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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임진왜란(壬辰倭亂)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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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규)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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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89년(선조22) - 임진왜란 3년전

6월 일본 사절단 소 요시시게의 양자인 소 요시토모와 중 겐쇼 일행이 다시 와서 통신사 파견 요청.
- 허성: 통신사 파견 받아들일 것 주장. 전쟁 가능성 염두에 두고 이를 피하려면 파견해야 함
- 이황의 제자 : 오랑캐는 엄격하게 꾸짖어야 한다는 이황의 주장에 젖음
- 허성의 의견에 동조하여 조건부 파견 결정
즉 왜구의 우두머리와 적과 내통한 살포동, 그리고 조선의 포로 인도 조건
 
11월 조선, 일본에 통신사 파견 결정
- 정사(正使=上使)는 서인의 황윤길, 부사는 동인 김성일, 서장관은 동인의 허성. 문사인 차천로가 동행
- 얼마 후 소 요시토모가 왜구의 주모자와 살포동, 포로 160명을 이끌고 조선에 옴
- 선조는 이들에게 말을 내리고 축하잔치. 주모자와 살포동은 처형
 
 

2. 1590년(선조23) - 임진왜란 2년전

3. 6 조선 통신사 일행과 일본 사신 일행 출발
 
4.29 통신사 일행 부산포 출발하여 쓰시마섬에 이름
- 통신사를 영접하는 정식 선위사가 오지 않아 1달쯤 머무름
 
 
6월 통신사 위해 국본사에서 잔치. 이때 소 요시토모가 교자를 탄 채로 문을 들어와 뜰 앞에 내리자 김성일이 무례하다며 잔치 거절
- 소는 다음날 교자꾼을 처형하며 사죄
 
7월 통신사일행 수도 경도에 도착. 소와 겐쇼가 따르고 있었으나 선위사 아직 보내지 않음
- 연로에는 백년 이상 만에 오는 일행 보기 위하여 많은 인파 몰림
- 일행은 교토의 대덕사에 머물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접견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음.
그는 이때 동북지방 순찰 중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 돌아왔으나 새로 짓는 천황의 궁궐이 미완성되었다는 핑계로 접견 또 연기
 
10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궁궐행차에 초청되었으나 허성을 제외한 일행은 거절
- 허성을 체모를 잃었다며 질책
 
11. 7 4개월을 기다려 도요토미 히데요시 만남
- 도요토미는 임금을 뵙는 의식에 따라 좌석 배열. 일행을 무시한 오만한 행동 보임. 우호를 두텁게 하자는 국서를 전달하였으나 회답국서는 일행이 돌아가면 주겠다며 황윤길, 김성일에게은 400냥을 주고 일행에게는 선물을 주며 돌려보냄
- 일행이 도쿄를 떠나 사카이 포구에서 기다린지 보름만에 회답국서 받음
허장허세와 오만불손한 내용.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명을 정복할 터이나 조선이 먼저 항복해서 입조하라는 협박
- 도요토미는 이 글을 주며 비밀히 요시토모에게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이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도록 타일러 보라고 지시
- 일행은 이 글을 보고 경악. 일본을 상국으로 섬기라는 말과 조선을 제후로 취급하는 용어인 입조,합하,방물 등 6자 수정 요구
- 도요토미는 합하는 전하, 방물은 폐물로 고쳤으나 이조는 그대로 둠
- 일행이 부산포에 이르자 허성과 수행원 성천지는 정여립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 명령이 기다리고 있었음
 
? 도요토미 히데요시, 직속의 육,해군 편성하고 영주들에게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서약식 거행
- 일본을 8개 지방으로 나누어 영주들의 녹봉을 지정하고 그 녹봉에 따라 군사를 내게 함
- 조일전쟁을 앞두고 일사불란한 동원체제 갖춤
 
 

3. 1591년(선조24) - 임진왜란 1년전

3월 통신사 귀국
- 황윤길이 침략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허성과 김성일의 수행원 황진이 황윤길의 의견에 동의. 김성일은 완강히 반대함.
- 동인 집권세력은 동인인 김성일의 의견 채택
- 선조, 황윤길의 말은 실세한 서인이 인심을 어지럽히려 하는 것이라 여겨 배척. 조정에서는 감히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함.
- 선조는 김성일의 벼슬을 올려주고 김성일은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추진되던 축성사업과 제반 방비책 중단케 함. 또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으로 진급시킨 것 비판
- 군관으로 수행하였던 황진은 분노를 참지 못함. 그는 일본의 침공을 확신하고 통신사 일행의 마음도 뚫어 봄. 김성일의 행동은, 일본의 답서에 명을 침범한다는 언급이 있은데도 한마디 항의도 못하고 받아왔다는 죄를 피하기 위하여 말을 꾸민 것이라고 지적, 임금에게 글을 올리려 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중지. 그는 뒷날 큰 공을 세우고 진주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
- 이때 쓰시마 도주가 죽고 소 요시토모가 도주가 되어 통신사 일행이 귀국할 때 겐쇼와 야나가다 노리노부 등을딸려 보내고 조선에서는 오억령을 선위사로 부산에 파견
- 겐쇼 일행, 오억령에게 중요 정보 제공. -내년에 일본이 조선에 길을 빌려 명에 들어갈 것
- 조선으로 하여금 정확한 실정을 깨닫게 하고 조선과 일본의 화의를 주선하려는 의도적 정보 제공
- 겐쇼, 김성일에게 조공길 주선 요청, 일본의 조선과 명과의 싸움 불사
- 조선에 명을 치기 위하여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 요구
김성일은 명과의 대의를 들어 타이르려고만 하여 조선과의 전쟁을 막아보려는 자신들의 노력이 좌절
- 조헌,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강력 주장. 방비를 서둘러야 한다며 동인 배척하고 서인 박순, 정철 등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가 유배
- 조헌은 도끼들고 옥천에서 상경하여 사흘동안 꿇어앉아 일인 사신을 참수하고 전쟁에 대비할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 겐쇼는 도요토미에게 조선의 방비와 민심 동향, 지리의 형세를 살피고 오라는 밀명을 받고 있었음
그들의 정보는 치밀하고 풍부하였으며, 쓰시마에서는 세세하게 지도를 작성
 
? 권율, 의주목사
 
6월 조선과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느낀 요시토모, 단독으로 부산포 들어와 일본의 명 침입 경고. 조선과 일본의 화의를 요청하는 보고를 서울에 올림
- 조정에서는 이 보고를 오만하다고 팽개치고 회답도 주지 않음. 요시토모는 배에서 10여일 기다리다 한탄하며 돌아가 도요토미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비밀리에 간직하던 조선 지도 바침
 
? 이순신, 전라좌수사 부임. 현지실태 점검하자 형편없는 실상 보고 성지 구축, 무기점검, 군사 조련에 힘쓰는 한편, 거북선 건조에 온 힘을 기울임
 
? 조일전쟁 직전 양명학이 전파
- 이즈음 만력제는 양명학파를 정계의 중심으로 하고 주자학파는 소외시킴
 
* 정철 탄핵
 
 

4. 1592년(선조25) - 임진왜란

2월 * 선조, 신립을 경기와 황해, 이일을 충청과 전라도로 보내 무기 점검 지시
- 신립의 횡포, 방비 소흘, 일본의 힘을 대수롭지 않게 여김
 
* 거북선 완성
 
3월 일본군 출동 준비. 병력 28만 1,840명. 육군은 1번대∼16번대까지 편성.
- 수군은 별도로 1만명 편제
- 1번대장-고니시, 2번대장-가토, 3번대장-구로다, 4번대장-모리 요시나리
- 고니시, 사위인 요시토모와 함께 마지막으로 조선왕의 입조 요구
 
3.20 2번대 나요야 출발. 1번대는 이미 출발하였음 뒤이어 3,4번대 출동
- 도요토미, 친히 3만의 군사 이끌고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나고야로 출발
그는 5월에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과 명을 통합하여 일본 도읍을 북경으로 옮길 계획
 
4.13 오전 8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나고야에 대군을 집결시키고 출정 명령
- 오우라 항구에 정박해 있던 700여 척의 배에 18,700여 명의 병사들 조선을 향해 진군
- 오후 5시 1번대 부산포 앞바다 도착
-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절영도 옆으로 상륙
- 응봉의 봉수대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봉화로 보고
 
4.14 *새벽 일본군은 부산진을 완전 포위하고 성문으로 진격. 부산진 첨사 정발의 지휘 아래 군민은 처절한 항전을 하였으나 1백여 명의 사상자 내고 저녁에 성 함락
 
* 일본군 일부는 곧바로 동래성 아래에 있는 서평포(사하면)와 다대포를 습격하여 점령
- 이때까지 원균이 이끄는 수군은 나타나지 않음
 
4.15 * 일본군, 부산과 동래 함락 후 중로,좌로,우로의 3대로 나누어 북상
 
*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좌병사 이각은 도망치고 동래부사 송상현과 군민 2천여 명의 결사항전에도 전원 사망하고 패배
 
