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9년(광해군 11) 3월
누르하치(奴兒合赤)를 정벌하기 위해 출병한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후금군에게 패한 사건을 이른다. 심하전투는 심하 전역(深河之役) , 기미년 전역(己未之役) , 혹은 기미년의 심하 전역(己未深河之役)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전투를 중국에서는 사르후 전투라고 하는데 이는 패전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두송(杜松)이 전투 끝에 전사한 장소가 사르후(薩爾滸)이기 때문이다. 심하는
양호,
유정(劉綎)이 지휘하는 명군과
강홍립(姜弘立)·
김경서(金景瑞)가 지휘하는 조선군이 후금군과 처음 접전한 지역이다. 이 전투에서 명군과 조선군은 소규모의 후금군을 상대로 싸웠는데,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조선군은 군량이 제때 도착하지 않은데다가 길이 험하여 전진에 어려움을 겪었고, 강홍립은 도원수로서 조선군의 입장을 명군에 설명하며 일정을 늦추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명군은 기일이 정해져 있다는 이유로 행군을 엄하게 독촉하였다. 그 결과 조선군은 굶주리고 피로에 지친 상태로 행군할 수밖에 없었다. 강홍립의 보고에 따르면 명군 지휘부 내부에도 균열이 있었으며, 조선군은 군량이 다 떨어진데다가 병사들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3월 4일,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행군하던 중 부차(富車)에 도착하였다. 당시 명군의 다른 부대들은 후금군에 의해 각개격파되었으며, 조선군보다 앞서서 행군하던 명군 부대 역시 후금군에게 괴멸당했으나, 조선군은 이를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후금군이 접근해 오자 강홍립은 진영을 정비하도록 지시하였지만, 미처 대오가 완전히 갖춰지지 못한 상태에서 후금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순식간에 김응하가 이끄는 좌영이 먼저 괴멸당했고, 이를 구원하러 간 이일원의 우영 역시 전멸당해 강홍립이 있는 중영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후금군이 중영에까지 공격해 온다면 전군이 전멸할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후금은 조선군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왜 원한도 없는 조선이 자신들을 치러 군대를 보냈느냐고 물어 왔고, 강홍립은 이번 출병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였다. 후금군과 조선군이 서로 사람을 보내어 교섭한 끝에 강홍립을 비롯한 조선군 지휘부는 항복을 결정하였고, 이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 이것이 심하전투(深河戰鬪)의 마지막 국면인 부차전투(富車戰鬪)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