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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박지원(朴趾源)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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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about 박지원


◈ (신규) 연표
1737년
2월 5일. 한양 서소문 반송방 야동(현재 순화동, 의주로2가 일대) 조부 朴弼均 댁에서 출생하다.
부친 朴師愈, 모친 함평 이씨 사이의 2남2녀 가운데 막내이다.
 
1752년 (영조28, 16세)
박지원 李輔天의 따님(전주이씨)과 혼인하고 이후 장인 이보천 및 처숙 李亮天에게 각기 孟子와 史記를 배우게 되었으나 이 해 10월 처숙 이양천은 소론계 영의정 李宗城을 탄핵하다가 흑산도에 유배되다.
 
1756년 (영조32, 20세)
(1) 20세 이후 수년간 金履素, 李弘儒, 韓文洪, 洪文泳, 黃昇源 등 과 북한산, 봉원사 등에서 과거공부하다.
(2) 이 해(20세) 겨울 봉원사에서 尹映에게서 許生 고사를 듣다.
(3) 이 무렵 李胤永, 李麟祥에게서 그림을 배우는 한편 이윤영에게서 『周易』을 배우고 이윤영의 아들 李羲天과도 교유하다.
 
1763년 (영조39, 27세)
金弘基를 찾아보게 하다(나중에 이를 소재로 「金神仙傳」을 지음)
 
1765년 (영조41, 29세)
이 해 가을 兪彦鎬, 申光蘊 등과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고 「叢石亭觀日出」을 짓다.
 
1766년 (영조42, 30세)
이 해 6월 洪大容을 위해 「會友錄序」를 써 주다.
 
1767년 (영조43, 31세)
서울 삼청동 백련봉 아래 李章吾의 별장에 세 들어가다.「士章哀辭」를 짓다.
 
1768년 (영조44, 32세)
白塔(현재 서울 탑골공원 내 소재) 부근으로 이사하다. 주변에 李德懋, 李書九, 徐常修, 柳璉(개명:柳琴), 柳得恭 등이 모여 살아 이 무렵부터 이들과 깊이 사귀다.
 
1771년 (영조47, 35세)
5월 친구 李羲天이 『明紀輯略』을 소지하고 있다가 처형되다. 이 일로 충격을 받고 박지원 한동안 사람들과 교제를 끊었고[「題李夢直 哀辭後」]개성, 평양, 천마산, 묘향산, 속리산, 가야산 등을 유람한 뒤 황해도 금천 연암협에 은둔할 뜻을 정하였다.
 
1772년 (영조48, 36세)
1월 무렵 가족을 경기도 廣州 石馬(돌마면, 현재 성남시 분당)의 처가로 보내고 박지원 자신은 서울 전의감동(현재 견지동)에 혼자 기거하면서 洪大容, 鄭喆祚, 李書九,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과 계속해 교유하다. 이 해 「楚亭集序」를 짓다.
 
1777년 (41세, 정조1)
洪國榮을 피하여 황해도 연암협으로 이사하다.
 
* 이 해 겨울, 유언호가 개성유수로 부임하자 개성으로 나가 金鶴洞 梁浩孟의 별장에 머물면서 개성의 청년들을 지도하다 (「金鶴洞別墅小集 記」).
 
1778년 (42세, 정조2)
3월 謝恩進奏使의 수행원으로 燕行하는 李德懋朴齊家를 전별하다.
 
1779년 (43세, 정조3)
3월 금학동에서 다시 연암협으로 돌아오게 되자 제자들이 따라와 배우다.
6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교서관 검서로 발탁되다 (1781년 奎章閣에 소속됨).
 
1780년 (44세, 정조4)
홍국영이 축출되자 서울로 돌아와 처남 이재성의 집(平溪: 현재 종로구 평동)에 머물다.
 
* 5월 25일: 진하별사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는 사절) 정사 박명원의 사행에 참가하다 (이날 謝陛: 출발 보고).
 
*10월 27일: 서울에 돌아와 복명하다.
 
