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1 ~ 1419] 자는 敬之(경지), 호는 龜亭(구정), 시호는 忠景(충경)으로 牧隱(목은)
李穡(이색)의 문인. 고려 공민왕 20년 21세로 과거에 급제하여 우사의대부, 판전교시사, 철원부사 등의 벼슬을 지내다.
조선왕조 건국후에 대사헌, 참찬문하부사, 오도도병마사(五道都兵馬使) 등의 문무 요직을 거쳐 아우인
南誾(남은)이 정도전과 함께 몰락하자 친형이라는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나 경남 의령지방으로 내려가다.
왕의 특명으로 다시 소환되어 판중추원사, 경상도관찰사, 우의정, 대제학을 거치며 마침내 별세하기 3년 전인 태종 16년에 최고위직인 영의정에 오르다.
오래동안 벼슬길에 있으면서 불교의 폐단을 논박하여 유학의 창달에 기여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국교 개선에도 노력하였다.
또한 왕명에 의해 河崙(하륜)과 함께 “高麗史”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원래 이름은 謙(겸)이 었으나 새 왕조의 첫 임금으로 즉위한 태조는 공에게 ‘在’ 라는 이름을 내리면서 까지 공을 신임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