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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67년 (선조 즉위년)

6.28 * 명종 사망
* 선조 즉위(16세).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삼남. 하성군 균
 
- 선조 즉위 이후 사림의 정계 진출 활발
- 이 시기 부패한 구정치세력인 훈구파가 아직 권력 상층부에 포진. 이들과 경장을 부르짓는 사림파의 대립
 
7월 이황, 예조판서 겸 지경연사에 임명됨
- 선조 즉위 후 사림파의 대거 진출과 맥을 같이 함.
 
10월 기대승, 경연에서 기묘, 을사사화의 잘못을 정면으로 비판. 성리학의 정통 정립할 것을 주장.
- 조광조이언적을 복권하여 정몽주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전통을 세워야 함을 주장
- 조광조를 현사, 이언적을 현자, 이황, 김굉필을 현인으로 칭송
 
11월 이황, 김굉필과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을 현사로 평가하고 조광조 복권 주장
 
김장생, 율곡의 문하에 들어감(20세)
- 이 시기에 성학(聖學)을 터득하고 예학에 정통하게 되면서 율곡으로부터 특별한 기대와 촉망을 받음
 
 

2. 1568년 (선조 1)

4. 4 사간원, 조광조의 관직 복권과 문묘종사 청원
- 명종조와 선조 초년에 심의겸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선배 사립과 사림 정치 아래에서 새로 진출한 후배사림 사이의 대립.
- 선배사림: 이준경, 심통원, 민기, 홍섬, 홍담, 송순, 김개 등
- 후배사림: 이황, 노수신, 이이, 유희춘, 정철, 기대승, 이후백, 오건, 유성룡, 김우옹 등
- 명종과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권세를 휘두르던 권신정치세력의 패배,
 
4.10 선조, 조광조 칭송하는 전교 및 벼슬과 시호 내림
 
4.17 조광조, 영의정에 추증
 
9.21 선조, 이황에게 물어 조광조를 추증하고 남곤의 관직을 삭탈함.
 
12월 이황. 《성학십도》 편찬
 
? 남명, 《무진봉사》 올려 서리 망국론 제기
 
 

3. 1570년(선조3)

4월 관학 유생이 중심되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 사현의 문묘종사를 청함
- 이후의 논의는 이 문묘배향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
- 조광조 등이 주창했던 개혁의 내용은 상실되고 문묘 문제가 중심
 
5월 조정에서 조광조와 김굉필의 문묘종사 건의
- 문묘배향 문제는 무오사화에서의 좌절을 시작으로 하여 기묘, 을사사화에서 꺾인 성리학을 국가의 정식이념으로 확립하려는 운동의 일환으로 추진
- 조광조 문제는 단순한 복권이 아니라 조선왕조 성리학의 순교자와 성인으로서 숭앙하는 차원으로 확대
 
5.16 승정원에서 4현의 저서와 행장 수집하여 인쇄 배포 건의하고 선조는 이에 따름
 
? 정여립, 문과 급제(25세)하고 예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수찬이 됨
- 전주 출신.
- 이시기 이이,성혼의 문하에서 총애를 받았으나 이이 사후 동인으로 전향
- 이이와 성혼은 정여립의 과격하고 급한 기질을 병통으로 여기면서도 그의 박학다식함에 탄복하여 조정에 천거
- 수찬으로 있을 때 경연자리에서 이이를 비난함으로써 선조의 미움을 삼.
 
선조는 정여립을 사서(邪恕) 같은 인물이라고 멸시. 그러나 정여립은 세간의 비난에는 신경쓰지 않고 행동에 거침이 없어 따르는 무리들이 많음
 
11. 8 이황 사망(70세)
- 이황에게 현인,현사의 칭호를 주어 5현(조광조,이언적,정여창,김굉필)
 
? 청음 김상헌 탄생(~ 1650)
- 김극효의 아들, 김상용의 동생
 
 

4. 1572년(선조5)

2. 8 조식 사망(1501∼1572)
- 석달전에 발생한 등창으로 산천재에서 여러 제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경(敬), 의(義)에 관한 가르침을 외우며 사망
- 산천재 뒷산에 안장
- 사후 대사간에 이어 영의정에 추증
 
2월 이조전랑(문무관의 인사권과 언론권 장악)인 오건이 자신의 후임으로 신진 사림을 대표하는 김효원 추천
- 이조참의인 심의겸이 김효원이 윤원형의 식객이었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면서 분열
- 1576년 11월 마침내 완전 분열
- 김효원 : 이황의 문인으로 명망이 높아 많은 관료들의 지지 얻음
- 조선의 인사권은 이조에 있으나 판서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하여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추천권은 이조정랑(정5품)에게 줌
- 삼사의 인사권을 대신들의 손에서 독립시킴으로써 이들이 소신껏 감찰, 탄핵할 수 있게 함
- 이조정랑의 지위 보장 위해 이조정랑의 인사권도 대신으로부터 독립시켜 전랑 자천제 실시
 
5월 ? 명, 만력황제 즉위(10세). 정사는 재상 장거정의 손에서 나옴(왕명학파)
 
7. 7 선조 초반의 신구대신
구: 이준경, 심통원, 민기, 홍섬, 홍담, 송순, 김개
신: 이황, 노수신, 유희춘, 김난상, 이이, 정철, 기대승, 심의겸, 이후박, 신응시, 유성룡, 오건, 김우옹, 사림의 대표
 
7월 영의정 이준경, 사망 직전 선조에게 붕당의 위험 경고(동고유고)
- 당시 집권 사림이 선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이이를 중심으로 하나의 세력 형성하자 이를 우려한 것
- 동서 분당 이전에 이이는 전체 사림의 존경을 받던 인물. 자신의 정치 행태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며 이준경 비판. 사림이 장악한 삼사도 거들고 나서 죽은 이준경의 벼슬 추탈 주장함
- 유성룡의 반대. 삼사의 탄핵이 지나침을 공박
- 유성룡, 중용과 공존을 추구- 온건 남인
- 이준경은 훗날 이이를 비판한 일과 유성룡의 지지를 받은 일로 인해 영남지방에서 상당한 존경을 받음.
- 이준경의 후손인 이인좌가 영남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배경이 됨
 
? 영풍 이산에 이산서원 설립 - 이황을 받듬.
 
? 이이와 성혼의 인심 도심 논쟁 = 율우논변, 우율논변
- 주희와 이황 : 이기이원론의 입장에서 도심과 인심이 서로 다른 별개
- 기대승과 이이 : 이기일원론의 입장에서 이와 기를 분리할 수 없슴
인심과 도심을 한곳에서 나온 것으로 보느냐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으로 보느냐가 인심 도심 논쟁
- 이이와 성혼은 9차례의 편지를 왕래하면서 논쟁을 이어나감.
- 이이는 주희와 이황, 그리고 성혼이 인심과 도심을 절대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하여 양자를 상대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처음에 인심이었던 것이 도심으로 변할 수도 있고 도심으로 시작된 것이 인심으로 끝날 수도 있다고 주장. 즉 양자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님
- 이이는 군자도 타락하면 소인이 될 수있고 소인도 수련을 쌓으면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
 
10월 *대사간 허협, 향약을 실시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풍속에 맞지 않는다 하여 거절
*전 대사간 기대승 사망
 
 

5. 1573년(선조6)

? 안동 임하에 호계서원 설립. - 이황을 받듬.
? 도요토미 히데요시, 18만석을 받는 축전수(筑前守)로 임명되어 출세
 
 
 

6. 1574년(선조7)

2월 대신들이 향약 실시 주장하였으나 이이는 시기상조임을 주장
- 폐단을 구제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준 뒤에 실시할 것을 주장
- 선조는 이를 받아들여 향약 실시 중지 명함
 
3월 이이. [만언봉사]를 올려 민생들의 고통이 공물과 신역이 균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7월 김효원 이조전랑에 임명됨. 이후 김효원의 심의겸 공격 가속
 
? 도산서원 건립 (사적 170호)
 
 

7. 1575년(선조8)

? 을해당론: 사림의 분열(동인:서인)
- 김효원과 심의겸이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벌인 논쟁
 
김효원 : 이조전랑 내부의 동료추천제에 의해 추천받음. 새로 부상하는 신진 사림의 구심. 이발에 의해 추천
심의겸 : 동료추천제 방식 반대하고 상급자 추천제에 의해 자기 동생 추천
 
동인: 심의겸으로 상징되는 구 체제적 질서와 특권권력층을 사림정치에서 제거하자는 입장
서경덕, 이황, 조식 학파
 
서인: 외척이지만 사림을 보호한 심의겸의 공로를 인정
이이, 성혼학파
 
- 동서 분당이 현실화되자 이이는 이준경의 비판 수용. 그 부끄러움을 동서의 분쟁을 조정하는 것으로 갚는 데 진력을 기울임
- 이이에 의한 조정책이 실패
- 이이는 분열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분당의 당사자인 심의겸과 김효원을 외직으로 보낼 것을 주장하고 선조는 이를 받아들여 김효원을 함경도 경흥부사로, 심의겸을 개성유수로 보냄
 
- 동인, 김효원의 유배지가 오지라며 연일 상소. 또 다른 현안이 됨.
- 이이, 왕에게 주청하여 김효원을 삼척부사로, 심의겸을 전주부윤으로 옮기는 한편, 동인인 이발을 전랑으로 삼아 동인들의 반발을 무마하려 함
- 김효원 일파인 대간 허엽,박순 탄핵하자 박순은 자진하여 관직에서 물러남
- 이조정랑 문제에 이어 사림의 분당에 일조
 
*동서의 분열
김효원이 서울 동쪽에 있는 건천동(지금의 동대문시장터)에 살았기 때문에 그 일파를 동인, 심의겸은 서쪽의 정릉동에 살았기 때문에 그 일파를 서인이라 함.
 
- 동인 :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 젊은 사림 주축
동인의 영수 허엽, 유성룡,우성전,김성일,남이공,이발,이산해,허봉,이광정,이덕형,김우옹
 
- 서인 :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 노장 사대부
허엽과 대립하던 박순 및 정철,신응시,정엽,조헌,이귀,이해수,윤두수,윤근수,김계휘
 
- 중재의 대가로 이이가 치른 희생은 막대한 것.
- 동인과 그 갈래인 남인들은 이이가 죽은 후에도 이이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음
- 분당 초기에는 젊은 동인들이 서인들 공격하고 서인들은 이를 방어하는 양상으로 전개.
 
9월 이이. 《성학집요》 편찬
 
? 허엽, 경상도 감사
-당시 영천 군수로 있던 정인홍이 바치는 것이 부족하다 하여 허엽이 모욕을 주자 정인홍이 벼슬을 버림
 
 

8. 1576년(선조9)

11월 *사림이 둘로 나뉘어져 마침내 화합하지 못함
-허엽, 동인의 영수가 됨
 
* 신사무옥(1521년)이 송사련의 무고임이 밝혀져 송익필은 자신을 종으로 환천시키려는 안당의 후손들을 피해 황해도로 피신. 배천에서 생활함
 
12월 정인홍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으나 나오지 않음
 
 

9. 1577년(선조10)

? 사계 김장생, 해주의 석담에 있는 율곡을 찾아뵈었는데, 율곡은 이때 비로소 김장생의 수학기를 마감함
 
 

10. 1578년(선조11)

5월 *이이, [경연일기]에서 동인, 서인이 언급
 
* 정철,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낙향.(12월)
 
10월 윤두수 뇌물사건 =진도 군수 이수의 뇌물사건
- 윤두수 형제와 윤현에게 쌀을 뇌물로 주는 사건 발생하자 김성일과 허엽이 탄핵하여 이들을 국문함
- 윤두수는 대사헌과 대사간을 지낸 서인
 
 

11. 1579년(선조12)

3월 사헌부, 동서의 시비를 분별하여 심의겸을 소인이라고 배척하고 김계휘, 정철을 모두 사당이 라고 하여 시비를 가리려는 논의가 크게 일어남
- 이때 동인 세력이 정국 주도권
 
4월 이수의 옥사가 오래도록 성립되지 않음.
- 선조, 이수의 옥사 의심하여 이수 등 관련자 석방하고 이에 반발한 동인 승지 송응개를 파면
- 유성룡, 이발 등 동인, 이수의 옥사 성립시키려 무리하게 진행하다가 실패
- 그러나 윤두수는 명분이 중시되는 조선사회에서 정치적 타격.
- 부정부패를 공격한 동인에는 사실 여부를 떠나 많은 선비들이 가입
 
5월 *허엽을 경상감사에 임명함.
 
