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워싱턴
조지 워싱턴
자 료 실
지식지도
원문/전문
▶ 시민 참여 콘텐츠 (없음)
▶ 관련 동영상 (없음)
▣ 주요 정보
개요
워싱턴의 생애
about 조지 워싱턴


◈ 안내
목   차
[숨기기]
 

1. 어린 시절

워싱턴은 1732년 2월 22일 버지니아 주 웨스트모랜드군의 콜로니얼 비치 남부에 있는 포프즈 크리크 플랜테이션의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어릴 때 그의 이복형 로렌스가 해군이었을 때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에 이끌려 영국 해군이 되기로 결심한 그는 15살 때 학업을 중단하고 해군이 되려고 하였지만 홀몸이 된 엄마의 만류로 해군 대신 토지측량관이 되어 15세부터 6년간 작업을 하였다.
 
어린 시절의 일화 중에 유명한 것이 벚꽃 절단 일화이다. 벚꽃을 도끼로 잘랐다가 솔직하게 자기가 한 일임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내용이다. 이 일화는 1800년 로크 윔스(Locke Weems)가 쓴 《일화로 엮은 워싱턴의 생애》에 소개된 것인데, 그러나 이 일화는 저자인 윔스가 꾸며낸 이야기다.
 
윔스 자신도 마운트버넌 교구의 전직 목사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지만 그런 교구는 없었고, 윔스는 떠돌이 외판원에 불과했다. 그가 처음 이 일화가 소개된 책을 쓴 것은 1800년 2월이었다. 미국인들이 워싱턴의 일대기를 궁금해한다는 것을 알게 된 윔스는 출판사에 워싱턴의 일대기에 대한 책을 내자고 제의했고, 자기 자신이 직접 썼다.
 
초판은 소책자 수준으로 80쪽 정도 분량이었으나 생각보다 많이 팔렸고, 내용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윔스는 자료 보강에 나섰다. 이 일화가 실린 것은 1806년에 출판된 5판에서였다.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던 것이다.
 
 

2. 결혼

마운트 버넌 농장그리고 그는 21세였던 1753년에 버지니아 민병대에 입대하였고, 뒤에 영국군 정규군에 편성되어 프랑스-인디언전쟁에 참전하여 싸웠다. 참전 후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마운트 버넌 농장으로 돌아간 그는 이때 그의 부인이 될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의 미망인인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를 만나게 되었다.
 
1759년 마사와의 결혼으로 3,000명이 넘는 노예와 1만 7,000에이커의 땅이 그의 재산이 되어 그는 토지만 2만 2,000에이커나 되는 버지니아주 최고 갑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뒷날 그가 대통령이 된 뒤, 미국 연방정부 관리 전체의 수가 그가 소유한 노예수보다 적어서 그가 3번째 대통령이 되기를 거부한 이유 중 하나로 선꼽힌다.
 
 
 

3. 독립전쟁

마운트버넌 농장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미국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군 사령관으로 취임하였고, 그의 타고난 실력인 명석한 판단력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남을 이끌어가는 데에 훌륭한 장점을 가진 성격을 이용해 온갖 악조건과 싸우면서 끝내 승리를 거두어 미국의 독립을 성취하게 하였다.
 
그 후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그는 아무런 미련없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4. 대통령 재임기간

워싱턴의 공식 포스터그는 1787년에 버지니아주 대표가 되고, 약 2년 후인 1789년에 전 세계적으로 투표로 인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취임된다. 취임 후 그는 185cm의 큰 키에 당당한 체구로 정부에서뿐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돋보였고, 독립전쟁을 승리로 끝낸 영웅이었으나 군인으로서 그는 그의 인품만큼 빛을 발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첫 대통령으로서, 특히 권좌에서 깨끗이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이 탄생되고 그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직도 대통령이란 자리가 무엇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고, "선출된 왕"이라고 생각했고, 대통령인 자신도 선출된 왕이라고 생각하여 행동하였다.
 
초기에 그는 그에 대한 칭호로 왕에게 붙일 수 있는 전하라는 단어를 좋아했고, 다른나라 왕처럼 위엄있는 몸가짐을 가지고 왕처럼 대접받기를 원했다. 또, 다른 나라 왕들이 자신을 3인칭으로 언급하듯이 그도 자신을 3인칭으로 언급하였고, 유럽의 왕실을 본받아 한없이 많은 접견회와 파티를 열었고, 영국의 국왕처럼 그는 미국 전역을 여행하였고, 국민들은 국왕을 맞이하듯 화려한 축하행사로 그를 환영했다.
 
이러한 그의 제왕과 같은 언행으로 새로 태어난 나라 미국의 새로운 직책인 대통령 지위는 처음부터 강력해졌다. 즉 그는 그 누구도 겪어보지 않은 미국과 대통령직을 구체화하는 업적을 이룩하였다.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한 1789년 이후 약 10년간은 미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해밀턴이 이끄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만들려는 연방주의자와 제퍼슨이 이끄는 주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려는 반연방주의자로 분열과 정치싸움이 심한 때였다. 그 때 그는 내각에 두 파의 인물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균형을 잡아 자칫하면 유혈충돌로들까지 번질 수 있는 사태를 조정했는가 하면 수천 명의 농민들이 납세거부운동으로 일으킨 위스키반란을 단호하게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해 정부의 위신을 세우는 등 억압과 조정을 정교하게 배합하여 지도자로서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었다.
 
 
 

5. 퇴임

1797년 두번에 걸친 임기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직에 사망할 때까지 영원히 머물러줄 것을 간청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하며, 자기가 3번씩 임기를 맡는다면 장기집권을 위한 무서운 정치싸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2번의 임기만을 하였고, 대통령직을 떠나면서 그는 유명한 "고별사"를 발표하였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미국인의 신념에 신성한 사료로 살이 있다. 이 고별사에서는 그는 무엇보다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국민들에게는 정당간의 극심한 대립을 경고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에 대한 지나친 종속과 적대감을 경계하려고 했고 사망을 거절하며 고별사발표하였고 미국민들이사망
 
 
 

6. 죽음

임기를 마친 그는 미련없이 자신의 사저가 있는 마운트버넌으로 돌아갔고, 2년 뒤인 1799년 세상을 떠났고, 그가 세운 두 번까지만 대통령 임기를 마친다는 전통은 1940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깨고, 수정헌법 22조에 3선 출마금지로 추가할 때까지 철칙처럼 지켜온 절제의 미덕이었다.
 
그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초대 대통령이자, 떠날 때에는 떠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 대통령이고, 귀족정치를 지지하고 또 왕처럼 행동하여 정치를 결코 대중화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대중민주주의를 창조해내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심화항목(D)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미국 대통령
초대 대통령 워싱턴 > 애덤스
목록 참조
외부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