1781년 (정조5, 45세)
7월 「醉踏雲從橋記」를 짓다.
*9월 「北學議序」를 짓다.
 
1783년 (정조7, 47세)
10월 湛軒 洪大容이 53세로 타계하자 손수 염을 하고 중국인 孫有義에게 부고를 보내다.
12월 (1) 홍대용의 장례가 청주에서 있었다.
(2) 박지원 「洪德保墓誌銘」을 짓다.
(3)「渡江錄序」를 짓다.
 
1788년 (정조12, 52세)
12월 선공감 감역 임기가 만료되다.
 
* 선공감 감역에 임명된 시기가 문제이다. 대략 1787년 봄 이후라고 여겨진다.
 
1789년 (정조13, 53세)
6월 평시서 주부로 승진하다. 가을 휴가를 얻어 연암협으로 돌아가다.
 
1790년 (정조14, 54세)
2월 의금부도사로 전보되다.
4월 경기도 개풍군 태조비 신정왕후 능을 관리하는 齊陵令으로 전보되어 이후 15개월 간 재직하다.
 
1791년 (정조15, 55세)
시 「齋居」를 짓다(제릉령 시절). 7월 교서관에 숙직하며 시 「次洪太和 秘省雅集韻」을 짓다.(이덕무, 박제가, [洪元燮: 자 太和] 참여). 8월 한성부 판관에 전보되다. 이 때 흉년으로 곡가가 폭등하였으나 곡가의 인위적 통제 정책에 반대하다.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다.
 
1792년 (정조16, 56세)
1월 (1) 경상감사에게 부임 인사를 하기 위해 大邱에 들르고 이 때 경상감사 鄭大容의 부탁으로 여러 의옥을 심리하고 소견서를 작성하다.
(「答巡使 論玄風縣殺獄元犯誤錄書」, 「答巡使 論密陽金貴三 疑獄書」, 「答巡使 論咸陽張水元疑獄書」, 「答巡使 論密陽 疑獄書」, 「答巡使 論咸陽疑獄書」)
(2) 임지 안의에 도착하다.
(3) 부임 이후 송사를 엄정하게 처리하고 관곡 횡령을 근절하며 도적을 퇴치하다.
*(4) 1월 삼종질 朴宗岳이 우의정에 제수되자 「賀三從姪宗岳 拜相因論侍 奴書」를 써서 축하와 더불어 노비 貢布의 과다 징수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하다(이와 관련하여 경상감사에게도 「答巡使書」를 보냄).
(5) 전각들을 짓고(「百尺梧桐閣記」, 「孔雀館記」, 「荷風竹露堂 記」) 담에 벽돌을 사용하다.
 
*10월 친구 金履素가 우의정에 임명되자 「賀金右相履素書」를 보내다(우상임명 축하하는 동시에 화폐 유통의 시정과 銀의 국외유출을 방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
 
1793년 (정조17, 57세)
1월 熱河日記로 인한 문체의 타락을 속죄하기 위한 글을 올리라 는 정조의 하교를 전달하는 南公轍의 편지가 임지 안의에 도착하자 답장을 보내다(「答南直閣公轍書」).
안의현에 흉년이 심하자 녹봉으로 개인적 진휼을 시행하다. 이 때 「答巡使 論賑政書」, 「答丹城縣監李侯論賑政書」, 「答大邱判官李侯 論賑政書」를 써 보내다.
봄~여름 이재성, 이희경, 박제가 등이 안의에 오다.
7월 「烈女함양박씨전 병서」을 짓다.
11월 제사를 엄격히 시행하라는 국왕 정조의 하교에 따라 신우를 정비하고 祀郭侯記」(정유재란 시 전사 郭䞭에 대한 기록)를 짓다.
 
