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6 ~ 1701]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정치인, 성리학자, 실학자이자 시인이며 청백리이다.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자는 이로(耳老), 호는 정재(靜齋), 정암(靜巖)이다. 미수
허목(許穆), 백호
윤휴(尹鑴)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 7)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후 성균관에서 6년간 근무하다가 승정원주서가 되고 홍주목사, 승지 등을 지내다가
경신환국으로 파직되었다. 이때 초산으로 유배되는 아버지 이원정을 따라 갔다가 소환되어 아버지 이원정의 장살을 목격하고, 서인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 이후 그는 9년간 부친의 피묻은 적삼을 입고다녔다고 한다. 그 뒤
기사환국으로 복직되어 형조참의, 우승지, 전라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 부호군에 이르렀다.
효종을 서자, 중자로 규정한 서인(西人) 송시열, 송준길의 예론을 맹공격하고 1675년에는 송시열의 죄를 고묘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경신환국으로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여 승지,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삭출되었다가 1696년 사간원사간으로 복직했으나 이듬해 다시 유배되었고 1699년 풀려났다.
여러 국정운영과 시정 개혁에 대해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였고, 서인을 공격하였다. 당색으로는
남인 청남이며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 선정을 베풀고,
1690년(숙종 16) 영남 대흉년에 관찰사로 백성들을 구제하여 도민들이 영사비(永思碑)가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