* 이이,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음.
- 상소하여 동서 분당을 논함. 동인이 서인을 공격하는 것이 너무 심하므로 동서를 타파할 것을 청하였는데 왕이 적당하지 않다고 함
 
* 대곡선생 성운 사망
 
6월 하삼도에 홍수. 함경도 가뭄 등 이변이 참혹하였으나 왕은 희정당을 더 넓히는 토목공사 시작
 
7월 *양사가 이이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음
- 동인들은 이이가 자신들을 도울것으로 믿었는데 도리어 상소하여 동인을 나무라고 책망하자 매우 분노
- 이 시기 오직 이이만이 양자의 조정을 위해 노력
 
* 송응형의 이이 탄핵.
- 백인걸의 상소 중 동서를 논한 대목을 이이가 대신 써 주었다는 것
- 사헌부에서도 이이 탄핵(기대정 등). 이에 백인걸이 왕에게 해명하자 왕은 양사를 모두 체직시킴. 양사가 비록 갈렸으나 새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이 된 자들이 계속하여 이이 헐뜯음
- 박순, 노수신, 김우옹 등의 만류로 이이 해치지 못함.
- 이후 동인의 입지 축소. 그러나 이이의 이미지 크게 손상
 
 

12. 1580년(선조13)

2월 허엽 사망.
- 색으로 병을 얻어 벼슬에서 물러난 뒤 상주에서 사망(경연일기)
 
? 정철,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 3년동안 강원도, 전라도, 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면서 시작품을 많이 남김. 가사 『관동별곡』과 시조 『훈민가』 16수가 이때의 작품
 
? 이항복 문과 급제
 
? 김장생, 파산에 있던 우계 성혼을 찾아 사사함
 
? 대사헌 정인홍, 이이에게 심의겸 탄핵 제의 -상중에 복직을 시도하였다는 이유
- 심의겸은 이때 예조판서에 제수되어 정계 복귀한 상태
- 이이는 탄핵 사유가 불명확하다고 거절하였으나 정인홍의 사직 및 이발 등의 반발로 결국 함께 탄핵 상소 - 심의겸을 희생시켜 동서의 융합 시도
- 후에 정인홍이 상소 내용에 심의겸의 붕당 혐의를 추가하면서 정철이 심의겸의 세력이냐의 여부를 둘러싸고 동인들과 갈등
- 정언 윤승훈의 이이 비판. 이에 이이 분노하여 윤승훈을 노골적으로 공격
- 선조는 젊은 관료가 대학자인 이이를 공격하는 것이 괘씸하여 윤승훈을 외직으로 내치자 동인이 반발하여 이이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여 동인들의 미움만 더 받음
- 얼마후 종실인 경안군 이요가 이조정랑의 삼사추천권과 전랑자천제가 붕당의 요인이었음을 들어 폐지 요청하자 선조는 이를 받아들임
- 이로 인해 동인들 타격.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된 이후 후임 전랑은 동인 후배를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
- 이를 계기로 동인의 세력 꺾이고 유성룡 등은 사직. 동인들은 이 사건 역시 이이가 경안군을 시켜 왕에게 고한 것이라고 여김
 
? 김육 탄생( ∼1658)
-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동지로서 함께 사사 당했던 우당 김식의 4대손인 김흥우의 맏아들
- 어려서부터 선조인 김식의 혁신적 이상정치에 대한 동경
 
 

13. 1581년(선조14)

5월 이이, 김효원을 사간에 임명토록 주장. 또한 동서의 구별 없이 인재 등용할 것을 요청. 유성룡, 한효순 등도 동조
- 나라에 가뭄이 심하여 흉년 들고 평안도와 황해도가 특히 심하였음
- 이에 이이는 경비를 줄일 것을 건의하고 방납의 폐단 지적. 이때 나라의 비축된 물자는 고갈 상태
- 이이, 차자를 올려 폐법을 변통할 것과, 공안(貢案)을 고칠 것과, 주현을 줄여 병합할 것과, 감사를 자주 교체하지 말고 오래도록 맡길 것과, 어진 이를 기용하여 인재를 진작시킬 것과, 붕당을 버리고 조정을 화합하게 할 것을 청함
- 종계(宗系)의 개정 문제로 명에 가는 주청사에 이이가 천거되었으나 박순, 이산해가 "이이는 조정을 하루라도 떠날 수 없다" 하여 김계휘를 주청사로 보냄
 
6월 이이, 대사헌에 임명
 
? 이이, 조광조와 이황의 종사 요청
이언적에 대하여는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이는 선조에게 영향을 줌
 
 

14. 1582년(선조15)

? 권율, 병과에 급제
 
? 조선족 출신의 명나라 장군 이성량, 여진 추장 아타이 죽여 명성을 높임
- 이여송의 아버지
- 이때 건주좌위의 추장 기오창가는 군사 몇십만을 거느린 집단으로 성장
 
6월 제주도에 명나라 사람과 서양인 표착
 
 

15. 1583년(선조16)

4월 선조. 성균관에 친행하여 알성시를 행함.
- 이이. 10만 양병설 건의
 
? 여진족 이탕개의 국경 침략. 이이는 병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물리치려다 병 얻음
- 현기증 사건
 
8.28 계미삼찬
- 이이를 공격하던 송응개, 박근원, 허봉이 도리어 간신으로 지목되어 유배
 
? 이순신, 두만강가에 있는 보루인 건원보에 종9품으로 부임
 
? 이성량, 명에게 반기를 든 해서여진의 근거지 고륵성 함락. 이때 명의 구원에 나섰던 건주여진의 기오창가와 그의 4째 아들 탁시가 죽음
- 탁시의 아들 누르하치가 건주좌위의 추장 승계
-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명과의 교역허가증인 칙서 60통을 대가로 줌
누르하치는 이것을 기반으로 명과의 교역을 독점하면서 엄청난 부를 쌓고 이는 건주여진의 군사적 성장을 위한 기초가 됨
먼저 부족 통합하는데 힘써 10년이 못되어 만주 남쪽 혼하 일대 석권하고 건주좌위 5부 통합
 
 

16. 1584년(선조17)

? 이순신, 아버지의 초상을 당해 아산으로 돌아감. 3년상
 
1.16 이이의 사망
- 이후 서인은 5~6년간 조정에 들어가지 못함. 동인 천하
- 정여립은 이런 동인 집권기에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1583)
- 전향의 이유: 선조가 정여립에게 이조전랑으로 임명하려는데 이이가 반대 명분만 따지는 서인에게 염증,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동인으로 옮김
 
겨울 정여립, 정승 노수신에 의해 천거됨
- 동인으로 전향하고 부터는 이이를 소인으로 매도하였으나 도리어 선조의 눈밖에 남
- 이발 이길 형제가 그를 천거하였으나 선조의 반대. 정여립은 고향인 전주 남문밖(현재의 완주군 상관면)에 내려가 동인과 유대관계 가지며 재기 노림.
- 그러나 그 이름이 알려진데다 집권 동인의 실세였으므로 감사나 수령들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음
- 거짓으로 학문 강론한다고 하며 무리 모음. 이후 황해도로 가서 변숭복,박연령,지함두 등과 비밀히 사귀며 음모 꾸밈
- 또한 전주,금곡,태인 등 마을의 여러 무사들과 공.사천 노비 등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계를 조직(= 대동계)하고 매달 활을 쏘는 사회(射會)를 열었는데 이 대동계가 모반의 증거로 채택됨
 
 

17. 1585년(선조18)

? 정철,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4년동안 작품활동
-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백에 임명되고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받은 뒤 오기마치 천황을 받들어 조정과의 관계 원만하게 유지
- 이후 일본의 권력은 관백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손에 좌지우지하며 전국을 평정함
 
 

18. 1586년(선조19)

? 이순신, 조산보 만호로 부임
 
? 신사무옥이 송사련의 무고임이 밝혀짐. 송익필 52세
- 안당의 증손 안노의 처 윤씨의 상소가 받아들여진 결과
- 안씨 집안의 송익필에 대한 보복
- 안감정이 원래 안씨 집안의 종이었다 하여 송익필을 종으로 환천시키려 하자 송익필은 도주하고 정철 등은 그를 보호
- 이발 등 동인들은 그를 환천시켜 서인에게 타격 주려 함
 
 

19. 1587년(선조20)

? 왜구가 전라도 손죽도 침범.
- 전주 부윤 남언경이 정여립에게 군사원조 받음
- 정여립은 대동계를 이끌고 공식적으로 출동해 왜구를 물리침.
- 대동계가 비밀조직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의 근거
- 국가 권력에 의해 반승인된 상태. 이미 지방관도 그 실체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
- 정여립은 무장세력을 전국적으로 확대.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 동지와 모사 얻음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통일사업 완성(구주 정벌)
- 주변 국가의 국왕들(명,조선 등)에게 입조 요구
 
9월 이순신, 두만강 국경지역에 배치되어 여진족 방비에 종사
- 두만강 입구의 녹둔도의 둔전관리 책임 겸임
- 이때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상관인 북병사 이일에 의해 백의종군을 강요당함(선조실록). 이때부터 1591년 유성룡의 추천으로 3계급 특진하여 전라좌수사로 발탁되기 전까지 한직을 전전
-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여진족을 무찌른 공을 칭찬함. 서로 모순되는 기록
 
9월 쓰시마 도주 소 요시시게의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 일행이 사절단으로 옴. 이들은 조선에 머물며 거만한 행동을 보이고 조선에 통신사 파견 요청하였으나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감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쓰시마 도주에게 계속 조선왕의 일본 입조 요구
 
 

20. 1588년(선조21)

? 누르하치의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혜산진으로 침입
- 만주지역의 여진족 통일
 
 

21. 1589년(선조22)

6월 일본 사절단 소 요시시게의 양자인 소 요시토모와 중 겐쇼 일행이 다시 와서 통신사 파견 요청.
- 허성: 통신사 파견 받아들일 것 주장. 전쟁 가능성 염두에 두고 이를 피하려면 파견해야 함
- 이황의 제자 : 오랑캐는 엄격하게 꾸짖어야 한다는 이황의 주장에 젖음
- 허성의 의견에 동조하여 조건부 파견 결정
즉 왜구의 우두머리와 적과 내통한 살포동, 그리고 조선의 포로 인도 조건
 
10. 2 정여립의 난 (기축옥사)
송익필, 조부의 고향인 황해도 배천에 가 있다가 정여립이 세를 모으는 것을 보고 자세히 조사, 사람을 시켜 고변케 함
-고변의 내용 : 대동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정감록의 참설을 이용하는 한편, 亡李興鄭設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 한강이 어는 때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반군을 서울에 투입해 신립과 병판을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
- 1521년의 신사무옥
-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그의 역모 고변하고 황해감사 한준이 비밀장계 올림
- 왕의 주재하에 삼정승, 육승지, 의정부 당상관 등 긴급 회동.
- 검열 이진길은 정여립의 생질로서 긴급체포됨
- 이발과 백유양 등은 정여립 두둔
- 이이의 제자들이 무고하였다고 주장
- 정여립은 변승복,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주. 관군이 포위하자 이들을 죽이고 자결함
- 한준의 장계에는 송익필 형제의 관련설
- 송익필이 꾸미고 정철이 주도해 나간 사건
- 정여립을 고립시키기 위해 정철이 계략으로 죽도로 유인하여 관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사망했다는 설
- 이산해, 정언신 등 동인은 고변이 부당하다며 송익필 죽이려 하였으나 대사헌 홍성민이 저지
- 선조, 동인들이 정여립과 짜고 자신을 제거한다는 의심하여 진상 규명 요구. 의금부 관원을 급파하였으나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여 자살함으로써 반란혐의를 인정. 동인들은 자신들과 무관함을 입증할 기회를 잃음
- 정언신이 위관이 되어 현장에서 체포돤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 국문. 한 달 동안 진상을 밝혀 내지 못하자 서인 백유함이 동인들이 정여립 사건과 관계 있다고 주장
- 선조, 노수신과 정언신 파직. 위관을 정철로 교체함
또한 성혼을 이판에 임명하는등 서인 중용하고 조헌도 귀양 해제하는 등의 조치로 서인 집권
- 최영경, 정언신 등 사망. 동인의 영수인 이발도 뚜렷한 연루 혐의 없이 조사중 사망. 이발의 팔순 노모와 어린 아들과 국문 중 사망
- 이발의 사망 당시 위관이 누구인가 하는 논쟁(유성룡 혹은 정철)은 훗날 서인과 남인 사이의 당론 격화시킴
- 당시의 수사기록인 기축옥안이 불타 없어져 진상 규명 어려움
- 정철은 이발을 변호하였으나 이발이 정여립과 연관되었음을 믿는 선조가 계속 문초케하여 사망에 이름
 