*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동래산 뒷산까지 접근하였다가 물러감
 
* 박홍, 뒤늦게 조정에 보고 올림
 
4.17 박홍의 보고를 전쟁 4일이 지난 뒤에야 보고 받았으나 선조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김
- 봉수체계의 허술로 응봉 봉수대의 침입보고가 서울까지 연결되지 않아 조정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음
- 계속되는 보고로 비로서 대책회의 소집
-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남쪽으로 파견 결정
- 병조에서 군사 300명을 뽑아 순변사에게 보냈는데 그 절반이 건달과 아전과 유생 조경을 경상우도 방어사로 삼아 내려보냄
- 조경은 군사 500명 확보하고 거창에서 무장 정기룡과 합류하여 추풍령에서 방어선 구축
 
4.18 3번대 낙동강 하류 상륙하여 김해, 창원 함락. 추풍령을 향해 진격
 
4.20 *조정은 좌의정 유성룡을 총사령관인 도체찰사에 임명하고 신립을 도순 변사에 임명하여 방위토록 함.
- 이일은 기마군관 60명만 이끌고 남쪽으로 떠남
- 선조, 김성일 소환. 그가 잡혀서 직산에 올 때 다시 경상도 초유사로 삼아 민심을 진정시키라는 명을 받고 겨우 살아남
 
* 서울에서의 대혼란. 백성들은 피란 준비. 고관들은 출근하지 않고 상황 파악. 선조는 활 잘 쏘는 내수사 소속의 종 200명을 봅아 처소 호위케 함
 
* 원균, 노량진으로 도망하고 우수영의 많은 무기 폐기 지시
- 전선 100여 척과 무기들이 바다 속에 던져지고 거제도의 백성들은 아수라 장. 원균의 수군 1만여명 해산 조치
- 부하 몇 명과 전선 4척을 이끌고 곤양에 상륙
지휘관,병사,수사 모두 다 흩어지고 일본군은 경주, 영천, 밀양, 김해 등지에서 승승징구하며 서울 향해 진격
 
* 경상감사 김수의 지시에 따라 영남의 수령들은 군사들을 대구에 집결시키고 이일이 내려오기를 기다렸으나 이일은 서울에서 꾸물거리며 내려오지 않음
 
4.23 이일, 새재 넘어 문경,거쳐 상주 도착. 수령과 군사 모두 도망가고 텅텅 비어 있어 겨우 800여 명의 군사 모음
- 적군은 1번대, 낙동강 넘어 선산으로 진격, 새재쪽으로 방향 잡음
 
- 이일의 군사와 적군과의 야전. 이일은 도망가고 대패함
- 3열로 편성한 철포조(조총대)의 전법 최초로 선보임
 
* 고니시, 강화할 의사가 있으면 4/28일 까지 이덕형과 만날 것을 제의
 
* 이덕형, 자청해서 강화 사절길에 오름
- 서울 벼슬아치들 사이에서는 일본이 이덕형을 왕으로, 김성일을 수상으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 나돔
 
? 이순신, 경상도 지원 허락 요청 장계 올림.
- 여기서 적을 막지 못한 책임을 원균에게 돌림
 
4.27 * 조정의 명령서 이순신에게 전달. 편의종사의 권한 행사하게 됨
 
* 신립, 충청도에서 8천의 군사 모아 충주의 단월역에 군사 주둔
- 새재의 천연요새 버리고 들판에서의 기마전술 채택
 
4.28 * 신립은 탄금대로 나와 평지에 배수진.
 
* 적군 1번대 - 문경에서 바로 새재 넘다
2번대 - 장기에서 출발해 영일, 안동, 풍기를 함락시키고 1번대와 합류하기 위해 새재쪽으로 진격
 
* 고니시, 충주에서 이덕형 기다림
- 이덕형은 조정의 명을 받들고 경기쪽으로 내려오고 있었음
- 그 뒤 적군이 승승장구 올라오자 강화 포기
 
* 1번대, 충주에 들어서면서 마을 불태우고 닥치는대로 인명 살상하고 곧바로 탄금대로 내달어 삼면 포위
 
* 탄금대 전투에서의 패배 조선 최대의 전력이 완전히 궤멸
 
* 1번대는 충주성으로 들어와 마음대로 노략질
 
- 정기룡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방어선 무너짐
- 이제 한강 이남의 요새 모두 무너지고 호남 쪽의 군사만 온전
- 충주 전투의 패전 소식 듣고 파천 결정.
- 곧 소문 퍼져 언관과 종친들의 만류 요청- 선조는 이들을 거짓 위무
- 민심이 흉흉해지고 괴이한 소문과 비결의 글귀들 나돔
- 도성의 일대 혼란. 도성을 빠져나가는 자는 목을 베라는 명령 내려짐
- 신립의 형인 신잡, 왕세자 책봉 건의
 
4.29 * 세자 책봉하고 광해군 책봉식
- 영의전 이산해와 좌의정 유성룡의 추천
 
* 이일상주 전투에 이어 신립탄금대 전투에서의 패전으로 북상저지 노력 실패
 
* 선조, 이양원에게 서울 사수 당부, 도원수 김명원에게 한강 방어의 책임
- 파천 반대하는 여론 들끓었으나 유성룡은 이미 대세가 결정되었다는 말로 입을 막음
- 호위 군사들과 종들 도망하고 백성들은 피란
- 유성룡이항복, 왕자들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군사 모집하자고 요청하자 선조는 이를 받아들여 왕자들을 함경, 강원, 황해 등 북쪽으로 보냄
 
* 원균의 지원 요청공문 이순신에게 보냄
 
4.30 * 선조, 백성들을 외면하고 서울 피난.
- 새벽, 폭우속에 사직과 종묘에 모셨던 신주를 앞세운 시종들이 출발
- 왕을 따르는 자는 겨우 100여 명
- 도성 안에는 이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떼지어 몰려들었으며, 종들이 앞장 서서 장혜원과 현조 방화하고 이곳에 보관중이던 노비문서 소각
- 한 패의 분노한 백성들은 경복궁,창경궁,창덕궁에, 다른 한 패는 홍문관 등 관아 건물에도 불질러 승정원 일기와 사초, 수많은 서적들이 없어짐
- 일부는 백성들을 괴롭혀 온 왕자 임해군과 병조판서 홍여손의 집으로 쳐들어가 방화.
적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서울은 쑥대밭이 됨
- 이현에 있던 광해군의 궁만 화제를 모면하여 광해군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을 알 수 있음
 
* 왕의 행차가 벽제에 이르자 일행은 잠시 역사에서 휴식. 이틈을 타서 시종과 벼술아치 일부 도망
- 밤에 임진강 나루에 이르러 서로 나룻배 타려다가 낙오자 더 늘어남
- 강을 건넌 다음 임진강에 있는 배를 모두 침몰시키고 강가에 있는 민가를 헐어 적군이 못 건너 오게 지시
 
*분소 관고(焚燒官庫) 사건
- 이순신, 원균 측 관할인 남해기지의 관고를 불태움.
- 전라좌수영 진영과 인접해 왜적의 수중에 넘어갈 경우 전라좌수영 방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
- 그러나 구역이 서로 다르고 왜적이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그 의도가 의문
- 이 사건은 원균과 이순신 양측에 두고두고 갈등의 불씨가 됨
 
* 파천중 성혼에 대한 이홍로의 무고 사건
- 어가 행렬이 성혼의 집인 파주를 지나게 될 때 이홍로성혼이 호종하지 못함을 거짓으로 꾸며 고함
- 이 일은 그가 죽고 1백년이 지난 후에도 동인들이 그를 공격하는 호재로 사용됨
- 전쟁중 서인인 이귀정인홍이 지방에서 불법을 저질렀다고 고변
- 정인홍은 서인 영수인 성혼 공격
- 선조는 조정의 서인들 모조리 내쫓음
- 간혼과 독철이라고까지 성혼정철 비난 - 서인의 몰락
- 이후 당쟁은 동인 내부에서 격화
 
* 고니시와 소, 여주의 남한강 건넘. 이어 양주의 북한강으로 진격
 
5. 1 새벽. 동파역에 이르러 겨우 밥을 먹음
- 저녁. 개성 도착. 백성들, 통곡과 지탄
 
5. 2 *서울 함락
- 선조, 대책회의 소집하여 책임자 추궁하자 언관들이 영의정 이산해를 서울을 버린 죄로 탄핵하고 선조를 그를 파직시킴.
- 유성룡을 영의정, 최흥원을 좌의정, 윤두수를 우의정에 임명하고 정철을 부름
- 곧이어 개성 백성들 모아놓고 개성 사수 밝힘
- 이때 선비들이 정철을 정승으로 삼고, 이산해, 김공량(후궁 출신인 인빈 김씨의 오라비), 임해군의 처벌 요구
 
* 2번대, 주민들의 영접 받으며 남태령 쪽의 한강 도착
- 도원수 김명원은 싸우지도 못하고 임진강으로 도주
- 가토는 한강 연안에서 이틀 머무르며 도성의 동정 살피다가 문이 열려있자 아무 저항 없이 입성
- 1번대와 2번대 거의 동시에 서울 무혈 점령하고 뒤이어 3,4번대도 입성
- 일군, 종묘 불태우고 처음에는 약탈행위 않다가 점차 포악
- 향도를 이용하여 정보 제공케하고 이에 의해 잡힌 자들을 무참히 살육
 