1794년 (정조18, 58세)
3월 李麟佐란 때 죽은 李述原에게 정려기 내리자 「忠臣贈大司憲 李公述源 旌閭陰記」를 짓다.
이인좌란 때 죽은 慎克終 등을 위해 「居昌縣五愼祠記」를 짓다.
가을 (1) 差員으로 상경하다.
*(2) 특명으로 입시하여 안의현 및 연로의 농작 상황, 도내 민정 등에 대하여 보고하다.
(3) 혜경궁 홍씨 회갑연 경비 조달을 위한, 안의현 저치곡의 作錢을 거부하다.
겨울 전라감사 이서구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다(「答湖南伯」).
12월 제자 金箕懋와 박종의가 안의로 오다(이듬해 2월까지 체류).
 
1795년 (정조19, 59세)
(1) 「洪範羽翼序」를 짓다(안의 출신 학자 禹汝楙의 『洪範羽翼』 에 붙인 서문).
(2) 「咸陽郡學士樓記」, 「咸陽郡興學齋記」를 짓다.
(3) 「與咸陽光碩書」, 「與族弟彛源書」를 보내다.
 
6월 전라감사 李書九 영해로 유배되다.
*「與金右相書」(김좌상의 오류, 당시 좌상이던 김이소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李書九는 이 해 1795년 11월 해배되었고 이 해 12월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9월 「海印寺唱酬詩序」 (경상감사 李泰永을 수행하여서 가진 주연에 대한 기록) 「海印寺唱酬詩」, 「海印寺」(해인사 9경)를 짓다.
 
1796년 (정조20, 60세)
答族兄允源氏書」(청명절 박소 제사의 축문에 대한 오해에 관한 해명)를 보내다.
2월 유언호 타계하다(서울로 오는 도중에 부음 접함).
서울로 돌아온 뒤 북촌 桂山洞에 과수원을 사고 소옥을 짓다 (叢桂書塾 = 계산초당).
국왕 정조의 명으로 「炯菴行狀」(이덕무 행장)을 짓다.
이서구의 부탁으로 「楊經理致祭文」(명나라 장수 楊鎬 제문),
「邢尙書致祭文」(명나라 邢玠)을 짓다.
*10월 제용감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의금도사로 전보되다.
*11월 경종의 능 懿陵(경기도 고양군)의 令이 되다.
 
1797년 (정조21, 61세)
윤6월 沔川 군수에 임명되다. 군수 부임 인사로 국왕을 알현할 때 어명을 받아 임지에서 「書李邦翼事」표류기)를 지어 올리다.
 
1798년 (정조22년, 62세)
7월 충청감사 한용화의 후임으로 이태영이 임명되다.
천주교도 효유와 관련하여 「上巡使書」, 「答巡使書」를 짓다.
 
* 윤광석, 유한준 등이 『열하일기』 등과 관련하여 박지원을 비방(「答李仲存書」).
 
1799년 (정조23년, 63세)
3월 국왕 정조가 전년도(11월)에 내린 윤음 “勸農政求農書”에 응하여 『課農小抄』(연암협 시절 저술)에 안설을 붙이고 「限民名田議」를 부록으로 하여 올리다.
6월 천주교도 李存昌을 석방한 충청감사 이태영이 비방에 대해 자핵 상소를 올릴 때 초고를 지어주다(「監司自劾疏草」). 이와 관련하여 「答巡使書」 를 보내다.
 
1800년 (정조24, 64세)
8월 襄陽부사로 승진하다.
부임길에 서울에 올라와 정조의 혼전에 숙배하다.
9월 임지 양양에 도착하다.
도임 후 황장목의 폐단을 시정하다(「上巡使書」).
還政을 바로잡기 위해 녹봉으로 모자란 관곡을 충당하다.
 
1801년 (순조1, 65세)
칭병하고 사직하다(「上巡使書」).
 
2월 신유옥사 일어나다.
3월 제자 이희영이 金健淳과 함게 천주교도라는 명목으로 체포, 처형되다.
9월 尹行恁의 문인 任時發의 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윤가기가 처형되고 朴齊家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가다.
 
1805년 (순조5년, 69세)
10월 20일 辰時에 서울 가회방 재동 자택에서 서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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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음이어
[1942 ~ ]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호(號)는 우석(雩石)이다.
▣ 참조정보
백과 참조
조선 실학 (북학파)
 
 
자 : 박종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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