기축옥사 -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
북인 : 정여립 사건을 완전한 조작으로 봄 - 서경덕, 조식 계열
남인 : 국왕에 대한 역적모의와 군주의 기본적 권위를 인정
 
- 이를 계기로 서인 주도권 장악
- 서인의 실세 정철이 우의정에 임명되어 이사건의 조사관이 되면서 동인의 유력인사들을 가혹하게 처벌
- 1천여 명 사망. 전주지역 사대부들의 타격
정철은 위관을 맡으며 함께 수학했던 동문들마저 죽음으로 몰고 가 이 지역 사대부들의 저주를 받음
- 당대 가장 혁신적이었던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학자들의 대대적 희생
 
11월 조선, 일본에 통신사 파견 결정
- 정사(正使=上使)는 서인의 황윤길, 부사는 동인 김성일, 서장관은 동인의 허성. 문사인 차천로가 동행
- 얼마 후 소 요시토모가 왜구의 주모자와 살포동, 포로 160명을 이끌고 조선에 옴
- 선조는 이들에게 말을 내리고 축하잔치. 주모자와 살포동은 처형
 
? 조헌, 도끼 들고 상경하여 상소 = 技斧上疏
- 동인들을 비판하여 함북길주로 유배
 
 

22. 1590년(선조23)

3. 6 조선 통신사 일행과 일본 사신 일행 출발
 
4.29 통신사 일행 부산포 출발하여 쓰시마섬에 이름
- 통신사를 영접하는 정식 선위사가 오지 않아 1달쯤 머무름
 
6월 통신사 위해 국본사에서 잔치. 이때 소 요시토모가 교자를 탄 채로 문을 들어와 뜰 앞에 내리자 김성일이 무례하다며 잔치 거절
- 소는 다음날 교자꾼을 처형하며 사죄
 
7월 통신사일행 수도 경도에 도착. 소와 겐쇼가 따르고 있었으나 선위사 아직 보내지 않음
- 연로에는 백년 이상만에 오는 일행 보기 위하여 많은 인파 몰림
- 일행은 교토의 대덕사에 머물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접견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음.
그는 이때 동북지방 순찰 중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 돌아왔으나 새로 짓는 천황의 궁궐이 미완성되었다는 핑계로 접견 또 연기
 
10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궁궐행차에 초청되었으나 허성을 제외한 일행은 거절
- 허성을 체모를 잃었다며 질책
 
11. 7 4개월을 기다려 도요토미 히데요시 만남
- 도요토미는 임금을 뵙는 의식에 따라 좌석 배열. 일행을 무시한 오만한 행동 보임. 우호를 두텁게 하자는 국서를 전달하였으나 회답국서는 일행이 돌아가면 주겠다며 황윤길, 김성일에게은 400냥을 주고 일행에게는 선물을 주며 돌려보냄
- 일행이 도쿄를 떠나 사카이 포구에서 기다린지 보름만에 회답국서 받음
허장허세와 오만불손한 내용.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명을 정복할 터이나 조선이 먼저 항복해서 입조하라는 협박
- 도요토미는 이 글을 주며 비밀히 요시토모에게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이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도록 타일러 보라고 지시
- 일행은 이 글을 보고 경악. 일본을 상국으로 섬기라는 말과 조선을 제후로 취급하는 용어인 입조,합하,방물 등 6자 수정 요구
- 도요토미는 합하는 전하, 방물은 폐물로 고쳤으나 이조는 그대로 둠
- 일행이 부산포에 이르자 허성과 수행원 성천지는 정여립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 명령이 기다리고 있었음
 
? 도요토미 히데요시, 직속의 육,해군 편성하고 영주들에게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서약식 거행
- 일본을 8개 지방으로 나누어 영주들의 녹봉을 지정하고 그 녹봉에 따라 군사를 내게 함
- 조일전쟁을 앞두고 일사불란한 동원체제 갖춤
 
 

23. 1591년(선조24)

3월 통신사 귀국
- 황윤길이 침략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허성과 김성일의 수행원 황진이 황윤길의 의견에 동의. 김성일은 완강히 반대함.
- 동인 집권세력은 동인인 김성일의 의견 채택
- 선조, 황윤길의 말은 실세한 서인이 인심을 어지럽히려 하는 것이라 여겨 배척. 조정에서는 감히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함.
- 선조는 김성일의 벼슬을 올려주고 김성일은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추진되던 축성사업과 제반 방비책 중단케 함. 또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으로 진급시킨 것 비판
- 군관으로 수행하였던 황진은 분노를 참지 못함. 그는 일본의 침공을 확신하고 통신사 일행의 마음도 뚫어 봄. 김성일의 행동은, 일본의 답서에 명을 침범한다는 언급이 있은데도 한마디 항의도 못하고 받아왔다는 죄를 피하기 위하여 말을 꾸민 것이라고 지적, 임금에게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중지. 그는 뒷날 큰 공을 세우고 진주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
- 이때 쓰시마 도주가 죽고 소 요시토모가 도주가 되어 통신사 일행이 귀국할 때 겐쇼와 야나가다 노리노부 등을딸려 보내고 조선에서는 오억령을 선위사로 부산에 파견
- 겐쇼 일행, 오억령에게 중요 정보 제공. -내년에 일본이 조선에 길을 빌려 명에 들어갈 것
- 조선으로 하여금 정확한 실정을 깨닫게 하고 조선과 일본의 화의를 주선하려는 의도적 정보 제공
- 겐쇼, 김성일에게 조공길 주선 요청, 일본의 조선과 명과의 싸움 불사
- 조선에 명을 치기 위하여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 요구
김성일은 명과의 대의를 들어 타이르려고만 하여 조선과의 전쟁을 막아보려는 자신들의 노력이 좌절
- 조헌,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강력 주장. 방비를 서둘러야 한다며 동인 배척하고 서인 박순, 정철 등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가 유배
- 조헌은 도끼들고 옥천에서 상경하여 사흘동안 꿇어앉아 일인 사신을 참수하고 전쟁에 대비할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 겐쇼는 도요토미에게 조선의 방비와 민심 동향, 지리의 형세를 살피고 오라는 밀명을 받고 있었음
그들의 정보는 치밀하고 풍부하였으며, 쓰시마에서는 세세하게 지도를 작성
 
? 권율, 의주목사
 
? 누르하치, 압록강 일대의 통로 장악. 명과 조선의 교통을 단절시킴
명에서는 여진을 토벌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이성량을 해임
 
6월 조선과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느낀 요시토모, 단독으로 부산포 들어와 일본의 명 침입 경고. 조선과 일본의 화의를 요청하는 보고를 서울에 올림
- 조정에서는 이 보고를 오만하다고 팽개치고 회답도 주지 않음. 요시토모는 배에서 10여일 기다리다 한탄하며 돌아가 도요토미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비밀리에 간직하던 조선 지도 바침
 
? 이순신, 전라좌수사 부임. 현지실태 점검하자 형편없는 실상 보고 성지 구축, 무기점검, 군사 조련에 힘쓰는 한편, 거북선 건조에 온 힘을 기울임
 
? 조일전쟁 직전 양명학이 전파
- 이즈음 만력제는 양명학파를 정계의 중심으로 하고 주자학파는 소외시킴
 
? 세자건저 사건
-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에게 소생이 없어 공빈김씨의 둘째 아들 광해군과 인빈 김씨의 둘째 아들 신성군 중 왕위 계승을 누가 할 것인가
- 동서 대신들 모여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기로 합의하였으나 선조의 마음이 신성군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의정 이산해는 계략을 써서 광해군을 옹립 하려는 정철과 서인들을 제거하려고 함
- 이산해, 인빈 김씨의 아우 김공량을 불러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후 신성군 모자와 김공량을 죽이려 한다고 모함
- 세자 건저 자리에 이산해는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고 정철이 먼저 세자 문제 언급하며 광해군을 건저하자 선조 대노함. 유성룡은 묵묵부답
- 이 사건으로 서인정권 위기. 정철 진주 유배 후 강계에 위리안치- 동인 정권 장악
- 동인은 공격 수위를 높여 성혼 공격
- 정철 처벌 문제로 동인의 분열
 
* 정철 탄핵
- 정여립의 옥사를 지나치게 다루어 동인의 세력에 일격을 가한 정철의 죄를 논의 . 광해군 책봉을 건의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 진주 유배
- 신묘년의 세자책봉논의와 정여립 사건으로 동인 분열.
 
북인 : 정철의 죄상과 아울러 서인들 모두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강경파
이발, 이산해, 정여립, 최영경,정인홍 등 화담,남명 문인
의병장 많이 배출, 절의 중시, 강력한 척화 표방
 
남인 : 온건한 입장 표명
유성룡, 우성전, 김성일, 이성중, 이덕형 등 퇴계 문인
당시 이발이 북악산 아래, 우성전이 남산 아래 각각 거주하고 있었음.
 
 

24. 1592년(선조25)

 
2월 * 선조, 신립을 경기와 황해, 이일을 충청과 전라도로 보내 무기 점검 지시
- 신립의 횡포, 방비 소흘, 일본의 힘을 대수롭지 않게 여김
 
* 거북선 완성
 
3월 일본군 출동 준비. 병력 28만 1,840명. 육군은 1번대∼16번대까지 편성.
- 수군은 별도로 1만명 편제
 
3.20 2번대 나요야 출발. 1번대는 이미 출발하였음 뒤이어 3,4번대 출동
- 도요토미, 친히 3만의 군사 이끌고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나고야로 출발
그는 5월에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과 명을 통합하여 일본 도읍을 북경으로 옮길 계획
 
4.13 오전 8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나고야에 대군을 집결시키고 출정 명령
 
4.14 *새벽 일본군은 부산진을 완전 포위하고 성문으로 진격. 부산진 첨사 정발의 지휘 아래 군민은 처절한 항전을 하였으나 1백여 명의 사상자 내고 저녁에 성 함락
 
4.15 * 일본군, 부산과 동래 함락 후 중로,좌로,우로의 3대로 나누어 북상
 
*박홍, 뒤늦게 조정에 보고 올림
 
4.17 박홍의 보고를 전쟁 4일이 지난 뒤에야 보고 받았으나 선조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김
 
4.18 3번대 낙동강 하류 상륙하여 김해, 창원 함락. 추풍령을 향해 진격
 
4.20 *조정은 좌의정 유성룡을 총사령관인 도체찰사에 임명하고 신립을 도순 변사에 임명하여 방위토록 함.
 