5. 3 서울 함락 소식 듣고 선조 일행 개성 떠나 평양행
- 백성들, 개성을 떠나는 왕의 어가에 돌 던지며 적의(敵意) 표출 =어가행렬 막은 시위사건(개성 남문루)
- 호조판서 홍여순은 난민들에게 구타당하여 허리 다침
- 어가는 멈추어서 백성들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 없음.
- 백성들, 정철 석방 요구
- 서인 윤두수를 좌상으로 삼고 이산해 파직 후 귀양.
- 정철 유배에서 풀려나 평양으로 왕을 찾아옴.
- 전란중에 백성들의 요구로 집권당이 교체되는 조선 역사상 초유의 사태
 
5. 4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군 출동
- 판옥선(2층구조 배로서 승선인원 최대 200명, 시속 25K)과 어선 합하여 85척(어부들 참여)
 
5. 5 원균과의 약속장소인 당포 도착
 
5. 6 원균 도착. 경상우수영의 배는 5척
 
5. 7 *선조 일행, 평양성 도착. 대동문 앞에 백성들 모아놓고 평양 사수 다짐
 
- 경상전라 연합수군 옥포 도착. 적선은 50여 척
- 3시간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최초의 승리
- 적군은 거제도로 도주. 판옥선이 승리의 주역
 
- 적선 5척 맞이하여 불태움
- 연합수군은 창원의 남포 앞바다에 진
 
- 이순신, 진해의 고리량에 적선 정박 첩보 받고 출동하여 적선 13척 발견
- 적군의 일부는 육지로 올라가 약탈 중
- 연합수군은 적선 11척을 불태우고 승리
 
5월 중순 적군, 경기 용인, 죽산까지 진출
 
이 무렵 적군은 이씨 조선에 불만을 가진 조선사람을 향도로 부려먹음 (왜향도. 일군에 협조하여 정보 제공케하고 양곡을 염출하여 공급)
 
5월 *아군, 임진강에 방어선 구축. 12,000명의 전병력이 집결
 
* 총지휘관 우키타 히데이에, 일본군의 진군 결정
- 1번대가 먼저 평양에 들어가되 3번대가 후원군이 되고
2번대는 함경도로 들어가되 4번대는 강원도로 들어가서 후원군이 되라고 지시
- 우키타는 6만여 명의 병력 이끌고 서울 방비
 
5.13 가토, 2번대 이끌고 파주 거쳐 임진강 도착
- 고니시, 야나가와 노리노부를 항복을 권유하는 사절로 보냄
- 야나가와, 임진강에 와서 가토에게 후퇴 종용하고 아군에게 강화 요청
그러나 아군의 신길, 권징, 한응인 등 일부 지휘관이 2번에 대한 추격에 나섰다가 패배함으로써 강화 시도는 무산되고 방어선은 대동강 전선까지 올라 감.
 
5.19 3번대, 북상하면서 낙동강 중류 거점 확보하고 있을 무렵 합천에 은거하고 있던 정인홍이 의병 300여 명 모아 훈련시킴.
- 대부분 조식의 제자들
- 손인갑을 부장으로 삼음
 
5.20 선조, 평양에서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 다시 발표하고 분조 선언
 
5.27 원균, 적선 10여 척이 사천, 곤양 등지에 나타나자 이순신에게 연락
-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6/3일에 부산포 일대에 나가 공격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음
- 이억기는 약속날짜 기다리지 못하고 판옥선을 만든 정걸 등과 함께 배 23 척을 이끌고 노량진으로 출발
- 사천에 주둔한 400여 명의 적군과 12척의 적선 맞아 승리 거둠
 
* 처음으로 거북선 등장. 이억기는 등에 총상
 
5.29 임진강 패전 소식 듣고 선조는 명으로 유몽정을 사신으로 보내고 자신은 평양 떠날 준비. 먼저 왕비 등을 함흥으로 보냄
 
6월 * 평양성 함락
 
* 8도에서 의병 봉기. 의병의 총수는 22,600여 명, 관군의 25%
의병장의 구성: 양반유생과 전직관료가 대부분
 
- 적선 12척 침몰시킴
- 조선인들이 적선을 타고 전투에 참여한 사실 확인
 
6.5 *거제도 당항포 전투
- 7일동안 거제도 서쪽 일대에서 적선 72척 침몰시키고 약 3만여 명 사살
- 승전 보고를 둘러싼 원균과의 갈등
- 두 차례에 걸친 해전 승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행을 좌절시킴
 
- 용인 문소산에서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이끄는 3만여 명의 관군이 1,600여 명의 적군과의 접전에서 참패. 권율 참여
- 전라도,충청도에서 모은 마지막 군사
- 이광은 파닉되고 권율이 그 자리 이음
 
6. 6 손인갑을 선봉장으로 하는 50여 명의 의병이 낙동강에 주둔한 일군 습격하여 100여 명 죽임
 
6. 8 1번대 선봉, 대동강 진입
- 겐쇼와 야나가와가 이덕형과 강화회담 하였으나 성과 없이 결렬
 
6. 9 선조, 윤두수에게 평양 사수 책임 맡기고 떠나려 하자 백성들이 길을 막고 소란
 
6.10 선조, 비밀리에 평양 떠남
- 백성들은 분노에 차서 창고를 털고 방화
 
6.11 *적군이 강원도 거쳐 함경도에 들어왔다는 보고 받고 선조는 의주로 도피하기로 하고 이덕형을 명에 청원사로 보내 구원 요청
* 세자에게 분조 지시
 
6.14 광해군의 분조 활동 (∼1593년 10월까지)
- 분조 통솔하여 군국기무 수행. 종묘,사직 주관, 관리에 대한 인사권 주어짐
- 평양 출발하여 12월말까지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 돌아다니면서 의병모집과 전투 독려 등 활발한 활동 전개
- 1592년부터 1604년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 주청사를 명에 보냈으나 모두 거절당함
 
6.15 명군 최초의 선발대 1,029명 압록강 건넘(대조변이 인솔)
 
6.18 만력황제는 병부상서 석성(아내가 조선인이라는 설)의 건의에 따라 구원병 파병 결정
- 1차 파병. 선발대 1천여 명 왔으나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의주로 돌아감
- 뒤이어 명에서는 선조가 적과 내통하였다는 글을 보냄
 
6.22 선조 일행 의주 도착. 시종까지 40여 명. 어의 허준도 처음부터 동행
- 압록강을 건너 귀화하려고 하였으나 윤두수 등의 반대
명은 먼저 선조를 호위할 군사와 군비 2만 냥, 옥감 등을 행재소로 보냄
 
6.25 양대박, 남원 방면에서 의병 1,500여 명 모아 임실에 주둔한 적군 습격
 
6.30 손인갑 부대, 낙동강 하류에서 적선 습격. 손인갑 사망
- 최초의 순절자
- 1천여 명 사살하고 무기 노획하는 성과
- 지방에 출몰하는 적군 제약하는 효과 및 호남 의병 활동의 계기
 
7. 2 명의 병부상서 석성, 구원병 보내기 전에 조선의 내통설과 선조의 진위 여부 확인하기 위해 서일관 등 무장을 의주로 파견
 
7. 5 명의 구원병 3,500명 압록강 건어편에 집결
- 명군의 파병에 따른 반대급부
- 군지휘권 장악, 강화회담 주도, 조선은 군량 및 의복 조달하고 수송수단 준비, 약탈, 강간 등에 대한 처벌권도 명군이 가짐
 
7. 7 광해군에 의한 이천 분조의 활동 - 18일간
- 의병장 김천일 등 각 지방에 격문을 띄워 의병 봉기 당부
- 임해군순화군은 함경도 일대에서 활동
- 이후 김천일은 강화도에 머물며 광해군의 명령을 삼남 지방에 전파하는 역할 담당
 
7. 8 * 웅치(곰티재) 전투 - 진안과 전주 사이
- 전라도 진격 위해 안코쿠지(안국사 창건한 승려)가 지휘하는 적군과 맞서 김제군수 정당이 이끄는 군사 장렬하게 싸웠으나 패배
 
*이치(배재) 전투 -금산에서 전주 방향의 진산에 위치
- 적군 사령관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다수의 병력과 권율, 황진 부대 1,500명과의 치열한 전투.
- 황진이 이마에 총알 3발 맞았으나 살아나 나중에 익산 현감에 임명
- 육지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 적군에 큰 피해 주어 이치를 넘지 못하고 금산성 안으로 들어가게 함
- 웅치를 넘은 적군은 전주 외곽 완산성 근처에 진출.
- 전주 지키던 이광 도주
- 웅치, 이치 전투로 적군의 전주 진출과 전라도 석권 막음
- 만경평야와 김제평야 보호
- 이후 금산이 적군의 거점
- 권율은 도망친 이광을 대신해 전라감사가 되어 전주 방비 책임
 
- 아군 1만명으로 적군 4만명 이상 죽이고, 적선 66척 침몰시키고 아군의 전선 72척은 전혀 피해 없었으며 18명 만이 전사
- 한산대첩의 패전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는 거제도에 성을 쌓으라고 지시하고 육군 증파
 
