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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충(杜師忠) 이순신(李舜臣) 임진왜란(壬辰倭亂) 정탁(鄭琢) # 두릉 두씨 # 용사일기
최근 3개월 조회수 : 46 (2 등급)
【문화】
(게재일: 2024.03.12. (최종: 2024.03.13. 17:01)) 
◈ 【이순신해전지순례(2)】이순신을 발탁하고 구원한 정탁
정탁, 이순신과 명 풍수전략가 두사충 구명 앞장... 두릉 두씨 시조
여해(汝海)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1598년 음 11월 19일)은 일본 막부(幕府)의 간사한 계략과 이중 첩자 요시라(要時羅)의 모함으로 1597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한성으로 압송을 당해 한성 의금부에 구금된다.
정탁, 이순신과 명 풍수전략가 두사충 구명 앞장... 두릉 두씨 시조
 
 
여해(汝海)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1598년 음 11월 19일)은 일본 막부(幕府)의 간사한 계략과 이중 첩자 요시라(要時羅)의 모함으로 1597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한성으로 압송을 당해 한성 의금부에 구금된다.
 
이순신의 죄명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왜적을 쫓아서 치지 않고 등진 죄,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죄로 빠뜨린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였다.
 
전쟁 중에 최고 해군 지휘관을 경질하고, 모함에 빠진 이순신을 앞장서서 변호한 이는 우의정 겸 체찰사 이원익과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 병조판서 이덕형, 반곡(盤谷) 정경달(丁景達, 1542~1602) 뿐이었다.
 
 
▲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상(사진:위키백과/동아대학교박물관)
 
 
약포 정탁은 조선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의 문하생으로 올곧은 성품과 함께 넓은 아량으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당파에 가입하지 않고 젊은 인재들을 많이 등용시킨 인물이다. 특히 정탁은 유성룡과 함께 이순신의 진가를 알아보고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천거했다.
 
선조는 자신의 명을 어긴 이순신을 한 달 가까운, 27일간 가혹하게 고문하다 못해 매일 이를 갈고 죽이려고 하였다. 조정 관리들은 선조의 눈치를 보며 이순신의 사형에 모두 동조할 때, 정탁은 1,298자의 이순신옥사의(李舜臣獄事議) 상소문을 올려 이순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변호하였다. 정탁은 임진전쟁 초기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을 보좌하며 모병과 작전, 기획, 의병장 격려를 하면서 173일을 기록한 난중일기인 용사일기(龍蛇日記)를 남겼다.
 
 
▲ 79세의 정탁(1526~1605) 영정, 보물 제487호 (사진:예천박물관)
 
 
용사일기는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과 함께 중요한 전쟁 문헌이다. 용사일기는 선조 25년 7월부터 26년 1월까지 피난길에 분조의 의논 사항을 기록하여 보물 제493-3호로 지정되었다.
 
선조는 충훈부(忠勳府)의 화사(畵師)를 정탁에게 보내 79세의 정탁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조선 중기에서 공신(功臣)의 초상화를 왕이 그리게 하여 한때 크게 유행하였다. 미술학자들은 정탁의 초상화가 “윤곽선이 뚜렷하고, 명확한 칠분면의 얼굴 모습, 자세에 있어서 칠분면의 의도적 과장, 팔꿈치까지 올라온 교의 손잡이, 족좌대 위의 팔자로 벌린 발, 공수한 옷소매 사이의 흰 속옷선, 화려한 색채의 흉배 등을 볼 때 조선 중기 공신도상의 전형적 특징을 보여주는 최고의 작품이다.”라고 평했다.
 
《이순신연구논총》 제24집에는 방상석 박사의 〈이순신을 구원한 정탁의 신구차에 관한 연구-역포집을 중심으로〉 논문에 휴머니스트 정탁에 관한 글이 상세하게 있다.
 
논문에 “정탁은 법의 가치보다 인간의 가치를 우선했던 정탁이었다.” ,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한차례 고문하여 처형을 면하여 주고 관직을 삭탈하여 충군시켰다. (舜臣至獄, 命大臣議罪, 獨判中樞府事鄭琢言: “舜臣 名將,不可殺, 軍機利害, 難可遙度, 其不進, 未必無意, 請寛怒, 以責後效," 拷問一次, 減死削職充軍)”
 
우의정 겸 도체찰사였던 오리 이원익은 충무공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각 상소를 올려 “왜적이 무서워하는 사람은 오직 이순신 한 사람임을 역설하고, 원균을 내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 말했으나 위에서 듣지 않았으므로 그는 이 사람이 죄를 받으니 국사는 다 틀렸다(此人得罪 大事去 矣)고 어이없는 탄식을 연발했던 것이다.(悟里集, 宣廟中興誌).”
 