* 서울에서의 대혼란. 백성들은 피란 준비. 고관들은 출근하지 않고 상황 파악. 선조는 활 잘 쏘는 내수사 소속의 종 200명을 봅아 처소 호위케 함
 
지휘관,병사,수사 모두 다 흩어지고 일본군은 경주, 영천, 밀양, 김해 등지에서 승승징구하며 서울 향해 진격
 
4.23 이일, 새재 넘어 문경,거쳐 상주 도착. 수령과 군사 모두 도망가고 텅텅 비어 있어 겨우 800여 명의 군사 모음
- 적군은 1번대, 낙동강 넘어 선산으로 진격, 새재쪽으로 방향 잡음
 
- 이일의 군사와 적군과의 야전. 이일은 도망가고 대패함
- 3열로 편성한 철포조(조총대)의 전법 최초로 선보임
 
4.27 * 조정의 명령서 이순신에게 전달. 편의종사의 권한 행사하게 됨
 
4.28 * 신립은 탄금대로 나와 평지에 배수진.
* 탄금대 전투에서의 패배 조선 최대의 전력이 완전히 궤멸
 
* 1번대는 충주성으로 들어와 마음대로 노략질
 
- 정기룡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방어선 무너짐
- 이제 한강 이남의 요새 모두 무너지고 호남 쪽의 군사만 온전
- 충주 전투의 패전 소식 듣고 파천 결정.
- 곧 소문 퍼져 언관과 종친들의 만류 요청- 선조는 이들을 거짓 위무
- 민심이 흉흉해지고 괴이한 소문과 비결의 글귀들 나돔
- 도성의 일대 혼란. 도성을 빠져나가는 자는 목을 베라는 명령 내려짐
- 신립의 형인 신잡, 왕세자 책봉 건의
 
4.29 * 세자 책봉하고 광해군 책봉식
- 영의전 이산해와 좌의정 유성룡의 추천
 
* 이일상주 전투에 이어 신립탄금대 전투에서의 패전으로 북상 저지 노력 실패
 
* 선조, 이양원에게 서울 사수 당부, 도원수 김명원에게 한강 방어의 책임
- 파천 반대하는 여론 들끓었으나 유성룡은 이미 대세가 결정되었다는 말로 입을 막음
- 호위 군사들과 종들 도망하고 백성들은 피란
- 유성룡이항복, 왕자들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군사 모집하자고 요청하자 선조는 이를 받아들여 왕자들을 함경, 강원, 황해 등 북쪽으로 보냄
 
4.30 * 선조, 백성들을 외면하고 서울 피난.
- 새벽, 폭우속에 사직과 종묘에 모셨던 신주를 앞세운 시종들이 출발
- 왕을 따르는 자는 겨우 100여 명
- 도성 안에는 이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떼지어 몰려들었으며, 종들이 앞장 서서 장혜원과 현조 방화하고 이곳에 보관중이던 노비문서 소각
- 한 패의 분노한 백성들은 경복궁,창경궁,창덕궁에, 다른 한 패는 홍문관 등 관아 건물에도 불질러 승정원 일기와 사초, 수많은 서적들이 없어짐
- 일부는 백성들을 괴롭혀 온 왕자 임해군과 병조판서 홍여손의 집으로 쳐들어가 방화.
적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서울은 쑥대밭이 됨
- 이현에 있던 광해군의 궁만 화제를 모면하여 광해군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을 알 수 있음
 
* 왕의 행차가 벽제에 이르자 일행은 잠시 역사에서 휴식. 이틈을 타서 시종과 벼술아치 일부 도망
- 밤에 임진강 나루에 이르러 서로 나룻배 타려다가 낙오자 더 늘어남
- 강을 건넌 다음 임진강에 있는 배를 모두 침몰시키고 강가에 있는 민가를 헐어 적군이 못 건너 오게 지시
 
*분소 관고(焚燒官庫) 사건
- 이순신, 원균 측 관할인 남해기지의 관고를 불태움.
- 전라좌수영 진영과 인접해 왜적의 수중에 넘어갈 경우 전라좌수영 방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
- 그러나 구역이 서로 다르고 왜적이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그 의도가 의문
- 이 사건은 원균과 이순신 양측에 두고두고 갈등의 불씨가 됨
 
* 파천중 성혼에 대한 이홍로의 무고 사건
- 어가 행렬이 성혼의 집인 파주를 지나게 될 때 이홍로성혼이 호종하지 못함을 거짓으로 꾸며 고함
- 이 일은 그가 죽고 1백년이 지난 후에도 동인들이 그를 공격하는 호재로 사용됨
- 전쟁중 서인인 이귀정인홍이 지방에서 불법을 저질렀다고 고변
- 정인홍은 서인 영수인 성혼 공격
- 선조는 조정의 서인들 모조리 내쫓음
- 간혼과 독철이라고까지 성혼정철 비난 - 서인의 몰락
- 이후 당쟁은 동인 내부에서 격화
 
* 고니시와 소, 여주의 남한강 건넘. 이어 양주의 북한강으로 진격
 
5. 1 새벽. 동파역에 이르러 겨우 밥을 먹음
- 저녁. 개성 도착. 백성들, 통곡과 지탄
 
5. 2 *서울 함락
- 선조, 대책회의 소집하여 책임자 추궁하자 언관들이 영의정 이산해를 서울을 버린 죄로 탄핵하고 선조를 그를 파직시킴.
- 유성룡을 영의정, 최흥원을 좌의정, 윤두수를 우의정에 임명하고 정철을 부름
- 곧이어 개성 백성들 모아놓고 개성 사수 밝힘
- 이때 선비들이 정철을 정승으로 삼고, 이산해, 김공량(후궁 출신인 인빈 김씨의 오라비), 임해군의 처벌 요구
 
* 2번대, 주민들의 영접 받으며 남태령 쪽의 한강 도착
 
5. 3 서울 함락 소식 듣고 선조 일행 개성 떠나 평양행
 
5. 4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군 출동
- 판옥선(2층구조 배로서 승선인원 최대 200명, 시속 25K)과 어선 합하여 85척(어부들 참여)
 
5. 7 *선조 일행, 평양성 도착. 대동문 앞에 백성들 모아놓고 평양 사수 다짐
 
- 경상전라 연합수군 옥포 도착. 적선은 50여 척
- 3시간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최초의 승리
- 적군은 거제도로 도주. 판옥선이 승리의 주역
 
- 적선 5척 맞이하여 불태움
- 연합수군은 창원의 남포 앞바다에 진
 
- 이순신, 진해의 고리량에 적선 정박 첩보 받고 출동하여 적선 13척 발견
- 적군의 일부는 육지로 올라가 약탈 중
- 연합수군은 적선 11척을 불태우고 승리
 
5월 중순 적군, 경기 용인, 죽산까지 진출
 
이 무렵 적군은 이씨 조선에 불만을 가진 조선사람을 향도로 부려먹음 (왜향도. 일군에 협조하여 정보 제공케하고 양곡을 염출하여 공급)
 
5월 *아군, 임진강에 방어선 구축. 12,000명의 전병력이 집결
 
5.13 가토, 2번대 이끌고 파주 거쳐 임진강 도착
 
5.19 3번대, 북상하면서 낙동강 중류 거점 확보하고 있을 무렵 합천에 은거하고 있던 정인홍이 의병 300여 명 모아 훈련시킴.
- 대부분 조식의 제자들
- 손인갑을 부장으로 삼음
 
5.20 선조, 평양에서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 다시 발표하고 분조 선언
 
5.27 원균, 적선 10여 척이 사천, 곤양 등지에 나타나자 이순신에게 연락
-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6/3일에 부산포 일대에 나가 공격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음
- 이억기는 약속날짜 기다리지 못하고 판옥선을 만든 정걸 등과 함께 배 23 척을 이끌고 노량진으로 출발
- 사천에 주둔한 400여 명의 적군과 12척의 적선 맞아 승리 거둠
 
* 처음으로 거북선 등장. 이억기는 등에 총상
 
5.29 임진강 패전 소식 듣고 선조는 명으로 유몽정을 사신으로 보내고 자신은 평양 떠날 준비. 먼저 왕비 등을 함흥으로 보냄
 
6월 * 평양성 함락
 
- 적선 12척 침몰시킴
- 조선인들이 적선을 타고 전투에 참여한 사실 확인
 
6.5 *거제도 당항포 전투
- 7일동안 거제도 서쪽 일대에서 적선 72척 침몰시키고 약 3만여 명 사살
- 승전 보고를 둘러싼 원균과의 갈등
- 두 차례에 걸친 해전 승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행을 좌절시킴
 
- 용인 문소산에서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이끄는 3만여 명의 관군이 1,600여 명의 적군과의 접전에서 참패. 권율 참여
- 전라도,충청도에서 모은 마지막 군사
- 이광은 파닉되고 권율이 그 자리 이음
 
6. 6 손인갑을 선봉장으로 하는 50여 명의 의병이 낙동강에 주둔한 일군 습격하여 100여 명 죽임
 
6. 8 1번대 선봉, 대동강 진입
- 겐쇼와 야나가와가 이덕형과 강화회담 하였으나 성과 없이 결렬
 
6. 9 선조, 윤두수에게 평양 사수 책임 맡기고 떠나려 하자 백성들이 길을 막고 소란
 
6.10 선조, 비밀리에 평양 떠남
- 백성들은 분노에 차서 창고를 털고 방화
 
6.11 *적군이 강원도 거쳐 함경도에 들어왔다는 보고 받고 선조는 의주로 도피하기로 하고 이덕형을 명에 청원사로 보내 구원 요청
* 세자에게 분조 지시
 
6.14 광해군의 분조 활동 (∼1593년 10월까지)
 
6.15 명군 최초의 선발대 1,029명 압록강 건넘(대조변이 인솔)
 
6.18 만력황제는 병부상서 석성(아내가 조선인이라는 설)의 건의에 따라 구원병 파병 결정
- 1차 파병. 선발대 1천여 명 왔으나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의주로 돌아감
- 뒤이어 명에서는 선조가 적과 내통하였다는 글을 보냄
 
6.22 선조 일행 의주 도착. 시종까지 40여 명. 어의 허준도 처음부터 동행
- 압록강을 건너 귀화하려고 하였으나 윤두수 등의 반대
명은 먼저 선조를 호위할 군사와 군비 2만 냥, 옥감 등을 행재소로 보냄
 
6.25 양대박, 남원 방면에서 의병 1,500여 명 모아 임실에 주둔한 적군 습격
 
6.30 손인갑 부대, 낙동강 하류에서 적선 습격. 손인갑 사망
- 최초의 순절자
- 1천여 명 사살하고 무기 노획하는 성과
- 지방에 출몰하는 적군 제약하는 효과 및 호남 의병 활동의 계기
 
7. 2 명의 병부상서 석성, 구원병 보내기 전에 조선의 내통설과 선조의 진위 여부 확인하기 위해 서일관 등 무장을 의주로 파견
 
7. 5 명의 구원병 3,500명 압록강 건어편에 집결
- 명군의 파병에 따른 반대급부
- 군지휘권 장악, 강화회담 주도, 조선은 군량 및 의복 조달하고 수송수단 준비, 약탈, 강간 등에 대한 처벌권도 명군이 가짐
 
7. 7 광해군에 의한 이천 분조의 활동 - 18일간
- 의병장 김천일 등 각 지방에 격문을 띄워 의병 봉기 당부
- 임해군순화군은 함경도 일대에서 활동
- 이후 김천일은 강화도에 머물며 광해군의 명령을 삼남 지방에 전파하는 역할 담당
 
7. 8 * 웅치(곰티재) 전투 - 진안과 전주 사이
- 전라도 진격 위해 안코쿠지(안국사 창건한 승려)가 지휘하는 적군과 맞서 김제군수 정당이 이끄는 군사 장렬하게 싸웠으나 패배
 
*이치 전투} 이치(배재) 전투 -금산에서 전주 방향의 진산에 위치
- 적군 사령관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다수의 병력과 권율, 황진 부대 1,500명과의 치열한 전투.
- 육지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 적군에 큰 피해 주어 이치를 넘지 못하고 금산성 안으로 들어가게 함
- 웅치를 넘은 적군은 전주 외곽 완산성 근처에 진출.
- 전주 지키던 이광 도주
- 웅치, 이치 전투로 적군의 전주 진출과 전라도 석권 막음
- 만경평야와 김제평야 보호
- 이후 금산이 적군의 거점
- 권율은 도망친 이광을 대신해 전라감사가 되어 전주 방비 책임
 
- 아군 1만명으로 적군 4만명 이상 죽이고, 적선 66척 침몰시키고 아군의 전선 72척은 전혀 피해 없었으며 18명 만이 전사
- 한산대첩의 패전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는 거제도에 성을 쌓으라고 지시하고 육군 증파
 
7. 9 고경명 의병부대 7천여 명 금산에 주둔한 적군과 싸워 패배. 고경명, 고인후 사망
- 재인과 광대 등 하층민의 참여
 
7.10 안골포 전투 - 부산포와 진해 중간
- 적선 20여 척 파손시키고 다수의 적군 사망
- 적군은 안골포에 집결해 있다가 100여 척을 이끌고 도망
- 이순신은 여수로 돌아옴
 
7.17 명의 원군 평양성 전투에서 대패
- 조명연합군, 적의 역정보에 속아 평야성 진입하였으나 역습당하고 후퇴하여 안주까지 도주. 안주에서 명군 철수
- 고니시에 의해 강화협상 제기
- 명의 대표 심유경이 평양에 와서 고니시와 강화조건 논의
- 조정에서는 대책 강구
- 병력 2만명 확보. 묘향산에서 수행중이던 휴정을 불러 승통을 삼고 승병 모집 지시
- 휴정은 전공 세우면 품계를 주라는 조건 내걸고 동의하여 승병 수천 명 모집
- 제자 의업을 총성으로 삼고 강원도는 유정, 전라도는 처영에게 맡김
 
7월 적군이 마천령 넘는다는 소문 듣고 임해군순화군은 회령으로 도망
- 2달 동안 두 왕자의 횡포로 함경도 민심 더욱 이반, 사방에서 叛民들이 들고 일어남. 적군에 투항하거나 벼슬아치들 잡아놓고 적군 맞이함
- 강원도에서 함경도 경흥에 이르는 길목에 5리마다 말뚝 박음 - 이덕형이 왕이 되고 김성일이 원수가 된다는 내용
 