 
7. 9 고경명 의병부대 7천여 명 금산에 주둔한 적군과 싸워 패배. 고경명, 고인후 사망
- 재인과 광대 등 하층민의 참여
 
7.10 안골포 전투 - 부산포와 진해 중간
- 적선 20여 척 파손시키고 다수의 적군 사망
- 적군은 안골포에 집결해 있다가 100여 척을 이끌고 도망
- 이순신은 여수로 돌아옴
 
7.17 명의 원군 평양성 전투에서 대패
- 조명연합군, 적의 역정보에 속아 평야성 진입하였으나 역습당하고 후퇴하여 안주까지 도주. 안주에서 명군 철수
- 고니시에 의해 강화협상 제기
- 명의 대표 심유경이 평양에 와서 고니시와 강화조건 논의
- 조정에서는 대책 강구
- 병력 2만명 확보. 묘향산에서 수행중이던 휴정을 불러 승통을 삼고 승병 모집 지시
- 휴정은 전공 세우면 품계를 주라는 조건 내걸고 동의하여 승병 수천 명 모집
- 제자 의업을 총성으로 삼고 강원도는 유정, 전라도는 처영에게 맡김
 
7월 적군이 마천렬 넘는다는 소문 듣고 임해군순화군은 회령으로 도망
- 2달 동안 두 왕자의 횡포로 함경도 민심 더욱 이반, 사방에서 叛民들이 들고 일어남. 적군에 투항하거나 벼슬아치들 잡아놓고 적군 맞이함
- 강원도에서 함경도 경흥에 이르는 길목에 5리마다 말뚝 박음 - 이덕형이 왕이 되고 김성일이 원수가 된다는 내용
 
7.18 2번대 마천령 넘음
- 북병사 한주함, 6진의 군사 이끌고 해정창(성진읍) 부근 전투
- 함경도 최대의 병력 무너지고 2번대는 주민들의 환영을 받아가며 경성 차지
- 2번대가 명천에 이르자 종 정말수 등이 반란 일으켜 관아를 배앗아 적군에 넘겨줌
- 2번대 회령 진입
- 유배자인 국경인과 그의 숙부 국세필이 두 왕자와 벼슬아치들을 잡아 가두고 적군에 항복. 가토는 이들을 경성 방어의 책임자로 임명
- 이 지방의 아전들은 적이 주는 벼슬을 받고 협조. 종들은 향도가 됨.
일군은 싸우지도 않고 국경지대 접수
- 가토는 2번대를 길주에 주둔시키고 각 고을을 현지인에게 맡겨 다스림
여름 일본군, 풍토병과 모기 파리떼로 고생
- 장맛비로 조총이 무력화. 조선군의 계속되는 육격전술로 보급 차질
- 함경도가 적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남쪽에서는 반격전이 활발
 
7.24 권응수 의병부대 3,500명 영천성 공격
- 치밀한 작전계획과 화공법으로 적 1천여 명과 싸워 대승하고 말, 무기등 다수 노획. 아군 전사자 83명
- 5번대 군사 경주 지방으로 도망하였으나 의병에 밀려 퇴각 거듭
 
7.30 * 곽재우 부대
- 조식의 사위로 부호로서 재산을 모두 의병부대에 쏟고도 굼량미와 무기가 달리자 무력으로 토호 양반들의 창고를 털고 종들을 군사로 삼음
- 곽재우는 향도 등 부역자를 찾아내 처단하는 일부터 시작
- 붉은 비단옷을 입고 삿갓 쓰고 활동하여 홍의장군이라 불림
 
* 정인홍은 성주, 김면은 거창, 곽재우는 의령에 거점 확보하고 권율군에 막혀 전라도 진출 포기하여 금산에서 내려와 의령으로 진출하려던 안코쿠지 군을 맞아 대파함
- 초유사 김성일이 삼가 지역의 의병 지휘를 곽재우에게 맡겨 의령, 삼가 의병연합부대가 형성
곽재우군 4천여 명 낙동강 건너 현풍 진격. 적군은 현풍성 퇴각하여 창녕 쪽으로 도망
- 곽재우는 이어 의령, 현풍, 영산의 의병 규합해 이 지역을 장악
 
* 조헌 부대 1천명, 영규 부대 1천명(휴정의 제자로 승병이 의병에 가담한 최초의 부대) 의병 연합 부대 청주성 공격하여 점령
 
8. 1 관군, 평양성 보통문 앞 진출하여 적군 견제. 순찰사 이원익 지휘
 
8.2 적군 경주 거점
- 경주 외곽의 노곡에서 김호의 의병 부대와 접전. 김호 사망
 
8. 3 *거창에 주둔한 적군 계속 전라도 진입 시도
 
- 김면이 의병 3천명 모아 거창 공격 계획. 진주 판관 김시민에게 지원 요청
- 김면.김시민의 연합의병군, 거창의 사랑암에 주둔
- 적의 선제 공격을 막아내 승리로 이끌고 김시민은 진주로 복귀
 
8월 중순 조헌 . 영규 연합부대, 금산성 공격 위해 집결
- 조헌, 충청 감사 윤국형에게 협조 요청하였으나 윤국형은 의병을 관군에 편입시켜 자신의 지휘 받으라고 요구하여 타협을 보지 못하자 윤국형은 의병의 가족을 옥에 가두고 의병 모집 방해
- 1천명의 의병이 700명만 남고 흩어짐
 
8.17 조헌, 영규의 의견에 따라 전라감사 권율에게 편지 보내 금산성 공격 계획 알리고 협조 당부
- 조헌권율의 회신 기다리지 않고 성급하게 진격 결정하여 금산성 10리 밖의 연곤평에 주둔
 
8.18 적의 선제 공격으로 치열한 전투.
- 조헌, 영규 사망. 700여명의 사상자 내고 패배. 적군은 성주 쪽으로 퇴각
- 여기서 조헌의 아들과 동생까지 전사
- 전투 후 조헌의 문인들이 유골을 모아 무덤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함
- 1603년 조정에서 조헌의 순의비 세움
 
8.20 경상좌병사 박진의 관군과 정세웅, 권응수가 거느린 의병 등 1만여 연합군이 경주 공격
- 아군 600 전사자 내고 안강으로 후퇴
 
8.21 영남.호남의 연합의병군이 성주 공격 위해 편성됨
-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와 화순의 최경회, 임계영 등이 무주에서 적군과 대치하다 적군이 성주로 올라오자 정인홍, 김면과 연합. 병력 25,000명
- 도체찰사 정철과 경상우도감사 김성일의 지원
 
8월 모리가 이끄는 적군 3천명 강원도 쪽으로 진출
- 안변에서 강릉, 삼척을 거쳐 울진 평해 석권하고 다시 원주 진출
- 원주 목사 김제갑은 치악산 남쪽의 영원 산성을 방어기지로 삼아 피란민 4천여 명을 모아 놓고 적군에 대비
 
- 적군 치악산 공격. 여러번의 진출이 좌절되자 결사대 수십명 보내 절벽을 기어올라 성벽에 구멍을 뚫고 돌진
- 치열한 전투 벌였으나 성안의 화살과 돌이 바닥나 김제갑은 전사하고 아군 무수히 사망
 
8.28 황해도 연안성 전투 (∼ 9/1)
- 초토사 이정암의 의병과 구로다군과의 전투에서 승리
연합수군 166척 부산의 적선 공격하기 위해 출동. 제포에서 출발하여 낙동강 하류 정박
 
8.30 적군 부산에 군사 집결. 진주성 공격 준비
- 장기간에 걸쳐 부산에 관가 수백채와 민가 300여 채 지어놓음
- 육군 1만명, 수군 8천명, 전선 430척
 
9. 1 연합수군 부산 공격하여 적선 100척 이상 파괴
- 이순신의 오른팔인 녹두 만호 정운 사망
 
9. 8 박진, 5천 군사 이끌고 다시 경주성 공격
- 경주의 화약무기기술자인 화포장(火砲匠) 이장손이 처음 만든 비격진천뢰 사용하여 위력 과시
 
9. 9 적군, 어둠을 이용해 남문으로 총퇴각
- 영천에서 경주에 이르는 적군의 보급로가 아군에게 장악
- 이 무렵 적군이 불국사와 양산 통도사에 불질러 수많은 문화재 소실
 
9.10 연합 의병군, 해인사에서 작전회의. 합천 고령 성주 방향으로 진격 결정
- 작전을 펼치기도 전에 개령에서 구원군으로 온 적군에게 습격당하여 후퇴
- 김성일은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출전하였다고 정인홍 질책하여 갈등
- 연합군의 압박작전으로 적군은 해인사까지 출몰하지 못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 온전히 보전
 
9.16 정문부, 지달원 의병부대의 함경도 경성전투
- 정문부, 경성에 들어가 의병 3천명 모집
- 적군이 경성 습격하자 격퇴시키고 부역자인 국세필과 국경인 등 처단
- 명천 북쪽 일대 회복
함경도 북쪽 주민들은 조선왕조에 강하게 반기 들었으나 정문부의 활약에 힘입어 점차 평정
 
9.24 적군, 진주성을 함락시켜 조선군의 거점 뿌리뽑고 전라도 진출하기 위해 2만 병력 김해로 집결
- 김해 출발하여 창원 진격. 이곳을 함락시킴
- 진주목사 김시민이 중심되어 진주성 방비
- 곽재우, 정기룡 등 경상도 의병과 최경회 등이 인솔하는 전라도 의병 합세
 
