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예종(
1107년) 때
윤관이
별무반(別武班)을 거느리고 천리장성을 넘어 동북 지역의 여진족들을 전부 복속시키고 동북 9성을 쌓았다.
강동 6주와 함께 고려의 북진 정책 및 영토 확장을 상징하는 지역이다.
개설
예종 2년(1107년) 예종의 명을 받은 장군
윤관(尹瓘)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고려인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천리장성 동북방의 여진족을 정벌한 후, 여진족들을 전부 복속시키고 1108년에 쌓은 9개의 성들을 말한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9개의 성들의 위치를 함주(咸州)·복주(福州)·영주(英州)·길주(吉州)·웅주(雄州)·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공험진(公嶮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윤관은 고려 영토의 북방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공주(孔州)의 동림성(東林城)으로부터 동북 700리에 있는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고려정계비(高麗定界碑)를 세웠다.
공험진에 9성을 개척하고 1년 뒤인 예종 4년(1109년) 고려 조정은 윤관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9성을 여진족에 돌려주기로 결정하였고 일부 고려군이 해당 성에 잔주하여 여진족들을 다스렸다.
공험진과선춘령의 위치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선춘령에 이르는 경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림성(東林城)에서 북쪽으로 5리쯤 가면 소다로(所多老)의 영기(營基)가 있고, 그 북쪽으로 30리에 회질가탄(會叱家灘)이 있으니, 바로 두만강의 하류이다. 강을 건너 10리 되는 넓은 들 가운데에 큰 성이 있으니, 곧 현성(縣城)이다. 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 그 북쪽으로 90리 되는 곳의 산상(山上)에 옛 석성(石城)이 있으니, 이름이 ‘어라손참(於羅孫站)’이다. 그 북쪽으로 30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이 있고, 그 북쪽으로 60리에 유선참(留善站)이 있으며, 그 동북쪽으로 70리에 토성기(土城基)가 있으니, 곧 거양성(巨陽城)이다. 안에 돌기둥 둘이 있으니, 예전에 종(鍾)을 달던 곳이다. 종의 높이가 3척, 지름이 4척이 넘었었다. 일찍이 경원(慶源) 사람인 유성(庾誠)이란 자가 그 성(城)에 가서 그 종을 부수어서 말 9마리에 싣고 왔는데, 겨우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었고, 따라갔던 사람 30여 명이 모두 죽었다. 그 나머지 쇠붙이는 풀숲 가운데 버려져 있었으나, 누가 감히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그 성은 본래 고려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쌓은 것이다.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선춘현(先春峴)이니, 곧 윤관이 비(碑)를 세운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위와 동일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
《고려사》에서는 공험진을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공험진(公嶮鎭)은 예종 3년(1108)에 성(城)을 쌓아 진(鎭)을 설치하고 방어사(防禦使)로 삼았다. 〈예종〉6년(1111)에 산성을 쌓았다.【공주(孔州) 혹은 광주(匡州)라고도 한다. 혹은 선춘령(先春嶺) 동남쪽·백두산(白頭山) 동북쪽에 있다고도 한다. 혹은 소하강(蘇下江)변에 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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