7.18 2번대 마천령 넘음
- 북병사 한주함, 6진의 군사 이끌고 해정창(성진읍) 부근 전투
- 함경도 최대의 병력 무너지고 2번대는 주민들의 환영을 받아가며 경성 차지
- 2번대가 명천에 이르자 종 정말수 등이 반란 일으켜 관아를 배앗아 적군에 넘겨줌
- 2번대 회령 진입
- 유배자인 국경인과 그의 숙부 국세필이 두 왕자와 벼슬아치들을 잡아 가두고 적군에 항복. 가토는 이들을 경성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
- 이 지방의 아전들은 적이 주는 벼슬을 받고 협조. 종들은 향도가 됨.
일군은 싸우지도 않고 국경지대 접수
- 가토는 2번대를 길주에 주둔시키고 각 고을을 현지인에게 맡겨 다스림
여름 일본군, 풍토병과 모기 파리떼로 고생
- 장맛비로 조총이 무력화. 조선군의 계속되는 육격전술로 보급 차질
- 함경도가 적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남쪽에서는 반격전이 활발
 
7.24 권응수 의병부대 3,500명 영천성 공격
- 치밀한 작전계획과 화공법으로 적 1천여 명과 싸워 대승하고 말, 무기등 다수 노획. 아군 전사자 83명
- 5번대 군사 경주 지방으로 도망하였으나 의병에 밀려 퇴각 거듭
 
7.30 * 곽재우 부대
- 조식의 사위로 부호로서 재산을 모두 의병부대에 쏟고도 굼량미와 무기가 달리자 무력으로 토호 양반들의 창고를 털고 종들을 군사로 삼음
- 곽재우는 향도 등 부역자를 찾아내 처단하는 일부터 시작
- 붉은 비단옷을 입고 삿갓 쓰고 활동하여 홍의장군이라 불림
 
* 정인홍은 성주, 김면은 거창, 곽재우는 의령에 거점 확보하고 권율군에 막혀 전라도 진출 포기하여 금산에서 내려와 의령으로 진출하려던 안코쿠지 군을 맞아 대파함
- 초유사 김성일이 삼가 지역의 의병 지휘를 곽재우에게 맡겨 의령, 삼가 의병연합부대가 형성
곽재우군 4천여 명 낙동강 건너 현풍 진격. 적군은 현풍성 퇴각하여 창녕 쪽으로 도망
- 곽재우는 이어 의령, 현풍, 영산의 의병 규합해 이 지역을 장악
 
* 조헌 부대 1천명, 영규 부대 1천명(휴정의 제자로 승병이 의병에 가담한 최초의 부대) 의병 연합 부대 청주성 공격하여 점령
 
 
8. 1 관군, 평양성 보통문 앞 진출하여 적군 견제. 순찰사 이원익 지휘
 
8.2 적군 경주 거점
- 경주 외곽의 노곡에서 김호의 의병 부대와 접전. 김호 사망
 
8. 3 *거창에 주둔한 적군 계속 전라도 진입 시도
 
- 김면이 의병 3천명 모아 거창 공격 계획. 진주 판관 김시민에게 지원 요청
- 김면.김시민의 연합의병군, 거창의 사랑암에 주둔
- 적의 선제 공격을 막아내 승리로 이끌고 김시민은 진주로 복귀
 
8월 중순 조헌 . 영규 연합부대, 금산성 공격 위해 집결
- 조헌, 충청 감사 윤국형에게 협조 요청하였으나 윤국형은 의병을 관군에 편입시켜 자신의 지휘 받으라고 요구하여 타협을 보지 못하자 윤국형은 의병의 가족을 옥에 가두고 의병 모집 방해
- 1천명의 의병이 700명만 남고 흩어짐
 
8.17 조헌, 영규의 의견에 따라 전라감사 권율에게 편지 보내 금산성 공격 계획 알리고 협조 당부
- 조헌권율의 회신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진격 결정하여 금산성 10리 밖의 연곤평에 주둔
 
8.18 적의 선제 공격으로 치열한 전투.
- 조헌, 영규 사망. 700여명의 사상자 내고 패배. 적군은 성주 쪽으로 퇴각
- 여기서 조헌의 아들과 동생까지 전사
- 전투 후 조헌의 문인들이 유골을 모아 무덤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함
- 1603년 조정에서 조헌의 순의비 세움
 
8.20 경상좌병사 박진의 관군과 정세웅, 권응수가 거느린 의병 등 1만여 연합군이 경주 공격
- 아군 600 전사자 내고 안강으로 후퇴
 
8.21 영남.호남의 연합의병군이 성주 공격 위해 편성됨
-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와 화순의 최경회, 임계영 등이 무주에서 적군과 대치하다 적군이 성주로 올라오자 정인홍, 김면과 연합. 병력 25,000명
- 도체찰사 정철과 경상우도감사 김성일의 지원
 
8월 모리가 이끄는 적군 3천명 강원도 쪽으로 진출
- 안변에서 강릉, 삼척을 거쳐 울진 평해 석권하고 다시 원주 진출
- 원주 목사 김제갑은 치악산 남쪽의 영원 산성을 방어기지로 삼아 피란민 4천여 명을 모아 놓고 적군에 대비
 
- 적군 치악산 공격. 여러번의 진출이 좌절되자 결사대 수십명 보내 절벽을 기어올라 성벽에 구멍을 뚫고 돌진
- 치열한 전투 벌였으나 성안의 화살과 돌이 바닥나 김제갑은 전사하고 아군 무수히 사망
 
8.28 황해도 연안성 전투 (∼ 9/1)
- 초토사 이정암의 의병과 구로다군과의 전투에서 승리
연합수군 166척 부산의 적선 공격하기 위해 출동. 제포에서 출발하여 낙동강 하류 정박
 
8.30 적군 부산에 군사 집결. 진주성 공격 준비
- 장기간에 걸쳐 부산에 관가 수백채와 민가 300여 채 지어놓음
- 육군 1만명, 수군 8천명, 전선 430척
 
9. 1 연합수군 부산 공격하여 적선 100척 이상 파괴
- 이순신의 오른팔인 녹두 만호 정운 사망
 
9. 8 박진, 5천 군사 이끌고 다시 경주성 공격
- 경주의 화약무기기술자인 화포장(火砲匠) 이장손이 처음 만든 비격진천뢰 사용하여 위력 과시
 
9. 9 적군, 어둠을 이용해 남문으로 총퇴각
- 영천에서 경주에 이르는 적군의 보급로가 아군에게 장악
- 이 무렵 적군이 불국사와 양산 통도사에 불질러 수많은 문화재 소실
 
9.10 연합 의병군, 해인사에서 작전회의. 합천 고령 성주 방향으로 진격 결정
- 작전을 펼치기도 전에 개령에서 구원군으로 온 적군에게 습격당하여 후퇴
- 김성일은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출전하였다고 정인홍 질책하여 갈등
- 연합군의 압박작전으로 적군은 해인사까지 출몰하지 못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 온전히 보전
 
9.16 정문부, 지달원 의병부대의 함경도 경성전투
- 정문부, 경성에 들어가 의병 3천명 모집
- 적군이 경성 습격하자 격퇴시키고 부역자인 국세필과 국경인 등 처단
- 명천 북쪽 일대 회복
함경도 북쪽 주민들은 조선왕조에 강하게 반기 들었으나 정문부의 활약에 힘입어 점차 평정
 
9.24 적군, 진주성을 함락시켜 조선군의 거점 뿌리뽑고 전라도 진출하기 위해 2만 병력 김해로 집결
- 김해 출발하여 창원 진격. 이곳을 함락시킴
- 진주목사 김시민이 중심되어 진주성 방비
- 곽재우, 정기룡 등 경상도 의병과 최경회 등이 인솔하는 전라도 의병 합세
 
9월 누르하치, 조선에 원병 파견 제의
 
10월초 명의 심유경고니시 회담
- 조일간의 경계선을 대동강으로 하고 50일 간의 휴전 결정
 
10.3 적군의 진주성 공격
 
10.5 진주 대첩 (∼ 10/10)
- 의병들의 교란 작전으로 적 퇴각. 아군의 피해 크지 않았으나 김시민 사망
 
10월 심대를 경기 감사로 임명. 삭녕에 임시 감영을 두고 의병을 모아 서울 수복 계획.
- 간첩 성여해가 찾아와 의병 모집 자처. 서울 등지에서 정보 입수하여 적군에게 전달
 
10.16 이여송, 도독이 되어 구원병의 총지휘 맡음
- 심유경이 먼저 평양에 들어와 고니시에게 명의 결정 통고
- 빼앗은 토지와 두 왕자, 왕자의 신하를 돌려보내고 군사 철수 제의
- 고니시는 대동강을 경계로 한 분할점령안 제시하여 회담 결렬
 
10.18 이토, 삭녕으로 쳐들어와 심대 등 의병 400명 몰살
- 적의 정보전에 넘어가 서울수복 계획 실패
 
10.30 경성에서 적을 격퇴한 정문부는 길주 공격에 나서 적군 800명 죽임
 
12월 곳곳에서 작은 전투가 산발적으로 전개
 
12.10 명군 선발대 파견
 
12.16 왕릉 도굴사건
- 일본군의 서원(書員)을 맡아보던 최업이 일군 졸개 50며과 조선인 50명을 이끌고 양주의 강릉(명종의 능)과 태릉(문정왕후의 능)에 몰려가 능을 파헤침. 도굴 실패하고 다시 덕흥대원군(선조의 아버지)와 선릉(성종의 능), 정릉(중종의 능)을 파헤침. 후일 조일간의 큰 분쟁거리가 됨
 
12.25 이여송, 43,000명의 2차 원군 이끌고 압록강을 건넘.
- 선조는 의주에서 이들을 대접
 
12.28 * 명군, 평양으로 출발
* 조선은 김명원을 도원수로 삼아 8천명 규합하여 명군과 합세
-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빈이 인솔하는 1만명의 군사 및 휴정유정의 2,200명의 승병도 가세
 
* 유성룡, 안주에 머물며 준비, 고니시가 보낸 조선인 첩자를 적발하는 대로 처단하여 평양의 적군은 한동안 명군과 조선군이 내려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음
 
* 명군은 조선에 들어오자 마자 약탈과 강간
- 명군에는 포악한 남쪽의 군사(남병)이 많이 포함
 
12월 하순 권율의 서울수복작전
- 전라도군사 1만명 이끌고 북상하여 수원 아래의 독성산성(독산성)에 주둔
- 우키타 히데이에는 서울과 그 주변에 6만 병력 배치
- 권율은 교란작전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적은 서울로 퇴각
- 적군, 서울에 웅크린 채 부산과의 보급로 확보에 주력
- 권율, 북쪽 행재소와의 연락 통로 확보하자 곳곳에서 의병 봉기
 
 

25. 1593년(선조26)

1. 6 평양성 공격 - 공방전
 
1. 7 명군 평양성 포위
- 평양성 안에는 적군 15,000명과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이 방어 준비
 
1. 8 *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 순변사 이일, 휴정이 지휘하는 승병과 합세하여 평양성 공격
- 성문이 열리고 적군 밀리기 시작. 이여송은 성위로 올라가는 군사에게 5천냥 주겠다고 하자 군사들은 사기 올라 성벽을 기어 올라가고 적군은 을밀대 고지로 몰림
- 고니시, 전투 멈추고 퇴로 열어 줄 것을 당부하자 이여송은 이를 받아들임
- 적군 1만명 이상 사망. 일군에 협조한 조선인 1천명 포로
- 일본군은 성에 불을 지르고 도망
- 고니시 휘하의 일군은 남쪽으로 후퇴했고,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의 2만 병력은 고립됨
 
* 벽제 전투 패배
- 이여송, 일본군 추격하였으나 서울 북쪽 40리 지점인 벽제관에서 기습당함
- 개성으로 회군
- 고니시군 개성 거쳐 서울로 후퇴, 도중에 산의 나무들 모조리 불살라 명군의 진로 저지
 
* 벽제 전투 패배 이후 강화론 본격 대두
- 강화론의 배경 : 병의 참전 자체가 중국 본토를 전장으로 만들지 않고 조선에서 일본군을 저지하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짐
- 1월의 평양성 전투에서 이 목표가 이미 달성된 것으로 간주
- 막대한 전비 조달 문제 : 명군의 피폐한 군세
- 강화론이 병부상서 석성을 비롯한 명군 최고지휘부의 입장
 