 
▲ 오리 이원익 1590년 초상화 (사진:위키백과)
 
 
“병조판서 이덕형(1561~1613)도 혼자서 따로 들어가 선조께 충무공을 구해내기 위해 노력했다(漢陰年譜 丁酉二月). 일찍 충무공 막하에서 종사관이 되었던 정경달도 선조대왕께 직접 들어가 누구보다도 가장 강경한 언사로 아뢰었던 것을 본다. 이순신이 나라를 위하는 정성과 적을 방어하는 재주는 옛날에도 그 짝이 없다고 봅니다. 전진에 다다라 머뭇거린 것도 역시 군사상 승산 계획이었지 어찌 기회를 관망하고 형세를 살피기 위해서 방황하고 싸우지 않는 것이라 하여 죄만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상감께서 만일 이 사람을 죽이신다면 사직이 망할 것인 데야 어찌하오리까.” 하였다.
 
 
▲ 선조 어진 추정?(제위:1567~1608)(사진:위키백과)
 
 
선조는 비망기에 “이순신이 조정을 속인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하여 죄에 빠뜨렸으니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으니, 율(律)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
 
이때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과 행지중추부사 정탁이 앞으로 나섰다. 체찰사(體察使)는 고려 말부터 지방에 파견하여 비상시에 군대를 지휘하거나 군사 업무를 담당한 관리로 원수(元帥)를 겸했다.
 
 
▲ 약포 정탁의 신구차(伸救箚)(사진: 예천박물관)
 
 
정탁은 이순신을 살려야 한다는 이순신옥사의(李舜臣獄事議) 상소문을 올리고, 왕이 친국하는 자리에서 큰 소리로 상소문을 소리 내어 읽었다. 선조가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벌을 명하라고 재촉하지만, 이원익 대감은 말 한마디도 안 했다. 길가의 선 장승처럼 끔쩍하지 않았다.
 
이원익은 조선 태종의 열두 번째 아들 익령군(益寜君)의 4대손으로 청렴하고 학문이 뛰어나고 명망이 아주 높았다. 정유년 1597년 음력 3월(선조 30년) 정탁 선생 72세 때 기록이 남아있다. “이순신은 무고입니다. 저의 의론은 이렇습니다. 이순신이 이미 자기 능력으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조정에서 통제사의 칭호를 내려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순신의 공과 능력에 대해 혹시 논의할 만한 것도 있을 듯합니다. 지금 이순신이 옥에 갇힌 것만 해도 이미 율명(律名)이 매우 엄중하다는 것은 만천하에 보여주었으니, 임금님은 공이 있고 재능이 있다는 의론으로 특명을 내려 사형을 감해주어 그가 공을 세워 보답하게 한다면, 조정에서 처리하는 도리가 마땅함을 잃지 않을 듯합니다. 신이 부질없는 소견이 있어서 감히 성총을 번거롭게 하여 황공하기에 그지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주상 전하께서 재가하여 주십시오.”라고 정탁은 말하였다.
 
당시 정탁은 이순신보다 19살이 많아 갑오년(1594)엔 종1품 찬성, 을미년(1595)엔 정1품 우의정, 병신년(1596)엔 정1품을 지낸 영중추부사였다. 정탁은 조선 조정의 핵심 관료로서 그동안 임진전쟁의 전체 상황 파악을 위해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꾸준히 편지로 소통하며 모든 정보를 교환했었다.
 
이순신의 우국충정을 너무도 잘 아는 정탁이 이순신을 살리려고 목숨을 내놓고 달려든 것은 진정으로 왕실을 살리고 곧 조선을 살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정탁은 황희의 후손인 황정욱(黃廷彧, 1532~1607)과 그의 아들인 황혁(黃赫, 1551~1612)을 구했다. 황혁은 일본에 두 왕자와 끌려갔다가 1593년 조선에 돌아왔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정양향사(南征糧餉使)로 군량미를 조달했던 성영(成泳, 1547~1623),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1565~1624) 등이 곤경에 처하자, 적극적으로 옹호해 목숨을 구해주었다. 정탁은 <김덕령옥사계>를 저술했다.
 
진병용 박사는 대구사학 제119권(2015)에 〈두사충(杜師忠)의 생애와 모명재(慕明齋)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발표했다. “풍수지리의 대가인 두사충은 1592년 12월 명나라의 조선 원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이여송 휘하의 참모인 수륙지획지사(水陸指劃主事)로 병영과 진터를 구축하는 임무를 맡아 활약했다.
 
그는 선조 26년(1593년) 1월 이여송이 일본군 제1군 총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지키는 평양성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평양성 승전의 여세를 몰아 개성까지 진격한 명나라 군대는 일본군을 얕잡아 보고 서두르다가 벽제관(碧蹄館) 싸움에서 대패를 당한다. 패전의 책임이 진(陣)을 잘못 쳤다는 이유로 모두 두사충에게 돌아갔다.
 
조선 조정에서 그를 처형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그 당시 우의정으로 접반사(接伴使)였던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죄를 면해줄 것을 건의하여 목숨을 가까스로 건졌다.”
 
