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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이이(李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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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규) 연표
 

1. 율곡 선생 연보

 
1536년 (중종 31년) 1세
○ 음력 12월 26일에 강릉 북평촌(현 죽헌동) 외가인 오죽헌 몽룡실에서 태어나다.(선생의 원래 고향은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이다)
 
1538년(중종 33년) 3세
○ 말과 글을 배우다. 하루는 외할머니 이씨의 물음에 "석류는 껍질 속에 부서러진 붉은 구슬을 싸고 있네(石榴皮과碎紅珠)"라고 옛 시귀절을 읊다.
 
1540년(중종 35년) 5세
○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이 들자 외조부 사당에 들어가 쾌유를 기도하다.
 
1541년(중종 36년) 6세
○ 강릉 외가에서 어머니를 따라 서울 수진방(壽進坊: 현 청진동)에 있는 서울집으로 올라오다.
 
1542년(중종 37년) 7세
○ 어머니에게 사서(四書)를 배우다.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짓다.
 
1543년(중종 38년) 8세
○ 본가인 파주 율곡리의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짓다.
 
1544년(중종 39년) 9세
○ 《이륜행실록》을 보다가 옛날 장공예(張公藝)의 이야기를 읽고 그를 사모하여 형제들이 부모를 받들고 함께 사는 그림을 그려놓고 바라보다.
 
1545년(중종 40년) 10세
○ 강릉 외가에서 『경포대부』를 짓다.
 
1546년(명종 1년) 11세
○ 아버지 이원수공이 병환이 나자 팔을 찔러 피를 드리고 사당에 들가서 쾌유를 기도하다.
 
1548년(명종 3년) 13세
○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다.
 
1551년(명종 6년) 16세
○ 5월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별세하다.
○ 이 해에 『어머니의 행장(先비行狀)』을 짓다.
 
1553년(명종 8년) 18세
○ 가을에 시묘살이를 마치고 관례(冠禮:성인식)를 행하다.
 
1554년(명종 9년) 19세
○ 우계 성혼과 교분을 맺다.
○ 이 해 3월에 금강산에 입산하다.
 
1555년(명종 10년) 20세
○ 봄에 금강산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다.
○ 강릉 외가로 돌아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성학에 전심하다.
 
1556년(명종 11년) 21세
○ 봄에 서울 집으로 돌아오다.
○ 이 해에 한성시(漢城試)에 장원 급제하다.
 
1557년(명종 12년) 22세
○ 9월에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 곡산 노씨와 혼인하다.
 
1558년(명종 13년) 23세
○ 봄에 예안(안동) 도산에 가서 퇴계를 만나 도를 묻다.
○ 이 해 겨울 별시해(別試解)에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급제하다.
 
1560년(명종 15년) 25세
○ 이 해에 한 장흥서(韓長興) 끝에 발문을 쓰고 「지야서회(至夜書懷)」라는 시(詩)를 짓다.
 
1561년(명종 16년) 26세
○ 5월에 아버지 이원수공이 별세하다.
 
1564년(명종 19년) 29세
○ 7월에 생원, 진사에 급제하다.
○ 8월에 명경과(明經科)에 『역수책(易數策)』으로 장원 급제,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어 첫 벼슬길에 나아가다.
 
1565년(명종 20년) 30세
○ 봄에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옮기다.
○ 8월에 요승 보우와 외척 윤원형의 잘못을 상소하여 논박하다.
○ 11월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않다.
 
1566년(명종 21년) 31세
○ 3월에 다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다.
○ 5월에 동료와 함께『시국의 급선무 세 가지(時務三事)』를 상소하다.
○ 겨울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어 관청의 흐린 행습을 바로잡다.
 
1567년(명종 22년) 32세
○ 6월에 명종이 승하하자 퇴계 선생에게 글을 올려 국장을 의논하고 『명종대왕의 만사(輓詞)』를 짓다.
○ 10월에 기대승의 편지를 받고 답하다.
 
1568년(선조 원년) 33세
○ 2월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성균관 직강이 되다.
○ 4월에 장인 노경린 공이 별세하다.
○ 5월에 우계 선생과 지선(至善)·중(中) 및 안자(顔子)의 격치성정(格致誠正)에 대한 설을 논하다.
○ 가을에 명나라로 가는 천추사 서장관(千秋使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수도를 다녀오다.
○ 겨울에 돌아와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敎理)에 제수받고 지제교(知製敎)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이 되어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다.
○ 11월에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외할머니 이씨의 병환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내려가다.
 
1569년(선조 2년) 34세
○ 6월에 다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어 7월에 조정에 돌아오다.
○ 9월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올리고 동료와 함께 『시무구사(時務九事)』를 상소하다.
○ 10월에 임금에게 특별휴가를 얻어 강릉으로 가자 외할머니 이씨가 별세하다(90세).
 
1570년(선조 3년) 35세
○ 4월에 교리(校理)에 임명되어 서울로 돌아오다.
○ 8월에 맏형 죽곡(竹谷) 선(璿)이 별세하다.
○ 10월에 병으로 사퇴하고 해주 들마을(야두촌) 처가로 돌아가다.
○ 12월에 퇴계의 부음을 듣고 아우 옥산으로 하여금 조문케 하다.
 
1571년(선조 4년) 36세
○ 정월에 해주에서 파주 율곡리로 돌아가 이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다.
○ 여름에 다시 교리에 임명되어 불려 올라와 홍문관 부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弘文館 副應敎 知製敎 兼 經筵侍讀官)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 官)으로 옮겼으나 모두 사퇴하고 해주로 돌아가다.
○ 이때 학자들과 해주 고산(高山) 석담 구곡(石潭九曲)을 구경하고 은거할 계획을 세우다.
○ 6월에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임명되어 손수 『서원 향약(西原鄕約)』을 지어 고을 백성을 인솔하다.
 
