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16] 조선시대 진도군수, 부령부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치원(致遠), 호는 조은(釣隱).
생애 및 활동사항
무예에 뛰어나 1585년(선조 18) 무과에 장원하였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훈련원첨정으로 임금의 피난길을 호위하여 호위장군(虎威將軍)의 호를 받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가
명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있을 때는 정병 7백을 이끌고 심하(深河)의 여진족 (女眞族)을 토벌하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에 올랐으나 여진(汝眞)의 잔당 고면을(古丏乙)의 야습에 분전하다가 이마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고향에 충신정려(忠臣旌閭)가 세워졌다.
【인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덕일은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좌수영과 통제영을 오가며 군무를 수행한 무관으로 1591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군관과 장선사로 활약하며 전투선(귀선)의 보수와 장선(무기의 배치 등)을 하였다. 군마를 달라는 방백의 요구를 거절한 후 알 수 없는 이유로 수군을 나와 낙향하였고 후에 육전에 참여하였다(전라 감사 휘하에서 별장의 역할로 왜군 주둔지에 매복하며 적을 막았다 1598년 1월 부제학 신식의 선조 보고 내용 중) 이후 목포만호, 임치첨사, 진도군수, 동관진첨사, 삼수군수, 부령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6년 여진족 박수희 부락(약3000명)의 침입에 정병 700으로 토벌하고 박수희 일당을 생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여 광해왕의 명으로 그 수급을 태묘에 바쳤다. 이 공으로 종2품 가선대부에 오르는 교서를 하사 받고(1616. 8. 16 국립중앙박물관) 경상좌병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전 잔당 고면을 일당의 부령성 야습에 화살을 맞고 순절하였다.
정조조에서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고향 마을에 정려를 명하여
쌍충일렬지여가
고흥군 대서면 서호마을에 현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