* 명군 최고 지휘자인 경략 송응창과 그의 참모 원황과 양명학 토론
- 송응창과 그 휘하의 문인들로서 대부분 양명학의 본거지였던 절강, 산동출신
- 평양성 탈환 후 일본과의 강화 기다리는 동안 선조의 행재소에서는 이들과 조선 관료들과 양명학에 관한 토론 벌임
- 명의 학자들은 조선이 지나치게 주자의 집주(集註)에 매몰되어 있고 시부와 문장의 치중되어 있음을 비판
- 유성룡 등은 반대, 선조는 왕양명의 실질적이고 공리적인 학문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해보고 싶은 의사 표명하여 관심을 드러냄
 
- 양명학 수용학자 : 남언경, 이요, 장유, 최명길, 허균
- 유몽인, 이수광, 성진선, 차천로 등 탈주자학적 경향의 학자들이 이들 명지휘부의 양명학적 경향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
 
양명학 좌파: 허균에서 정약용, 박지원으로 이어지는 학통
양명학 우파: 장유, 최명길에서 최석정, 정제두로 이어지는 학통 강화학파
 
* 명군의 남병들 반란. 이들이 성 위를 먼저 점령했음에도 약속된 5천 냥을 주지 않자 반란 일으킴
- 이여송은 이들을 의주로 유인하여 1,300명 죽임
 
1.18 선조, 평양 수복 보고 받고 의주 떠나 남하함
 
1.25 이여송, 개성 수복하고 서울 탈환 준비
- 선발대 거느리고 임진강으로 진출
 
1.27 일본군, 벽제관 전투에서의 승리
- 고바야카와가 선봉이 되어 4만명 이끌고 출동하여 이여송군과 벽제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
이여송은 포위되어 죽음 직전에서 구출됨
- 적군은 명군 물리치고 서울로 퇴각
- 이여송은 임진강 건너 동파역에 이르러 만력제에게 교대 요청
- 유성룡의 설득으로 임진강에 3천명 병사 남겨놓고 개성으로 돌아감
- 함경도 남쪽에서는 의병과 관군이 합세하여 적 압박
- 길주성 포위하고 장기전
- 안변의 가토군, 길주 구원하러 출동하였으나 아군은 길주 수복함
- 1월말경부터 함경도 지방의 적군은 사라지고 고을의 행정이 회복
- 이여송은 평양으로 후퇴
- 전쟁의 교착화. 명의 전쟁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 강화협상론 대두
 
2월 권율, 독성 산성에서 지구전 펴며 서울 탈환 위해 병력을 행주 산성에 집결시킨 뒤 목책을 세워 진지 구축
- 전라도 위주의 군사 2,300명과 처영이 이끄는 승병 합류
- 변이증이 만든 신무기 화거(火車), 권율이 고안한 수거석포(水車石砲) 만들어 대비
 
2.10 이순신, 3월 초순까지 적군 수군 소탕작전
- 적군 사이에 유행병 돌고 접전을 피하는 바람에 큰 접전 없이 몇 달동안 전투 이루어지지 않음
 
- 적군 서울에 모인 3만여 병력 총동원하여 행주산성 공격.(가토군 제외)
- 성을 포위하고 9차례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관민승 일치의 방어에 성공
- 통진에 주둔하던 이빈이 배 두 척에 화살 수만개의 화살을 싣고 지원에 나서 성 안의 군민들 사기 오름
- 저녁까지 격전을 치른 끝에 적은 서울로 퇴각
 
* 가토, 두 왕자와 신하를 포로로 잡아놓고 모종의 흥정 도모
- 고니시와 경쟁. 고니시의 장기간 휴전 결정으로 명군에 충분한 시간 주어 그의 문책 예상하고 자신이 주도권 잡으려 함
- 명의 풍증영과 비밀 회담
두 왕자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대가 요구. 이후 가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 조건임을 내세워 강경 입장
- 두 왕자의 편지를 보내 강화 제의하였으나 그의 공작은 실패함
 
3.15 심유경, 고니시 회담
- 고니시는 명군이 철수하면 두 왕자 보내고 서울에서 철수한다고 제의
 
3월 *명의 경략 송응찬, 일군에게 대승을 거둔 권율에게 패문(牌文)을 보내 일군을 쳐죽인 것을 질책
- 이후 명군은 일군과의 교전을 포기하고 조선군에게까지 강요
- 조선의 주전론이 일본과의 강화협상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겼던 명군은 조선군에게 일본군과 전투 벌이지 못하도록 압력 행사
- 송응찬, 전비 마련대책으로 조선에 은광 개발 요구
- 정인홍도 상소에서 재정문제 해결 위해 은광 개발할 것과 시장 열어 물화 유통시킬 것을 주장
 
* 도요토미, 4월까지 세 번에 걸쳐 진주성 공격 지시
- 화의와는 관계없이 진주 거쳐 서쪽 진출하여 장기적으로 주둔할 거점 마련코자 함
- 이 지시에 따라 적군 부대 편성. 병력 37,100명, 예비병력 21,50명
 
4. 8 고니시, 서울 철수
- 용산 창고에 보관중이던 곡식 2만 석을 명군에게 넘겨주고 서일관, 심유경등 사신과 두 왕자, 그리고 신하 등을 데리고 감
- 조신인 부역자 1천여 명 함께 떠남
- 부상자, 병든 자 등 일군 잔류
- 명군은 아군에게 적군 추격 금지 명령
- 서울은 폐허더미. 굶주린 자 속출
- 명군이 활동 멈추고 잇는 동안 적군은 서울 주변에서 약탈행위
 
4.19 일군이 서울에서 퇴각할 때 조선군이 추격하려 하자 명군은 일군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후면에서 일군을 호위하고 조선군의 진격 차단
 
4월 광해군, 위험을 무릅쓰고 호남지방에 이르러 민심 수습하고 군민 격려
- 선조 대신하여 전시상황을 주도
 
5.16 이여송, 사용재서일관을 특사로 일본에 보내 도요토미와 강화 교섭
 
5.30 서울에서 철수한 적군 병력 10여만 명 부산 집결
 
6.6 권율, 도원수 임명
 
? 정철 사망
 
6.15 적군, 김해와 창원 거쳐 함안으로 진격
- 함안에 주둔하던 권율, 이빈, 선거이 등의 군사 남원으로 도피
 
6.16 적선 800여 척 전진 배치.
- 이순신은 수군을 한산도에 배치하여 적선의 길목 차단
 
6.19 제 2의 진주성 전투 (∼ 6/29)
- 진주성에는 군사 3,500명과 백성들 6만여 명
군사 동쪽에 집중 배치. 북문에는 김천일, 이종인 부대, 서문에는 황진부대, 촉석루 쪽에는 고성의 의병 배치
- 6/21일까지 공방전. 성 밑을 파내어 허물려 하였으나 실패
 
6.22 적군은 동문 밖에 흙산을 쌓고 공격.
- 황진이 이에 맞서 흙산 만들어 총통으로 적의 망루 파괴
 
6.23 적군, 성벽 파괴 시도 실패
 
6.24 동문과 서문 밖에 다시 흙산 만들고 조총으로 공격하는 한편 귀갑거 이용하여 성벽에 구멍뚫고 진출 시도
 
6.25 적이 서문의 성벽 뚫자 황진이 이를 발견
 
6.26 황진부대, 적이 뚫린 성벽으로 몰려들자 대기하고 잇다가 수백명 죽임. 이때 시체 속에서 숨어있던 적군이 쏜 총에 맞아 황진 사망
 
6.29 * 진주성에서의 패배
- 적군 돌격대, 귀갑거 이용하여 동문 성벽 무너뜨림. 곧이어 서문과 북문도 뚫리고 아군은 촉석루로 후퇴
- 촉석루 밑 남강 가 바위에 모여 무기를 강물에 버리고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 이종인 등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
- 동래성, 행주성 보다 더욱 치열한 전투
- 한 명도 남기지말고 도륙하라는 도요토미의 지시에 따라 백성들을 창고에 가두어 불살라 모조리 죽임
 
* 논개의 장렬한 죽음
- 승리 후 촉석루에서 축하 잔치
- 논개, 기생으로 위장하여 적의 가토군 소속 장수인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 안고 강물로 뛰어 들어 함께 죽음
- 논개는 장수 출신으로 장수현감이던 최경회가 관에서 돌보아 주던 중 그의 아내가 죽자 논개를 내실로 삼아 진주성까지 따라와 있었음
 
* 진주성 함락후 적군은 곡성, 고부 등지와 지라산 주변 등 넘나들며 노략질
- 경상도 해안 주변에 12개의 성을 쌓고 장기 주둔 계획
- 울산만 아래 서생포에서 시작해 입랑포, 기장, 동래, 부산, 김해, 가덕도, 안골포, 웅천, 거제도 등
 
? *전쟁도 평화도 아닌 상태의 지속. 명의 주둔 장기화 되면서 민폐 극심
 
* 명군에 의한 약탈, 강간, 폭행 등이 자행
- 많은 명군들이 결혼, 동거, 매춘 등의 형태로 조선여자들과 맺어짐
- 중국 상인들의 국내 유입 활발.
 
8. 6 도요토미, 일군 철수 명령
- 귀환 앞두고 두 왕자 풀어줌
- 가토는 울산에, 고니시는 웅천(김해)에 잔류
- 잔류 병력은 12개 성에 46,000여 명
- 이여송은 병력 3만명 이끌고 서울에서 철수하여 요동으로 감.
- 이 때 조선 여인들이 남장을 하고 명군을 따라감
- 부총병 유정이 명군 잔여부대 16,000명 지휘 맡음
 
8.30 * 선조는 강화 반대하고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아 수복 명령 내림
- 이후 강화반대론이 조정을 압도
 
* 귀순하는 적군 속출
- 이들을 다방면으로 활용. 훈련도감 등. 현지 활용 원칙
- 사야가는 가토 휘하의 장수로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전투 참여 하였다가 투항, 이후 많은 전공을 세워 선조는 그에게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주는 등 특별대우 나중에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움
 
* 각지에서 불만세력과 농민들의 저항
- 남원 주변의 저항세력 - 김희와 고파 세력 - 1년간 활동
- 지리산 일대의 임걸년 세력 - 3년간 활동
 
 
9월 *명, 조선의 조정이 강화협상에 반발하는 기미를 보이자 왕위교체설 흘리기 시작하며 광해군의 즉위 주장 제기함
- 명의 병부 즉방사 주사 증위방, 왕의 교체론 주장
- 선조의 무능에서 침략 초래 하였다며 광해군으로의 교체 주장
 
10.1 해주에서 한 달간 머무르던 선조 서울로 들어옴
- 궁궐이 불타 월산대군의 사저에서 조정을 꾸밈
- 광해군에게 백성들 안무와 군사 독려 지시
 
10.20 이여송 서울로 들어옴
 
11.19 광해군의 두 번째 분조 활동(∼ 1594. 8.25일까지 활동)
- 명, 광해군을 삼남지방으로 보내 명군을 지원토록 종용함에 따라 광해군은 남행 길에 오름.
- 윤두수, 이항복 등이 동행
 
12월 * 권율, 남원에서 저항세력에 대한 토벌전 벌였으나 실패
 
* 광해군 공주에 도착. 계속하여 전주로 향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 돌며 병사 모집 및 훈련시키고 군량을 수집하여 명군에게 공급함
- 선조는 병을 이유로 광해군에게 선위 의사 밝힘
- 대신들은 연일 선위 반대의 글 올림
 
* 정철, 강화에서 가난과 실의 속에 살다 사망
 
12월 송유진의 난(천안)
- 이지함의 서자인 이산겸을 수령으로 삼아 산악세력 규합하여 뚜렷한 목표 제시로 저항세력과 농민들의 호응 얻음
- 1/15 일을 거사일로 삼았으나 실패
- 송유진 세력은 청계산ㆍ지리산ㆍ속리산 등에 2천여 명 분포
반란군 중에는 양반과 포함 - 이들이 주도적 역할
- 송유진은 의병장 사칭하여 반란 세력 규합. 각 처의 세력과 모의하여 군사 이끌고 아산,평택의 무기고 습격
- 1/15 일 서을 진입 위해 전주에 밀서 보내 국가 전복 기도
- 조정에서는 밀서 모낸 날에 송유진 진압 위해 포고문 발표
- 충청병사 변양걸, 군사 인솔하여 온양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주모자 소재 파악 실패
- 진천의 무사 김응룡, 자신의 조카되는 홍각이 반란에 참여하였다는 소식 듣고 설득시켜 송유진을 꾀어내게 한 후 그 세력을 체포함
- 이 때, 광해군은 홍주에 머물고 있었으며 난이 발생하자 광해군은 난의 진압을 지휘함
- 송유진, 광해군에게 왕위 주장
 
? 호조의 권유로 납속사목(納粟事目)를 결정
- 납속책은 국가에 쌀이나 포를 헌납하면 그 액수에 상응하는 반대 급부를 주는 제도로 돈으로 양반직을 사는 것이 합법화 됨
- 납속을 모집하는 관리가 공명첩(空名帖)을 가지고 이름 쓰는 데를 비워두었다가 응보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이름을 써서줌
 
 

26. 1594년(선조27) - 임진왜란 3년

1.24 송유진 서울로 압송하여 국문
- 반란군에 가담하였다가 자수하여 공을 세운 홍응기 등 7인 입회
- 송유진은 우두머리가 자신이 아니라, 이지함의 서자 이산겸이라 함
- 국문결과 주모자는 송유진과 오원종(수원의 한의사)
이들은 통유문을 돌리고 군대명부를 작성하여 유춘복을 돌격대장으로 함.
평상시 암호나 중국어를 사용하여 비밀조직 확대해 나가다가 체포됨
- 이 난에 연루되어 16명 능지처참 당하는 등 모두 18명 처형
- 이산겸은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도에 갔다가 잡혀와 사형담함.
 