1593년 1월 27일 벽제관(碧蹄館) 싸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를 당한 명나라는 패전의 책임으로 풍수전략가인 두사충에게 참수형을 명했다. 좌찬성 정탁은 이여송을 찾아가 두사충은 죄가 없다고 적극 변호를 했다.
 
명나라가 지게 된 원인은 진지의 위치를 잘못 택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의 지세(地勢)가 명과 분명히 다른데, 어찌 풍수로 사람의 운명을 논하냐”고 말하며 “두사충을 죽이느니, 필요가 없으면 나에게 달라.”라고 읍소했다.
 
두사충은 정탁의 도움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감여유결(堪輿遺訣)》이란 풍수지리서를 지어 예천 명당 10곳을 일러 주었다. 두사충은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유정(劉綎)을 총사령관으로 삼은 조선 원군의 일원으로 다시 조선에 왔다.
 
이번에는 아들 산(山)과 일건(逸建)을 조선에 데리고 와서 매부인 진린(陳璘) 도독 휘하의 비장(裨將)의 직책으로 싸웠다. 이때 관직은 복야(僕射) 또는 태사(太師)로 불리며 전장을 누비면서 기습과 정공을 통한 잇단 왜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
 
모명선생실기(慕明先生實紀)의 동국동유록(東國同遊錄)에는 두사충이 정철, 정탁, 류성룡, 윤두수,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정경세, 김상헌 문신(文臣)은 물론, 이순신과 권율을 비롯한 무신(武臣)들과도 교분을 나누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충무공 이순신과는 노량(露梁) 해전에 함께 출정하였고, 한산도에 주둔하면서 서로 만나 옛 친구 만난 듯 서로 시를 지으며 친분을 다졌다. 충무공은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시로 화답했다.
 
 
북거동감고(北去同甘苦)
동래공사생(東來共死生)
성남타야월(城南他夜月)
금일일배정(今日一盃情)
 
북녘 땅에선 고락을 함께 하고.
동으로 와서는 사생(死生)을 같이 하네!
성(城) 남쪽 이 밤도 달빛 아래 함께 노닐며,
오늘 이 한잔 술로 정을 나누세 그려.
 
 
두사충은 임진전쟁이 끝난 후 명에 돌아갔다가, 조선에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두사충의 묘는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형제봉 기슭에 있고, 묘 아래에 모명재(慕明齋) 재실이 있다. 두사층은 한국 두릉 두 씨의 시조로 중국 관광객이 대구시를 방문하면 꼭 들리는 명소이다.
 
 
▲ 모명재(慕明齋)
 
 
정탁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 백곡(栢谷),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저서는 『약포집』,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약포 정탁이 임진왜란 중 치안 사정과 정치적 동향을 살피고 의견을 적은 『용사잡록(龍蛇雜錄)』 등이 있다.
 
정탁은 예천 출신으로 증조부는 현감 정원로(鄭元老), 조부는 생원 정교(鄭僑), 아버지는 정이충(鄭以忠), 어머니는 한종걸(韓終傑)의 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 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正言)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 헌납(獻納)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직하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吏曹佐郞), 도승지, 대사성(大司成),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 도정서원(道正書院)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다음 해 돌아와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예조, 형조, 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2년 임진전쟁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 지리, 상수(象數),‧병가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통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추천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하였으며, 1595년 우의정이 되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전 모함을 받은 이순신이 파직되어 고초를 겪자 죽음을 무릅쓰고 선조에게 그를 구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1600년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오르고 다음 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錄勳)되었으며, 1604년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 되었다.
 
 
▲ 도정서원(道正書院)
 
 
2020년 12월 9일 청주 정씨 고평 종중에서는 정탁 유물 38점을 예천박물관에 기탁하였다. 예천박물관은 연 30,000명이 다녀갈 정도로 관람할 유물이 많고, 2023년 ‘공립박물관 평가 인증 심사’를 통과하여 유물 수집, 전시와 교육, 수장고 증축 등 앞으로 발전이 기대된다. 예천 군민의 자긍심이 매우 높은 박물관이다.
 
 
▲ 2022년 예천박물관 기증, 기탁자의 날(사진:예천박물관)
 
 
조선왕조실록 사관(史官)들의 정탁에 대한 평가는 아주 날카로웠다. “행지중추부사 정탁은 자상하고 온화하며 한결같이 순하고 착하여 사람들이 자비대사(慈悲大士)라 하였다.” 정탁은 누구라도 죄인이라고 해서 억울함을 당하지는 않는지, 약자라고 해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는지 항시 헤아리고 보살폈던 인권 옹호자였다. 몸가짐이 산승(山僧) 같아 승상(僧相)이라 했던 정탁은 법의 기준보다 인간의 권리를 우선했던 조정의 중심추 같은 충신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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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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