1572년(선조 5년) 37세
○ 3월에 병으로 사퇴하고 서울로 올라오다.
○ 여름에 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율곡리로 돌아가다.
○ 이때 우계 선생과 이기(理氣),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도심(人心道心)을 논하다.
○ 8월에 원접사 종사관(遠接使 從事官), 9월에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 12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 홍문관 전한(弘文館 典翰)에 각각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다.
 
1573년(선조 6년) 38세
○ 7월에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어 병으로 사퇴코자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부득이 올라와 세 번 상소하여 허락을 받아 8월에 율곡리로 돌아가다. 거기서 『감군은(感君恩)』을 짓다.
○ 9월에 다시 직제학에 임명되어 올라오다.
○ 겨울에 동료들과 『옥당 진계 차(玉堂陳戒箚)』를 올려 재앙 없앨 방법을 논하다.
○ 그 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承政院 同副承旨 知製敎 兼 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 修撰官)에 임명되다.
 
1574년(선조 7년) 39세
○ 정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되어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올리다.
○ 3월에 병조참지(兵曹參知),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에 임명되다.
○ 4월에 병으로 우부승지를 사퇴하고 율곡리로 돌아가다.
○ 6월에 장남 경림(景臨)이 출생하다.
○ 10월에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황해도의 민폐를 개혁할 것을 상소하다.
 
1575년(선조 8년) 40세
○ 3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율곡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에 임명되다.
○ 9월에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올리다.
 
1576년(선조 9년) 41세
○ 2월에 율곡리로 돌아가다.
○ 10월에 해주 석담(石潭)에 청계당(聽溪堂)을 짓다.
 
1577년(선조 10년) 42세
○ 정월에 해주 석담(石潭)에서 가족들을 모아 놓고 『같이 살며 서로 경계하는 글(同居戒辭)』를 지어 읽히다.
○ 12월에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완성하고, 〈해주 향약(海州鄕約)〉과〈사창(社倉)〉을 의논하여 세우다.
 
1578년(선조 11년) 43세
○ 해주 석담(石潭)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짓다.
문헌서원(文獻書院)의 학규(學規)를 짓다.
○ 3월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올라왔다가 사퇴하고 4월에 율곡리로 돌아가다.
○ 5월에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로 사퇴하고 만언소(萬言疏)인 『응지논사 소(應旨論事疏)』를 지어 올리다.
○ 7월에 토정(土亭) 이지함의 상에 조문하다.
 
1579년(선조 12년) 44세
○ 3월에 『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를 짓고 《소학집주(小學集註)》를 완성하다.
○ 또 3월에 차남 경정(景鼎)이 출생하다.
○ 5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로 사퇴하고, 동서 붕당의 폐해를 깨끗이 하고 화합하여 오직 어진 사람을 등용할 것을 간청하다.
○ 7월에 『구용첩(九容帖)의 발문(跋文)』을 짓다.
 
1580년(선조 13년) 45세
○ 5월에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짓다.
○ 12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어 올라오다.
○ 이 해에 정암(靜菴) 조광조의 묘지(墓誌)를 짓다.
 
1581년(선조 14년) 46세
○ 정월에 상소를 올려 정사(政事)를 닦아 천재(天)를 방지하기를 간청하다.
○ 4월에 임금에게 청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책(救民之策)을 회의하게 하다.
○ 6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겸 예문관제학으로 승진되고 동지중추부사를 맡다.
○ 10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승진되고 조광조, 이황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건의하다.
○ 또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다.
○ 11월에 홍문관(弘文館)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에 임명되다.
○ 이 해에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다.
 
1582년(선조 15년) 47세
○ 정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다.
○ 7월에 어명으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김시습전(金時習傳)》과 《학교모범(學校模範)》및 사목(事目)을 지어 올리다.
○ 8월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다.
○ 9월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특진하고 의정부 우찬성(議政府 右贊成)에 임명되어 세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또다시 만언소(萬言疏)인 『진 시폐소(陳時弊疏)』를 지어 올리다.
○ 10월에 명(明)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극기복례설』을 지으니 사신들이 거듭 경탄하였다.
○ 12월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어 서도(西道)의 민폐(民弊)를 진달하다.
 
1583년(선조 16년) 48세
○ 2월에 『시급한 정책 여섯가지(時務六條)』를 계진하다.
○ 4월에 시국 구제에 관한 상소인 『진 시사 소(陳時事疏)』를 올리다(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는 공납(貢納)제도를 개혁할 것. 특히 서자들을 등용하고 또 노비들도 곡식을 바치면 양민으로 허락해 줄 것을 주장).
○ 또 4월에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유성룡 등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다.
○ 6월에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사임하고 율곡리로 돌아갔다가 7월에 다시 해주 석담으로 가다.
○ 9월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임명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다.
 
1584년(선조 17년) 49세
○ 정월 14일에 북방을 순무(巡撫)하러 가는 서익에게 『마땅히 해야 할 여섯가지 방략(六條方略)』을 최후로 진술하다.
○ 정월 16일에 서울 대사동(大寺洞: 현 인사동) 집에서 별세하다.
○ 3월 20일에 파주 자운산(坡州 紫雲山) 선영에 안장되다.
 
1623년(인조 원년)
○ 영의정에 추증되다.
 
1624년(인조 2년)
○ 문성(文成)이라는 시호(諡號)를 받다.
(문성(文成)은 도덕박문(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안민입정(安民立政)을 성(成)이라 함 :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라는 의미)
 
1681년(숙종 7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다.
(위차는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다음에 놓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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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정보
백과 참조
부모 : 신사임당
형제 : 이우
 
스승 : 어숙권
제자 : 조헌, 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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