1월 심유경고니시, 가짜 항복문서인 渙茸硫 명에 전달
 
4월 유정가토의 회담
- 가토의 요구조건은 조선의 4도를 할양하라는 것
- 유정의 일화
 
5월 송응찬의 뒤를 이은 명의 경략 고양겸, 봉공론 제기
-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의식 주관함으로써 강화론의 결말 맺으려 함
- 명 조정에서는 봉공론자와 반대론자들의 대립
- 일본은 명과 조선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조건을 재시하며 강화 협상을 파탄으로 몰고감
 
6월 명, 직할통치론 제기
- 강화 반대론자인 계요총독 손광, 조선에 정동행성 설치하여 명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조선 통치할 것을 주장
- 유성룡등의 반대. 그러나 선조는 명의 둔전 경락 허락
- 이후 직할통치론이 수시로 제기됨
 
7월 유정심유경, 가토의 2차 회담
- 심유경, 가토에게 일본군 철수 요구하며 그에게 일본의 관백으로 봉하려 한다는 거짓말을 하여 고니시와 이간시키는 反間計 사용하여 효과
 
8월 유정의 부대 철수
- 조선인 560여 명이 명군을 따라가려고 시도
- 조정에서는 조선인의 중국 유입 금지를 명에 요청하였으나 효과 없었음
- 이들은 일부 대륙으로 들어 가기도 하였으나 입관이 저지되어 산해관 부근에서 머물러 사는 경우가 많았음
 
8.25 광해군, 서울 귀환
 
11.12 김응서, 고니시 강화회담
- 고니시, 명과 일본의 강화 요청
 
? 동인의 분열 가속화
- 이경전(이산해의 아들)의 이조전랑 추천 문제
- 전임 이조전랑인 남인 정경세(유성룡의 문인)가 이를 반대
- 이산해는 이를 계기로 유성룡 공격. 이후 북인이 실권
 
 

27. 1595년(선조28) - 임진왜란 4년

1월 명황제, 도요토미를 밀본의 국왕으로 삼는 책봉 허락
- 고니시에게는 도독을 주고 가토 휘하의 장수들은 빠짐
- 책봉사인 이종성, 양방형, 심유경 등 북경에서 출발
 
4.28 책봉사 일행 서울에 와서 4개월간 머무름
 
10월 이때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누르하치의 위협론에 대처하여 간첩 활용 방안 제시
 
11월 이종성 일본에 들어가고 심유경과 고니시는 나중에 입국
- 도요토미는 책봉이 아니라 명 공주의 후비 등 4가지 조건의 이행 요구
후금 내부의 사정을 정탐키 위해 신종일을 누르하치의 흥경노선으로 파견
 
 

28. 1596년(선조29) - 임진왜란 5년

2월 선조, 누르하치의 부하 가운데 국경 넘어와 산삼을 캐가는 자들을 죽이지 말고 사단을 피하라고 지시
 
3월 이때까지 명의 신종이 석성을 신임하여 강화협상 지속
- 그러나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들어갔던 책봉정사 이종성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급변
- 명조정에서 봉공론자들의 정치적 몰락
- 일본의 요구가 단순한 책봉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주전의 방향으로 돌아섰으나 책봉사 일행 수백명의 안전을 위해 부사 양방형을 일본에 보냄
 
6월 선조, 어전회의에서 이순신에 대해 회의적 발언
-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회의의 주제
 
7월 이몽학의 반역사건
- 부여의 도천사에서 중과 농민 규합
- 홍산, 임천 등 여러 고을 점령하며 관아 불태우고 부호 약탈
- 농민 및 군관들의 대대적 호응
 
7.10 이몽학부대 홍주성 및 수원까지 진출하여 홍주성에서 지열한 공방전
- 부하들에 의해 살해
- 김덕령, 그의 전공을 시기하는 무리들에 의해 반역군으로 몰려 선조의 고문으로 옥사
- 곽재우도 문초 당하였으나 풀려남
- 이덕형 연루되었으나 선조는 그를 오히려 위로함
 
8월 조선통신사 일행 부산 출발
- 황신과 박홍장 등 말직의 실무자로 구성
 
9. 2 양방형 일행,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하는 책서와 금인 전달
- 이에 분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한 재침 도모
- 도요토미, 자신이 제시한 7개 조항 관철시킬 방안 묻자 고니시는 전쟁 밖에 없다고 주장
고니시와 심유경에 벌인 4년간의 공작 종말
- 명에서는 지금껏 강화 추진해 오던 자를 모두 처벌
석성포 파직되고 심유경 체포 명령
심유경은 조선에 머물다 1597년 7월 체포되어 명에 끌려가 처벌
 
11월 조정에서는 밀본의 재침략에 대비. 영의정 유성룡의 청야작전 주장에 따라 새재, 추풍령, 죽령 등을 차단하고 복병 배치
- 전뱅 비용 마련 위해 종과 서자들에게 벼슬 팔고 면천 조치
 
? 이몽학, 무량사의 굴 속에서 중들과 모의 -무기제작하며 군대 모음
- 승려들과 무리들을 장군으로 임명. 문무관의 관직을 내리니 양반 자제들과 무사들이 많이 모임
 
 

29. 1597년(선조30) - 임진왜란 6년 (정유재란 1)

1월 정유재란
도요토미 히데요시, 14만 대군에게 출정명령(조선 잔류병 2만명 포함)
- 가토군은 서생포, 고니시군은 웅천에 주둔. 수군도 웅천에 주둔하면서 많은 선박 건조
- 고니시가 간첩 요시라를 보내 김응서에게 가토군이 다대포로 진군할 것이 라는 정보 줌
- 가토가 다대포에 도착하기 전 이순신은 출동 명령 받았으나 출동 거부 (출동하였어도 가토군과는 만나지 못했을 것)
- 선조, 이순신 체포 명령.
 
명, 일본군의 부산 상륙 소식 듣고 바로 파병 결정
이번에는 조선 구원이라는 측면이 아닌 명과의 전쟁으로 인식
 
2월 * 이순신 하옥과 이에 따른 2차 백의 종군
- 선조의 모진 고문
- 하옥의 원인
원균의 모함설
이순신의 모함설 및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선조의 어명을 어긴 죄
어명을 어긴 이유: 왜군의 정보전에 조정이 넘어간 결과
- 왜장 가등청정이 간첩 요시라를 이용하여 정보 흘렸으나 이순신은 자신을 잡을 계략으로 알고 출동하지 않음
-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려 하였으나 정탁의 요청으로 백의종군 지시
-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
 
* 이 무렵 고니시는 김응서와 협의하여 양쪽 군사들에게 전투 금지 명령 내리고 가토 유인하여 죽일 음모
 
3. 8 유정, 가토 찾아가 화의 교섭하였으나 가토는 여전히 왕자를 인질로 보내 도요토미에게 사례하라는 주장만 되풀이
 
4월 원균, 거제전투에서 패배 - 수군의 기반은 완전히 붕괴됨
 
7월초 새로 건조한 적선 600여 척이 부산에 정박하자 권율은 원균에게 공격 지시
- 원균의 명을 받은 배설은 전선 수십 척 잃고 패배
- 원균은 한산도의 운주당에서 애첩과 술로 세월 보내다가 권율에게 끌려가 곤장 맞음
 
7. 6 이몽학의 난 (홍산,부여)
- 서자로서 임란시 조련장관으로 종군. 무량에 머물며 훗날 반군의 선봉장이 된 한현등과 교우
- 이몽학, 약 1천여 명의 반군 동원하여 홍산현 습격. 현감은 투항함
 
7. 7 이몽학의 반군 정산 함락
 
7. 8 반군 청양 함락
 
7. 9 반군 대흥 함락. 이때 비로서 충청도 순안어사 이시발이 변란을 조정에 보고
- 반군은 3일만에 6개 고을 함락시키고 수만명의 백성과 아전들 가세함
- 이들은 각 고을의 군수를 끌어내 목을 묶고 조목(條目)을 받들게 하여 반군들 속으로 끌고감
- 인근의 백성들은 소문만 듣고도 반군에 투항
- 반란군은 김덕령ㆍ곽재우ㆍ홍계남ㆍ이덕형 등과 호응하였다는 소문 퍼뜨리자 온 나라가 동요
- 부여군수는 부하들이 무기를 반군에게 반출하는 알고도 묵인하며 모든 공문서를 바침. 서산 군수는 동생들 3명을 반란군에 협조케 함
- 이어 홍주목 공격. 홍주목사 홍가신의 방어태세에 밀려 덕산길로 후퇴
- 이때 이르러 이몽학을 따르던 무리들이 그를 불신하기 시작
- 부하 3인의 배신. 이몽학 죽이고 항복함. 반란군은 흩어지고 이몽학의 시체는 서울로 가져와 종로거리에 3일 동안 효수
- 한현은 면천군으로 도주하였다가 잡혀 선조가 친국한 후 능지처참
- 그는 심문 중 많은 사람들을 끌고 들어갔는데 김덕형만이 잡혀 고문사
- 한현의 아들은 당고개에서 교수형 당하는 등 모두 33명이 능지처참되고 홍산현은 혁파됨
- 역모에 관련되어 체포된 반란군의 수가 너무 많아 선조는 도원수 권율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현지에서 가담 정도에 따라 처벌하게 함.
 