9월 누르하치, 조선에 원병 파견 제의
 
10월초 명의 심유경고니시 회담
- 조일간의 경계선을 대동강으로 하고 50일 간의 휴전 결정
 
10.3 적군의 진주성 공격
 
10.5 진주 대첩 (∼ 10/10)
- 의병들의 교란 작전으로 적 퇴각. 아군의 피해 크지 않았으나 김시민 사망
 
10월 심대를 경기 감사로 임명. 삭녕에 임시 감영을 두고 의병을 모아 서울 수복 계획.
- 간첩 성여해가 찾아와 의병 모집 자처. 서울 등지에서 정보 입수하여 적군에게 전달
 
10.16 이여송, 도독이 되어 구원병의 총지휘 맡음
- 심유경이 먼저 평양에 들어와 고니시에게 명의 결정 통고
- 빼앗은 토지와 두 왕자, 왕자의 신하를 돌려보내고 군사 철수 제의
- 고니시는 대동강을 경계로 한 분할점령안 제시하여 회담 결렬
 
10.18 이토, 삭녕으로 쳐들어와 심대 등 의병 400명 몰살
- 적의 정보전에 넘어가 서울수복 계획 실패
 
10.30 경성에서 적을 격퇴한 정문부는 길주 공격에 나서 적군 800명 죽임
 
12월 곳곳에서 작은 전투가 산발적으로 전개
 
12.10 명군 선발대 파견
 
12.16 왕릉 도굴사건
- 일본군의 서원(書員)을 맡아보던 최업이 일군 졸개 50며과 조선인 50명을 이끌고 양주의 강릉(명종의 능)과 태릉(문정왕후의 능)에 몰려가 능을 파헤침. 도굴 실패하고 다시 덕흥대원군(선조의 아버지)와 선릉(성종의 능), 정릉(중종의 능)을 파헤침. 후일 조일간의 큰 분쟁거리가 됨
 
12.25 이여송, 43,000명의 2차 원군 이끌고 압록강을 건넘.
- 선조는 의주에서 이들을 대접
 
12.28 * 명군, 평양으로 출발
* 조선은 김명원을 도원수로 삼아 8천명 규합하여 명군과 합세
-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이빈이 인솔하는 1만명의 군사 및 휴정유정의 2,200명의 승병도 가세
 
* 유성룡, 안주에 머물며 준비, 고니시가 보낸 조선인 첩자를 적발하는 대로 처단하여 평양의 적군은 한동안 명군과 조선군이 내려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음
 
* 명군은 조선에 들어오자 마자 약탈과 강간
- 명군에는 포악한 남쪽의 군사(남병)이 많이 포함
 
12월 하순 권율의 서울수복작전
- 전라도군사 1만명 이끌고 북상하여 수원 아래의 독성산성(독산성)에 주둔
- 우키타 히데이에는 서울과 그 주변에 6만 병력 배치
- 권율은 교란작전으로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적은 서울로 퇴각
- 적군, 서울에 웅크린 채 부산과의 보급로 확보에 주력
- 권율, 북쪽 행재소와의 연락 통로 확보하자 곳곳에서 의병 봉기
 
 

5. 1593년(선조26) - 임진왜란 2년

1. 6 평양성 공격 - 공방전
 
1. 7 명군 평양성 포위
- 평양성 안에는 적군 15,000명과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이 방어 준비
 
1. 8 *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 순변사 이일, 휴정이 지휘하는 승병과 합세하여 평양성 공격
- 성문이 열리고 적군 밀리기 시작. 이여송은 성위로 올라가는 군사에게 5천냥 주겠다고 하자 군사들은 사기 올라 성벽을 기어 올라가고 적군은 을밀대 고지로 몰림
- 고니시, 전투 멈추고 퇴로 열어 줄 것을 당부하자 이여송은 이를 받아들임
- 적군 1만명 이상 사망. 일군에 협조한 조선인 1천명 포로
- 일본군은 성에 불을 지르고 도망
- 고니시 휘하의 일군은 남쪽으로 후퇴했고,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의 2만 병력은 고립됨
 
* 벽제 전투 패배
- 이여송, 일본군 추격하였으나 서울 북쪽 40리 지점인 벽제관에서 기습당함
- 개성으로 회군
- 고니시군 개성 거쳐 서울로 후퇴, 도중에 산의 나무들 모조리 불살라 명군의 진로 저지
 
* 벽제 전투 패배 이후 강화론 본격 대두
- 강화론의 배경 : 병의 참전 자체가 중국 본토를 전장으로 만들지 않고 조선에서 일본군을 저지하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짐
- 1월의 평양성 전투에서 이 목표가 이미 달성된 것으로 간주
- 막대한 전비 조달 문제 : 명군의 피폐한 군세
- 강화론이 병부상서 석성을 비롯한 명군 최고지휘부의 입장
 
* 명군 최고 지휘자인 경략 송응창과 그의 참모 원황과 양명학 토론
- 송응창과 그 휘하의 문인들로서 대부분 양명학의 본거지였던 절강, 산동출신
- 평양성 탈환 후 일본과의 강화 기다리는 동안 선조의 행재소에서는 이들과 조선 관료들과 양명학에 관한 토론 벌임
- 명의 학자들은 조선이 지나치게 주자의 집주(集註)에 매몰되어 있고 시부와 문장의 치중되어 있음을 비판
- 유성룡 등은 반대, 선조는 왕양명의 실질적이고 공리적인 학문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해보고 싶은 의사 표명하여 관심을 드러냄
 
- 양명학 수용학자 : 남언경, 이요, 장유, 최명길, 허균
- 유몽인, 이수광, 성진선, 차천로 등 탈주자학적 경향의 학자들이 이들 명지휘부의 양명학적 경향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
 
양명학 좌파: 허균에서 정약용, 박지원으로 이어지는 학통
양명학 우파: 장유, 최명길에서 최석정, 정제두로 이어지는 학통 강화학파
 
* 명군의 남병들 반란. 이들이 성 위를 먼저 점령했음에도 약속된 5천 냥을 주지 않자 반란 일으킴
- 이여송은 이들을 의주로 유인하여 1,300명 죽임
 
1.18 선조, 평양 수복 보고 받고 의주 떠나 남하함
 
1.25 이여송, 개성 수복하고 서울 탈환 준비
- 선발대 거느리고 임진강으로 진출
 
1.27 일본군, 벽제관 전투에서의 승리
- 고바야카와가 선봉이 되어 4만명 이끌고 출동하여 이여송군과 벽제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
이여송은 포위되어 죽음 직전에서 구출됨
- 적군은 명군 물리치고 서울로 퇴각
- 이여송은 임진강 건너 동파역에 이르러 만력제에게 교대 요청
- 유성룡의 설득으로 임진강에 3천명 병사 남겨놓고 개성으로 돌아감
- 함경도 남쪽에서는 의병과 관군이 합세하여 적 압박
- 길주성 포위하고 장기전
- 안변의 가토군, 길주 구원하러 출동하였으나 아군은 길주 수복함
- 1월말경부터 함경도 지방의 적군은 사라지고 고을의 행정이 회복
- 이여송은 평양으로 후퇴
- 전쟁의 교착화. 명의 전쟁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 강화협상론 대두
 
2월 권율, 독성 산성에서 지구전 펴며 서울 탈환 위해 병력을 행주 산성에 집결시킨 뒤 목책을 세워 진지 구축
- 전라도 위주의 군사 2,300명과 처영이 이끄는 승병 합류
- 변이증이 만든 신무기 화거(火車), 권율이 고안한 수거석포(水車石砲) 만들어 대비
 
2.10 이순신, 3월 초순까지 적군 수군 소탕작전
- 적군 사이에 유행병 돌고 접전을 피하는 바람에 큰 접전 없이 몇 달동안 전투 이루어지지 않음
 
- 적군 서울에 모인 3만여 병력 총동원하여 행주산성 공격.(가토군 제외)
- 성을 포위하고 9차례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관민승 일치의 방어에 성공
- 통진에 주둔하던 이빈이 배 두 척에 화살 수만개의 화살을 싣고 지원에 나서 성 안의 군민들 사기 오름
- 저녁까지 격전을 치른 끝에 적은 서울로 퇴각
 
* 가토, 두 왕자와 신하를 포로로 잡아놓고 모종의 흥정 도모
- 고니시와 경쟁. 고니시의 장기간 휴전 결정으로 명군에 충분한 시간 주어 그의 문책 예상하고 자신이 주도권 잡으려 함
- 명의 풍증영과 비밀 회담
두 왕자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대가 요구. 이후 가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 조건임을 내세워 강경 입장
- 두 왕자의 편지를 보내 강화 제의하였으나 그의 공작은 실패함
 
3.15 심유경, 고니시 회담
- 고니시는 명군이 철수하면 두 왕자 보내고 서울에서 철수한다고 제의
 
3월 *명의 경략 송응찬, 일군에게 대승을 거둔 권율에게 패문(牌文)을 보내 일군을 쳐죽인 것을 질책
- 이후 명군은 일군과의 교전을 포기하고 조선군에게까지 강요
- 조선의 주전론이 일본과의 강화협상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겼던 명군은 조선군에게 일본군과 전투 벌이지 못하도록 압력 행사
- 송응찬, 전비 마련대책으로 조선에 은광 개발 요구
- 정인홍도 상소에서 재정문제 해결 위해 은광 개발할 것과 시장 열어 물화 유통시킬 것을 주장
 
