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김충선(金忠善)
김충선
자 료 실
▶ 지식지도
원문/전문
▶ 시민 참여 콘텐츠 (없음)
관련 동영상
about 김충선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김충선 (金忠善)
[1571 ~ 1642] (일본명 : 沙也可 사야카)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한 항왜 장수로, 귀화한 후에는 자를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으로 지었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김충선 (金忠善) 선무 공신 정묘호란 진무 공신 통영 충렬사 현충사 1624년 1591년 가토 기요마사 곽재우 김경서 이순신 강홍립 계월향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권율 김성일 김시민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선조 신입 원균 류성룡 이괄 이이 이일 정기룡 조식 황윤길 양호 난중일기 동의보감 이순신전 울산성 전투 이괄의 난 임진왜란 경주 전투 명량 해전 인조 반정 정유재란 진주성 전투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 녹동서원 세종로 이순신 동상 거북선
▣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모하당술회가 慕夏堂述懷歌 가사 김충선(金忠善) (20)
▣ 참조 동영상 (인기순, 1~10 위)
▣ 참조 카달로그
◈ 참조 키워드
임진왜란 (3) 백과 항왜 (3) 조총 (2) 백과
▣ 백과사전
[1571 ~ 1642] (일본명 : 沙也可 사야카)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화한 항왜 장수로, 귀화한 후에는 자를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으로 지었다.
 
일본의 역사서에는 사야가가 정확하게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한국 측에서도 《조선왕조실록》에 두 번 언급될 뿐이다. 그에 대해 그나마 언급된 것은 그 자신이 쓴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이다. 본관은 김해(金海)다.
 

생애

임진왜란과 항왜 김충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군사 3000명을 인솔하고 한반도로 쳐들어왔다가 경상도 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박진에게 항복한 뒤 귀부(歸附)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동래성으로 상륙한 지 다음 날이었다. 사야가는 박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강화서에서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
 
이후 사야가는 경상도의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郭再祐)와도 연합하기도 했다. 의병 및 조선군 장수로서 모두 78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이때 전공을 세워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손시로(孫時老)등 항복한 왜장(倭將)과 함께 의령(宜寧)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무관 3품 당상(堂上)에 올랐으며, 이어 사야가는 울산성 전투에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金景瑞) 휘하로 울산왜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후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의 주청(奏請)으로 선조로부터 김해 김씨와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조선 이름을 하사받고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했다.
 
김충선이 조선에 조총을 보급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사야가가 귀화한 직후 조총 개발을 건의하는 서신을 절도사에게 제출했고, 이순신과 나눈 서신에서는 이미 조총을 개발하여 훈련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행적

임진왜란 이후 야인(野人)들의 침입이 잦자 변방(邊方) 방어를 자청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10년 동안 북방 변경 수비를 한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이괄의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를 포참(捕斬)한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에 반납하여 둔전(屯田)을 만들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소명(召命)을 받지 않고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나가 싸워 청나라 병사 500여 명을 베었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대성통곡하며 대구(大邱)의 녹리(鹿里)로 돌아갔다. 1643년 외괴권관(外怪權管)으로 국경수비를 맡고 있던 중 청나라 칙사의 항의로 해직되어 대구 녹리로 돌아왔다.
 
사후 녹동서원(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배향되었다. 1798년(정조13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녹동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4년 재건되었다.
 
【인용】위키백과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기본항목(E)
내서재 추천 : 0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