7.14 원균, 부산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옻내섬(칠천도)으로 후퇴하여 결사항전 선언
- 적군 몰래 침투하여 원균이 탈 배를 둘러싸고 새벽에 방화
 
- 원균은 가까스로 살아나 적과 교전하였으나 전선 40척 배앗기고 도망하던 중 전사
- 적 수군 한산도 점령하여 통제사 군영 장악함으로써 적군의 남쪽 바닷길 트임
- 일본군의 움직임 본격화. 고니시와 우키타군, 사천,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진격
- 패전 보고받은 선조는 이순신을 통제사로 삼아 내려보냄
통제사에 재임용된 이순신은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은 고작 12척에 불과
 
8.13 남원전투
- 조명연합군이 고니시군 맞아 싸웠으나 패배
 
8.16 남원성 함락. 약탈 자행하고 만복사 방화
 
8.18 고니시군, 전주로 북상. 조명연합군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
 
8.25 뒤이어 가토군, 전주 입성
- 전주의 경기전에 보전되어 있는 태조의 초상과 실록을 전주 선비인 안의와 손홍록이 지게에 지어 내장산 용암굴에 숨겨 놓고 지켜 보존케 함.
- 전쟁 중 서울의 춘추관과 성주, 충주에 보관된 실록은 다 불타고 전주 실록 만 남아 1603년 이 전주본을 토대로 태조∼명조실록을 다시 인쇄
- 적군 11만 명은 이후 별다른 저항 받지 앟고 공주, 청주, 천안으로 진군
- 선조는 해주로 도망 갈 계획 세우며 평양에 주둔한 명군에게 출동 요청
- 명의 경리 양호가 1만명의 군사 거느리고 남하. 아군 7천명은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음
- 양호는 서울에 부임하여 경리아문 설치하고 조선의 병권 장악
- 선조와 대등한 예로서 접견
- 양호는 관해군에게 남방으로 진출하여 명군의 활동을 돕고 인심을 위로하여 수습하라고 지시하는 등 조선 국왕의 권한을 광범하게 침해.
인사권까지 관여
 
8.30 이순신은 군진을 이진(해남)으로 옮겼다가 다시 진도 벽파진으로 이동
 
9. 6 소사평(직산)전투
- 북상하는 구로다군과 남하하는 명군이 경기의 직산 부근 소사평에서 교전하여 구로다군 대파
- 적은 차격 입고 천안으로 후퇴. 서울 진격 포기하고 성주 쪽으로 밀림
- 적은 이때 극심한 식량난 청야작전이 성공을 거두고 있었음
- 적군은 후퇴하면서 전라도 쪽 진출 결정. 수군은 진도 통과하여 서해안 진출 시도
 
9.14 적선 선발대 55척이 명량으로 몰려오자 이순신은 명량 서쪽으로 군진 이동
- 이 일대의 피란민들을 육지로 올려 보내고 어선 100여 척을 위장하여 전선 곁에 배치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전투를 벌여 적선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사기가 꺽인 조선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
 
-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장악한 이순신은 보화도(寶花島: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음,
- 일본군,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0리에 성을 쌓고 주둔하여 장기전 대비하고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감
 
12.22 *울산전투
- 조명연합군의 총공세. 울산성 완전 포위하여 봉쇄작전 펼침
 
12.31 고니시군 등의 지원군이 울산으로 몰려 연합군은 최후 공세를 펼쳤으나 대패하고 퇴각함
- 적군은 이 승리로 1년간 느긋하게 철수 작전 펼칠 수 있었음
 
 

30. 1598년(선조31) - 임진왜란 7년 (정유재란 2)

1월 울산성 승전 보고 받은 도요토미는 장기 주둔 지시
- 적군은 전라,경상 연안 일대에서 노략질
- 누르하치, 다시 사자를 보내 원병 파견 제의
- 길가에 노포(노점) 설치 하라는 명의 요구 받아들임
 
2월 * 이순신, 고금도(古今島)로 군영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鎭)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시킴.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 수만가를 이루게 됨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 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정도로 성세 (?)
 
* 유성룡 파직.
 
4월 *적군, 지리산의 쌍계사, 칠불암, 연곡사 방화
 
8.18 도요토미 사망(63세). 회군을 명령한 유언이 비밀리에 진행
- 일본은 조선에 사자를 보내 조건부 철수 지시
왕자를 볼모로 하거나 해마다 공물 바치는 조건
 
9월초 명군의 사로병진의 진공작전
- 육상에서는 명의 유정의 추격전. 해상에서는 이순신과 진린이 퇴로 봉쇄
- 유정이 일본군의 뇌물공세에 매수되면서 일본군 소탕의 기회 놓침
 
9.22 명군과 김응서군 울산 공격. 가토군은 방어에만 주력
 
9.27 사천성 전투 - 명군 패배
 
10월 왜교성 전투 - 명군 패배
 
10월초 일본의 사자 부산에 도착하여 철수 지시 -11/15일까지
- 철수 직전 고니시와 명의 유정이 비밀 교섭
- 유정은 고니시에게 많은 뇌물 받고 퇴로 보장
- 진린과 이순신은 이 화의 인정하지 않음
 
11.11 적군의 총철수 결정
 
11.18 * 노량해전
- 가토, 울산에서 철수
- 이순신, 퇴각하는 고니시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동
- 고니시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시마즈, 군함 500여 척 이끌고 노량 기습
- 이순신은 약 5백척으로 구성된 조.명연합 함대를 이끌고 나감. 밤 10시
 
11.19 *이순신 사망. 새벽 불의의 유탄을 맞아 전사하고 일본군은 50여 척만 남기고 도망
- 군사들이 "사또"를 부르며 통곡하는 소리가 노량바다를 메움
 
11.20 고니시, 600여 척의 배에 군사 나누어 싣고 광양만 입구에서 노량의 반대쪽뱃길 골라 거제도로 도망
 
1123 고니시군이 부산으로 합류하자 사흘에 걸쳐 완전 철수
 
전쟁의 결과
* 국가 재정의 파탄과 극심한 사회변동
* 명군 22만 군사 동원, 수만 명이 주고 수백만 석의 양곡 소모
일군은 피해가 더 심하였으나 통계 부정확
* 농업생산력 저하
경지농지가 전쟁전 170만 결에서 30만 결로 축소
- 극심한 인구의 이동과 감소에 따른 결과
- 평안도와 함경도, 강원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거의가 피란 길에 오름
* 전쟁포로 수십만 - 일부는 서양으로 팔려감
* 문화재와 건축물의 파괴, 약탈
* 기독교 등 서양 문물의 유입
* 고추 유입
* 전쟁을 통해 은유입 활발해져 은으로 물자 조달하고 거래하는 것이 민간의 습속으로 굳어짐
 
 

31. 1599년(선조32)

3월 북인의 분열 (대북과 소북)
- 왜란 말기에 신진세력의 지지를 받은 북인 김신국, 남이공(=소북) 등이 기성 세력인 이산해, 홍여순(=대북) 등의 정국운영에 불만 토로
- 대북이 정국 주도하면서 홍여순의 세력 확대와 이에 대한 이산해의 견제로 다시 갈등
 
7.19 임진왜란 공신 책봉을 위한 심사
- 이조에서 도원수 권율의 추증을 건의하자 사관이 가혹하게 비판
몇 몇 전투에서의 패배, 피하는 전술 주로 사용, 칠량해전에서 원균을 내몰아 죽게한 것 등이 비판의 요지
- 그러나 5년후 공신 책봉에서는 1등공신에 포함
 
12월 사찰의 동철을 모아 전선과 총통 제조
 
? 소 요시토모, 전쟁 책임 문제로 조선과의 화의에 노력
- 1603년까지 몇 번에 걸쳐 828명의 조선인 포로 송환.
 
? 김장생, 필생의 역작인 가례집람을 완성(52세)
- 주자가례를 미완으로 간주, 여러 예기의 학설을 모아 조목별로 해석하여 보충, 조선 현실에 적합한 예론을 정립함
 
 
 

32. 1600년(선조33)

1월 공명첩을 발급하여 군비 보충
 
4월 이산해 지지하는 육북과 홍여순 지지하는 골북으로 분열
단천의 은 채글을 금함
 
6월 중전 사망
 
9.26 명군 철수 완료 - 약 8년 3개월 동안 주둔
 
? 퇴계집 완간. 이를 계기로 조목은 퇴계 문하의 수장으로 군림하게 됨
- 조목북인의 결합으로 사립들의 친북성향 강화
- 예안 일대에서의 북인 세력의 성장- 근거지가 됨
- 예안의 북인세력이 안동의 남인 세력 압도
- 영천 이씨 이덕홍 계열, 봉화 금씨 금난수 계열, 예안 김씨 김택룡 계열은 북인과 결탁한 대표적 세력들
 
? 첫째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 사망- 자식을 얻지 못함.
 
? 토정 이지함, 장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 발각되어 과거시험의 합격에서 취소되고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음
 
 

33. 1601년(선조34)

1월 명군 도망병이 무리를 모아 지휘관인 섭정국을 포박하고 병란을 일으키다가 조선 조정에서 군대 동원하여 진압
- 명군 도망병에 의한 민간 폐해 문제 - 평안도가 가장 심함
 
4월 조일전쟁 이후의 효녀와 열녀.충신에게 정표함
 
10월 서얼 허통을 금함
 
11월 시전에서 은의 사용을 금함
 
? 고니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반기 들었으나 패배하여 효수당함
 
 

34. 1602년(선조35)

3월 명의 사신 고천준, 조선에 와서 엄청난 양의 은 수탈
- 이후 명 사신에 의한 은의 수탈이 노골화
- 명 내부의 위기의 발로
당쟁 격화, 대외원정, 자금성의 대화재 이후의 복구사업, 황태자의 호화 결혼식 등에 천문학적 자금 소요
 
? 무당파인 유영경 등용
 
? 김제남의 딸을 왕후로 맞아들임. 인목왕후. 정명공주 낳음
 
 

35. 1603년(선조36)

2월 중강개시 설치
 
2.12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 정벌 세력을 타도하여 숙청하고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 시대를 열다
 
6월 2품 이상의 관료들 모여 동전 주조와 유통 문제에 대한 찬반 여부를 수의(收議)하였으나 반대하는 신료들이 더 많아 보류
- 이덕형, 유몽인 등 동전 주조와 대외무역의 중요성 적극 주장
 
 

36. 1604년(선조37)

3.19 무너져내린 왕조의 권위 회복 위하여 불탄 무묘 재건하고 석전제 거행
- 이 과정에서 성리학을 정통으로 확립하고 그 이외의 논의를 이단으로 배격. 조광조를 성리학의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새로운 힘을 얻음
- 성균관 유생, 5현의 문묘 종사 운동 재개.
- 그러나 선조는 이를 거부, 이언적에 대한 부정적 입장 때문
 
? 정인홍, 남명집 간행. 이언적, 이황 폄하
 
6.25 * 임진왜란 공신들에 대한 포상
- 호성공신 : 선조를 따라 다닌 공신 - 이항복 등
선무공신 : 무공을 세운 공신 - 이순신, 원균 등
정난공신 : 이몽학의 난을 토벌한 공신
 
* 유정, 일본에 강화사로 감
- 도쿠가와와 회담. - 조선 침략하지 않을 것임과 조선인 포로 3천명의 송환 약속을 받았으나 직접 데리고 오지는 못함
- 10개월 동안 성공적으로 두나라 사이의 관계 개선 위해 노력
 
 

37. 1605년(선조38)

? 조목 사망
 
 

38. 1606년(선조39)

- 선조, 영창대군에게 선위의 마음을 두고, 광해군의 세자 행위 부정
- 명나라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 거부하고. 선조는 그를 배척하며. 영의정 유영경을 중심으로 하는 소북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상황
- 영의정 유영경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불만을 알아내고는 영창대군 지지
- 당시 광해군은 명의 정식 승인을 받지 못한 세자
 
- 소북파 내에서도 유영경 반대하여 북인 분열
- 대북파 : 광해군 지지파 정인홍 등 ,
소북파 : 영창대군 지지파 유영경
 
4월 오대산과 태백산에 사고 재건
 
 

39. 1607년(선조40)

1월 조선 사절일행 504명 일본으로 건너감
 
3. 3 선조, 처음으로 병석에 누음
- 광해군에게 선위하고 자신은 섭정토록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영의정 유영경이 반대
- 인목대비가 언문교서를 내려 왕세자에게 섭정토록 종용하였으나 유영경은 이것도 반대
 
허균. [홍길동전] 지음
 
5. 6 유성룡 사망
-이 때까지 북인이 퇴계학파의 발생지이며 남인의 본거지인 안동. 예안을 잠식하며 퇴계학파의 기반을 흔들고 있었음
 
겨울 선조의 병세 악화
- 왕위 이양을 둘러싼 대립
- 광해군을 지지한 정인홍, 이경전, 이이첨을 유배 보냄
 
? 우암 송시열 탄생(~ 1689)
- 충남 옥천군 구룡촌
 
 

40. 1608년(선조41)

1.18 정인홍, 유영경을 탄핵하는 상소 올리자 선조는 정인홍을 반역자로 몰아 유배 조치. 이 때 이이첨, 이경진도 함께 유배
 
선조의 죽음 직전 조정의 위기
- 원시임(原任, 時任) 7대신을 불러 유명 전하려 하였으나, 유영경이 저지
- 선조는 광해군에게 전위하는 대신 영창대군의 안전을 보장 받으려 함
- 유영경, 선조 독대하여 세자 광해군에게 전위하라는 유언 듣고 전교 받기를 거부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전위교서를 집에 감추고 소북인 병판 박승종과 공모하여 군사 동원하고 대궐을 포위. 조정에 일촉즉발의 위기. 쿠테타 상황
- 전위교서 감춘 것이 발각되어 정인홍, 이이첨이 선조에게 유영경의 처벌 주청하였으나 선조의 죽음으로 이루어지지 못함
 
2. 1 선조 병세 악화. 사망
- 당시 어의는 허준
- 선조 독살설 : 인조반정 후 반정세력들이 조직적으로 유포
- 유언장 공개 - 형제들간의 우애 강조하는 내용
- 유영경, 인목대비 찾아가 영창대군 즉위시키고 수렴 청정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인목대비광해군을 즉위시킨다는 언문 교서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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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명종 > 14. 선조 >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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