과 결혼했다. 그 시절 당시 결점(어머니가 아버지의 첩인 여성의 경우 등)이 있는 여성이 자신보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성과 결혼하는 것은 일반적인 특정 풍조였다. 그러나 어머니 이봉우는 매사에 정결하고 음식 솜씨가 뛰어나 오산학교 교장 조만식은 자주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조만식은 아버지 백영옥과 친분이 있었고 조선일보를 운영했던 방응모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후에 백영옥이 하숙집을 시작할 때 백석 가족은 오산학교 앞쪽의 집으로 이사해 살았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마친 후에 일본에서 1934년 아오야마 가쿠인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934년 5월 16일자 《조선일보》에 산문 〈이설(耳說) 귀고리〉를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작가와 번역가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1월 20일에는 그간 《조선일보》와 《조광》(朝光)에 발표한 7편의 시에, 새로 선보이는 26편의 시를 보태어 시집 《사슴》을 당시 경성부 통의동(通義洞)에서 자비로 100권 출간했다. 이후 1948년 《학풍》(學風) 창간호(10월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내놓기까지 60여 편의 시를 여러 잡지와 신문, 시선집 등에 발표했으나 정작 시인 자신은 《사슴》 외에는 시집을 더 이상 출간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최근에 한 연구자는 시집 《사슴》의 구조가 J. S. 바흐가 작곡한 〈골트베르크 변주곡〉(BWV 988)을 모방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같은 작곡가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BWV 1004)의 '샤콘'을 구조와 내용 면에서 언어적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이러한 백석의 음악적 구조의 차용은 백석 자신이 독창적으로 고안한 것이라기보다는 영랑 김윤식의 전체적인 설계 아래 백석이 몸에 배인 성실함과 천부적인 언어적 재주로 바흐의 음악을 시적으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암시한다.
 
백석은 작품에 평안도 방언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의 사투리와 고어를 사용했으며 1948년 이후 많은 활동을 하지 못했다. 백석은 당시의 조선 땅(오늘날의 남북한)과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시는 한민족의 공동체적 친근성에 기반을 두었고 작품의 도처에는 고향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이 담겨 있다.
 
남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인이라는 이유로 백석 시의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1988년 월북 작가 해금 조치 이후로 백석의 많은 작품들이 활발히 소개되고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주목받고 평가되고 있다. 평북 지방을 비롯한 여러 지방의 사투리와 사라져가는 옛것을 소재로 삼아 특유의 향토주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자기 관조로 한국 모더니즘의 또다른 측면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64년경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한때 대한민국과 일본에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연구 결과 1996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인용】위키백과 (201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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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