* 도요토미, 4월까지 세 번에 걸쳐 진주성 공격 지시
- 화의와는 관계없이 진주 거쳐 서쪽 진출하여 장기적으로 주둔할 거점 마련코자 함
- 이 지시에 따라 적군 부대 편성. 병력 37,100명, 예비병력 21,50명
 
4. 8 고니시, 서울 철수
- 용산 창고에 보관중이던 곡식 2만 석을 명군에게 넘겨주고 서일관, 심유경등 사신과 두 왕자, 그리고 신하 등을 데리고 감
- 조신인 부역자 1천여 명 함께 떠남
- 부상자, 병든 자 등 일군 잔류
- 명군은 아군에게 적군 추격 금지 명령
- 서울은 폐허더미. 굶주린 자 속출
- 명군이 활동 멈추고 잇는 동안 적군은 서울 주변에서 약탈행위
 
4.19 일군이 서울에서 퇴각할 때 조선군이 추격하려 하자 명군은 일군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후면에서 일군을 호위하고 조선군의 진격 차단
 
4월 광해군, 위험을 무릅쓰고 호남지방에 이르러 민심 수습하고 군민 격려
- 선조 대신하여 전시상황을 주도
 
5.16 이여송, 사용재서일관을 특사로 일본에 보내 도요토미와 강화 교섭
 
5.30 서울에서 철수한 적군 병력 10여만 명 부산 집결
 
6.6 권율, 도원수 임명
 
? 정철 사망
 
6.15 적군, 김해와 창원 거쳐 함안으로 진격
- 함안에 주둔하던 권율, 이빈, 선거이 등의 군사 남원으로 도피
 
6.16 적선 800여 척 전진 배치.
- 이순신은 수군을 한산도에 배치하여 적선의 길목 차단
 
6.19 제 2의 진주성 전투 (∼ 6/29)
- 진주성에는 군사 3,500명과 백성들 6만여 명
군사 동쪽에 집중 배치. 북문에는 김천일, 이종인 부대, 서문에는 황진부대, 촉석루 쪽에는 고성의 의병 배치
- 6/21일까지 공방전. 성 밑을 파내어 허물려 하였으나 실패
 
6.22 적군은 동문 밖에 흙산을 쌓고 공격.
- 황진이 이에 맞서 흙산 만들어 총통으로 적의 망루 파괴
 
6.23 적군, 성벽 파괴 시도 실패
 
6.24 동문과 서문 밖에 다시 흙산 만들고 조총으로 공격하는 한편 귀갑거 이용하여 성벽에 구멍뚫고 진출 시도
 
6.25 적이 서문의 성벽 뚫자 황진이 이를 발견
 
6.26 황진부대, 적이 뚫린 성벽으로 몰려들자 대기하고 잇다가 수백명 죽임. 이때 시체 속에서 숨어있던 적군이 쏜 총에 맞아 황진 사망
 
6.29 * 진주성에서의 패배
- 적군 돌격대, 귀갑거 이용하여 동문 성벽 무너뜨림. 곧이어 서문과 북문도 뚫리고 아군은 촉석루로 후퇴
- 촉석루 밑 남강 가 바위에 모여 무기를 강물에 버리고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 이종인 등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
- 동래성, 행주성 보다 더욱 치열한 전투
- 한 명도 남기지말고 도륙하라는 도요토미의 지시에 따라 백성들을 창고에 가두어 불살라 모조리 죽임
 
* 논개의 장렬한 죽음
- 승리 후 촉석루에서 축하 잔치
- 논개, 기생으로 위장하여 적의 가토군 소속 장수인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 안고 강물로 뛰어 들어 함께 죽음
- 논개는 장수 출신으로 장수현감이던 최경회가 관에서 돌보아 주던 중 그의 아내가 죽자 논개를 내실로 삼아 진주성까지 따라와 있었음
 
* 진주성 함락후 적군은 곡성, 고부 등지와 지라산 주변 등 넘나들며 노략질
- 경상도 해안 주변에 12개의 성을 쌓고 장기 주둔 계획
- 울산만 아래 서생포에서 시작해 입랑포, 기장, 동래, 부산, 김해, 가덕도, 안골포, 웅천, 거제도 등
 
? *전쟁도 평화도 아닌 상태의 지속. 명의 주둔 장기화 되면서 민폐 극심
 
* 명군에 의한 약탈, 강간, 폭행 등이 자행
- 많은 명군들이 결혼, 동거, 매춘 등의 형태로 조선여자들과 맺어짐
- 중국 상인들의 국내 유입 활발.
 
8. 6 도요토미, 일군 철수 명령
- 귀환 앞두고 두 왕자 풀어줌
- 가토는 울산에, 고니시는 웅천(김해)에 잔류
- 잔류 병력은 12개 성에 46,000여 명
- 이여송은 병력 3만명 이끌고 서울에서 철수하여 요동으로 감.
- 이 때 조선 여인들이 남장을 하고 명군을 따라감
- 부총병 유정이 명군 잔여부대 16,000명 지휘 맡음
 
8.30 * 선조는 강화 반대하고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아 수복 명령 내림
- 이후 강화반대론이 조정을 압도
 
* 귀순하는 적군 속출
- 이들을 다방면으로 활용. 훈련도감 등. 현지 활용 원칙
- 사야가는 가토 휘하의 장수로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전투 참여 하였다가 투항, 이후 많은 전공을 세워 선조는 그에게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주는 등 특별대우 나중에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움
 
* 각지에서 불만세력과 농민들의 저항
- 남원 주변의 저항세력 - 김희와 고파 세력 - 1년간 활동
- 지리산 일대의 임걸년 세력 - 3년간 활동
 
 
9월 *명, 조선의 조정이 강화협상에 반발하는 기미를 보이자 왕위교체설 흘리기 시작하며 광해군의 즉위 주장 제기함
- 명의 병부 즉방사 주사 증위방, 왕의 교체론 주장
- 선조의 무능에서 침략 초래 하였다며 광해군으로의 교체 주장
 
10.1 해주에서 한 달간 머무르던 선조 서울로 들어옴
- 궁궐이 불타 월산대군의 사저에서 조정을 꾸밈
- 광해군에게 백성들 안무와 군사 독려 지시
 
10.20 이여송 서울로 들어옴
 
11.19 광해군의 두 번째 분조 활동(∼ 1594. 8.25일까지 활동)
- 명, 광해군을 삼남지방으로 보내 명군을 지원토록 종용함에 따라 광해군은 남행 길에 오름.
- 윤두수, 이항복 등이 동행
 
12월 * 권율, 남원에서 저항세력에 대한 토벌전 벌였으나 실패
 
* 광해군 공주에 도착. 계속하여 전주로 향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 돌며 병사 모집 및 훈련시키고 군량을 수집하여 명군에게 공급함
- 선조는 병을 이유로 광해군에게 선위 의사 밝힘
- 대신들은 연일 선위 반대의 글 올림
 
* 정철, 강화에서 가난과 실의 속에 살다 사망
 
12월 송유진의 난(천안)
- 이지함의 서자인 이산겸을 수령으로 삼아 산악세력 규합하여 뚜렷한 목표 제시로 저항세력과 농민들의 호응 얻음
- 1/15 일을 거사일로 삼았으나 실패
- 송유진 세력은 청계산ㆍ지리산ㆍ속리산 등에 2천여 명 분포
반란군 중에는 양반과 포함 - 이들이 주도적 역할
- 송유진은 의병장 사칭하여 반란 세력 규합. 각 처의 세력과 모의하여 군사 이끌고 아산,평택의 무기고 습격
- 1/15 일 서을 진입 위해 전주에 밀서 보내 국가 전복 기도
- 조정에서는 밀서 모낸 날에 송유진 진압 위해 포고문 발표
- 충청병사 변양걸, 군사 인솔하여 온양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주모자 소재 파악 실패
- 진천의 무사 김응룡, 자신의 조카되는 홍각이 반란에 참여하였다는 소식 듣고 설득시켜 송유진을 꾀어내게 한 후 그 세력을 체포함
- 이 때, 광해군은 홍주에 머물고 있었으며 난이 발생하자 광해군은 난의 진압을 지휘함
- 송유진, 광해군에게 왕위 주장
 
? 호조의 권유로 납속사목(納粟事目)를 결정
- 납속책은 국가에 쌀이나 포를 헌납하면 그 액수에 상응하는 반대 급부를 주는 제도로 돈으로 양반직을 사는 것이 합법화 됨
- 납속을 모집하는 관리가 공명첩(空名帖)을 가지고 이름 쓰는 데를 비워두었다가 응보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이름을 써서줌
 
 

6. 1594년(선조27) - 임진왜란 3년

1.24 송유진 서울로 압송하여 국문
- 반란군에 가담하였다가 자수하여 공을 세운 홍응기 등 7인 입회
- 송유진은 우두머리가 자신이 아니라, 이지함의 서자 이산겸이라 함
- 국문결과 주모자는 송유진과 오원종(수원의 한의사)
이들은 통유문을 돌리고 군대명부를 작성하여 유춘복을 돌격대장으로 함.
평상시 암호나 중국어를 사용하여 비밀조직 확대해 나가다가 체포됨
- 이 난에 연루되어 16명 능지처참 당하는 등 모두 18명 처형
- 이산겸은 의병을 거느리고 전라도에 갔다가 잡혀와 사형담함.
 
1월 심유경고니시, 가짜 항복문서인 渙茸硫 명에 전달
 
4월 유정가토의 회담
- 가토의 요구조건은 조선의 4도를 할양하라는 것
- 유정의 일화
 
5월 송응찬의 뒤를 이은 명의 경략 고양겸, 봉공론 제기
-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의식 주관함으로써 강화론의 결말 맺으려 함
- 명 조정에서는 봉공론자와 반대론자들의 대립
- 일본은 명과 조선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조건을 재시하며 강화 협상을 파탄으로 몰고감
 
6월 명, 직할통치론 제기
- 강화 반대론자인 계요총독 손광, 조선에 정동행성 설치하여 명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조선 통치할 것을 주장
- 유성룡등의 반대. 그러나 선조는 명의 둔전 경락 허락
- 이후 직할통치론이 수시로 제기됨
 
7월 유정심유경, 가토의 2차 회담
- 심유경, 가토에게 일본군 철수 요구하며 그에게 일본의 관백으로 봉하려 한다는 거짓말을 하여 고니시와 이간시키는 反間計 사용하여 효과
 
8월 유정의 부대 철수
- 조선인 560여 명이 명군을 따라가려고 시도
- 조정에서는 조선인의 중국 유입 금지를 명에 요청하였으나 효과 없었음
- 이들은 일부 대륙으로 들어 가기도 하였으나 입관이 저지되어 산해관 부근에서 머물러 사는 경우가 많았음
 
8.25 광해군, 서울 귀환
 
11.12 김응서, 고니시 강화회담
- 고니시, 명과 일본의 강화 요청
 
? 동인의 분열 가속화
- 이경전(이산해의 아들)의 이조전랑 추천 문제
- 전임 이조전랑인 남인 정경세(유성룡의 문인)가 이를 반대
- 이산해는 이를 계기로 유성룡 공격. 이후 북인이 실권
 
 

7. 1595년(선조28) - 임진왜란 4년

1월 명황제, 도요토미를 밀본의 국왕으로 삼는 책봉 허락
- 고니시에게는 도독을 주고 가토 휘하의 장수들은 빠짐
- 책봉사인 이종성, 양방형, 심유경 등 북경에서 출발
 
4.28 책봉사 일행 서울에 와서 4개월간 머무름
 
10월 이때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누르하치의 위협론에 대처하여 간첩 활용 방안 제시
 
11월 이종성 일본에 들어가고 심유경과 고니시는 나중에 입국
- 도요토미는 책봉이 아니라 명 공주의 후비 등 4가지 조건의 이행 요구
후금 내부의 사정을 정탐키 위해 신종일을 누르하치의 흥경노선으로 파견
 
 

8. 1596년(선조29) - 임진왜란 5년

2월 선조, 누르하치의 부하 가운데 국경 넘어와 산삼을 캐가는 자들을 죽이지 말고 사단을 피하라고 지시
 
3월 이때까지 명의 신종이 석성을 신임하여 강화협상 지속
- 그러나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들어갔던 책봉정사 이종성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급변
- 명조정에서 봉공론자들의 정치적 몰락
- 일본의 요구가 단순한 책봉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주전의 방향으로 돌아섰으나 책봉사 일행 수백명의 안전을 위해 부사 양방형을 일본에 보냄
 
6월 선조, 어전회의에서 이순신에 대해 회의적 발언
-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회의의 주제
 
7월 이몽학의 반역사건
- 부여의 도천사에서 중과 농민 규합
- 홍산, 임천 등 여러 고을 점령하며 관아 불태우고 부호 약탈
- 농민 및 군관들의 대대적 호응
 
7.10 이몽학부대 홍주성 및 수원까지 진출하여 홍주성에서 지열한 공방전
- 부하들에 의해 살해
- 김덕령, 그의 전공을 시기하는 무리들에 의해 반역군으로 몰려 선조의 고문으로 옥사
- 곽재우도 문초 당하였으나 풀려남
- 이덕형 연루되었으나 선조는 그를 오히려 위로함
 
8월 조선통신사 일행 부산 출발
- 황신과 박홍장 등 말직의 실무자로 구성
 
9. 2 양방형 일행,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하는 책서와 금인 전달
- 이에 분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한 재침 도모
- 도요토미, 자신이 제시한 7개 조항 관철시킬 방안 묻자 고니시는 전쟁 밖에 없다고 주장
고니시와 심유경에 벌인 4년간의 공작 종말
- 명에서는 지금껏 강화 추진해 오던 자를 모두 처벌
석성포 파직되고 심유경 체포 명령
심유경은 조선에 머물다 1597년 7월 체포되어 명에 끌려가 처벌
 
11월 조정에서는 밀본의 재침략에 대비. 영의정 유성룡의 청야작전 주장에 따라 새재, 추풍령, 죽령 등을 차단하고 복병 배치
- 전뱅 비용 마련 위해 종과 서자들에게 벼슬 팔고 면천 조치
 
? 이몽학, 무량사의 굴 속에서 중들과 모의 -무기제작하며 군대 모음
- 승려들과 무리들을 장군으로 임명. 문무관의 관직을 내리니 양반 자제들과 무사들이 많이 모임
 
 

9. 1597년(선조30) - 임진왜란 6년 (정유재란 1)

1월 정유재란
도요토미 히데요시, 14만 대군에게 출정명령(조선 잔류병 2만명 포함)
- 가토군은 서생포, 고니시군은 웅천에 주둔. 수군도 웅천에 주둔하면서 많은 선박 건조
- 고니시가 간첩 요시라를 보내 김응서에게 가토군이 다대포로 진군할 것이 라는 정보 줌
- 가토가 다대포에 도착하기 전 이순신은 출동 명령 받았으나 출동 거부 (출동하였어도 가토군과는 만나지 못했을 것)
- 선조, 이순신 체포 명령.
 
명, 일본군의 부산 상륙 소식 듣고 바로 파병 결정
이번에는 조선 구원이라는 측면이 아닌 명과의 전쟁으로 인식
 
2월 * 이순신 하옥과 이에 따른 2차 백의 종군
- 선조의 모진 고문
- 하옥의 원인
원균의 모함설
이순신의 모함설 및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선조의 어명을 어긴 죄
어명을 어긴 이유: 왜군의 정보전에 조정이 넘어간 결과
- 왜장 가등청정이 간첩 요시라를 이용하여 정보 흘렸으나 이순신은 자신을 잡을 계략으로 알고 출동하지 않음
-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려 하였으나 정탁의 요청으로 백의종군 지시
-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
 
* 이 무렵 고니시는 김응서와 협의하여 양쪽 군사들에게 전투 금지 명령 내리고 가토 유인하여 죽일 음모
 
3. 8 유정, 가토 찾아가 화의 교섭하였으나 가토는 여전히 왕자를 인질로 보내 도요토미에게 사례하라는 주장만 되풀이
 
4월 원균, 거제전투에서 패배 - 수군의 기반은 완전히 붕괴됨
 
7월초 새로 건조한 적선 600여 척이 부산에 정박하자 권율은 원균에게 공격 지시
- 원균의 명을 받은 배설은 전선 수십 척 잃고 패배
- 원균은 한산도의 운주당에서 애첩과 술로 세월 보내다가 권율에게 끌려가 곤장 맞음
 
7. 6 이몽학의 난 (홍산,부여)
- 서자로서 임란시 조련장관으로 종군. 무량에 머물며 훗날 반군의 선봉장이 된 한현등과 교우
- 이몽학, 약 1천여 명의 반군 동원하여 홍산현 습격. 현감은 투항함
 
7. 7 이몽학의 반군 정산 함락
 
7. 8 반군 청양 함락
 
7. 9 반군 대흥 함락. 이때 비로서 충청도 순안어사 이시발이 변란을 조정에 보고
- 반군은 3일만에 6개 고을 함락시키고 수만명의 백성과 아전들 가세함
- 이들은 각 고을의 군수를 끌어내 목을 묶고 조목(條目)을 받들게 하여 반군들 속으로 끌고감
- 인근의 백성들은 소문만 듣고도 반군에 투항
- 반란군은 김덕령ㆍ곽재우ㆍ홍계남ㆍ이덕형 등과 호응하였다는 소문 퍼뜨리자 온 나라가 동요
- 부여군수는 부하들이 무기를 반군에게 반출하는 알고도 묵인하며 모든 공문서를 바침. 서산 군수는 동생들 3명을 반란군에 협조케 함
- 이어 홍주목 공격. 홍주목사 홍가신의 방어태세에 밀려 덕산길로 후퇴
- 이때 이르러 이몽학을 따르던 무리들이 그를 불신하기 시작
- 부하 3인의 배신. 이몽학 죽이고 항복함. 반란군은 흩어지고 이몽학의 시체는 서울로 가져와 종로거리에 3일 동안 효수
- 한현은 면천군으로 도주하였다가 잡혀 선조가 친국한 후 능지처참
- 그는 심문 중 많은 사람들을 끌고 들어갔는데 김덕형만이 잡혀 고문사
- 한현의 아들은 당고개에서 교수형 당하는 등 모두 33명이 능지처참되고 홍산현은 혁파됨
- 역모에 관련되어 체포된 반란군의 수가 너무 많아 선조는 도원수 권율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현지에서 가담 정도에 따라 처벌하게 함.
 
7.14 원균, 부산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옻내섬(칠천도)으로 후퇴하여 결사항전 선언
- 적군 몰래 침투하여 원균이 탈 배를 둘러싸고 새벽에 방화
 
- 원균은 가까스로 살아나 적과 교전하였으나 전선 40척 배앗기고 도망하던 중 전사
- 적 수군 한산도 점령하여 통제사 군영 장악함으로써 적군의 남쪽 바닷길 트임
- 일본군의 움직임 본격화. 고니시와 우키타군, 사천,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진격
- 패전 보고받은 선조는 이순신을 통제사로 삼아 내려보냄
통제사에 재임용된 이순신은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은 고작 12척에 불과
 
8.13 남원전투
- 조명연합군이 고니시군 맞아 싸웠으나 패배
 
8.16 남원성 함락. 약탈 자행하고 만복사 방화
 
8.18 고니시군, 전주로 북상. 조명연합군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
 
8.25 뒤이어 가토군, 전주 입성
- 전주의 경기전에 보전되어 있는 태조의 초상과 실록을 전주 선비인 안의와 손홍록이 지게에 지어 내장산 용암굴에 숨겨 놓고 지켜 보존케 함.
- 전쟁 중 서울의 춘추관과 성주, 충주에 보관된 실록은 다 불타고 전주 실록 만 남아 1603년 이 전주본을 토대로 태조∼명조실록을 다시 인쇄
- 적군 11만 명은 이후 별다른 저항 받지 앟고 공주, 청주, 천안으로 진군
- 선조는 해주로 도망 갈 계획 세우며 평양에 주둔한 명군에게 출동 요청
- 명의 경리 양호가 1만명의 군사 거느리고 남하. 아군 7천명은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음
- 양호는 서울에 부임하여 경리아문 설치하고 조선의 병권 장악
- 선조와 대등한 예로서 접견
- 양호는 관해군에게 남방으로 진출하여 명군의 활동을 돕고 인심을 위로하여 수습하라고 지시하는 등 조선 국왕의 권한을 광범하게 침해.
인사권까지 관여
 
8.30 이순신은 군진을 이진(해남)으로 옮겼다가 다시 진도 벽파진으로 이동
 
9. 6 소사평(직산)전투
- 북상하는 구로다군과 남하하는 명군이 경기의 직산 부근 소사평에서 교전하여 구로다군 대파
- 적은 차격 입고 천안으로 후퇴. 서울 진격 포기하고 성주 쪽으로 밀림
- 적은 이때 극심한 식량난 청야작전이 성공을 거두고 있었음
- 적군은 후퇴하면서 전라도 쪽 진출 결정. 수군은 진도 통과하여 서해안 진출 시도
 
9.14 적선 선발대 55척이 명량으로 몰려오자 이순신은 명량 서쪽으로 군진 이동
- 이 일대의 피란민들을 육지로 올려 보내고 어선 100여 척을 위장하여 전선 곁에 배치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전투를 벌여 적선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사기가 꺽인 조선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
 
-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장악한 이순신은 보화도(寶花島: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음,
- 일본군,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0리에 성을 쌓고 주둔하여 장기전 대비하고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감
 
12.22 *울산전투
- 조명연합군의 총공세. 울산성 완전 포위하여 봉쇄작전 펼침
 
12.31 고니시군 등의 지원군이 울산으로 몰려 연합군은 최후 공세를 펼쳤으나 대패하고 퇴각함
- 적군은 이 승리로 1년간 느긋하게 철수 작전 펼칠 수 있었음
 
 

10. 1598년(선조31) - 임진왜란 7년 (정유재란 2)

1월 울산성 승전 보고 받은 도요토미는 장기 주둔 지시
- 적군은 전라,경상 연안 일대에서 노략질
- 누르하치, 다시 사자를 보내 원병 파견 제의
- 길가에 노포(노점) 설치 하라는 명의 요구 받아들임
 
2월 * 이순신, 고금도(古今島)로 군영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鎭)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시킴.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 수만가를 이루게 됨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 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정도로 성세 (?)
 
* 유성룡 파직.
 
4월 *적군, 지리산의 쌍계사, 칠불암, 연곡사 방화
 
8.18 도요토미 사망(63세). 회군을 명령한 유언이 비밀리에 진행
- 일본은 조선에 사자를 보내 조건부 철수 지시
왕자를 볼모로 하거나 해마다 공물 바치는 조건
 
9월초 명군의 사로병진의 진공작전
- 육상에서는 명의 유정의 추격전. 해상에서는 이순신과 진린이 퇴로 봉쇄
- 유정이 일본군의 뇌물공세에 매수되면서 일본군 소탕의 기회 놓침
 
9.22 명군과 김응서군 울산 공격. 가토군은 방어에만 주력
 
9.27 사천성 전투 - 명군 패배
 
10월 왜교성 전투 - 명군 패배
 
10월초 일본의 사자 부산에 도착하여 철수 지시 -11/15일까지
- 철수 직전 고니시와 명의 유정이 비밀 교섭
- 유정은 고니시에게 많은 뇌물 받고 퇴로 보장
- 진린과 이순신은 이 화의 인정하지 않음
 
11.11 적군의 총철수 결정
 
11.18 * 노량해전
- 가토, 울산에서 철수
- 이순신, 퇴각하는 고니시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동
- 고니시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시마즈, 군함 500여 척 이끌고 노량 기습
- 이순신은 약 5백척으로 구성된 조.명연합 함대를 이끌고 나감. 밤 10시
 
11.19 *이순신 사망. 새벽 불의의 유탄을 맞아 전사하고 일본군은 50여 척만 남기고 도망
-군사들이 "사또"를 부르며 통곡하는 소리가 노량바다를 메움
 
11.20 고니시, 600여 척의 배에 군사 나누어 싣고 광양만 입구에서 노량의 반대쪽뱃길 골라 거제도로 도망
 
1123 고니시군이 부산으로 합류하자 사흘에 걸쳐 완전 철수
 
전쟁의 결과
* 국가 재정의 파탄과 극심한 사회변동
* 명군 22만 군사 동원, 수만 명이 주고 수백만 석의 양곡 소모
일군은 피해가 더 심하였으나 통계 부정확
* 농업생산력 저하
경지농지가 전쟁전 170만 결에서 30만 결로 축소
- 극심한 인구의 이동과 감소에 따른 결과
- 평안도와 함경도, 강원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거의가 피란 길에 오름
* 전쟁포로 수십만 - 일부는 서양으로 팔려감
* 문화재와 건축물의 파괴, 약탈
* 기독교 등 서양 문물의 유입
* 고추 유입
* 전쟁을 통해 은유입 활발해져 은으로 물자 조달하고 거래하는 것이 민간의 습속으로 굳어짐
 
 

11. 1599년(선조32)

7.19 임진왜란 공신 책봉을 위한 심사
- 이조에서 도원수 권율의 추증을 건의하자 사관이 가혹하게 비판
몇 몇 전투에서의 패배, 피하는 전술 주로 사용, 칠량해전에서 원균을 내몰아 죽게한 것 등이 비판의 요지
- 그러나 5년후 공신 책봉에서는 1등공신에 포함
 
12월 사찰의 동철을 모아 전선과 총통 제조
 
? 소 요시토모, 전쟁 책임 문제로 조선과의 화의에 노력
- 1603년까지 몇 번에 걸쳐 828명의 조선인 포로 송환.
 
 

12. 1600년(선조33)

1월 공명첩을 발급하여 군비 보충
 
9.26 명군 철수 완료 - 약 8년 3개월 동안 주둔
 
 

13. 1601년(선조34)

1월 명군 도망병이 무리를 모아 지휘관인 섭정국을 포박하고 병란을 일으키다가 조선 조정에서 군대 동원하여 진압
- 명군 도망병에 의한 민간 폐해 문제 - 평안도가 가장 심함
 
4월 조일전쟁 이후의 효녀와 열녀.충신에게 정표함
 
? 고니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반기 들었으나 패배하여 효수당함
 
 

14. 1603년(선조36)

2.12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 정벌 세력을 타도하여 숙청하고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 시대를 열다
 
 

15. 1604년(선조37)

6.25 * 임진왜란 공신들에 대한 포상
- 호성공신 : 선조를 따라 다닌 공신 - 이항복 등
선무공신 : 무공을 세운 공신 - 이순신, 원균 등
정난공신 : 이몽학의 난을 토벌한 공신
 
* 유정, 일본에 강화사로 감
- 도쿠가와와 회담. - 조선 침략하지 않을 것임과 조선인 포로 3천명의 송환 약속을 받았으나 직접 데리고 오지는 못함
- 10개월 동안 성공적으로 두나라 사이의 관계 개선 위해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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