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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太祖) 기우제(祈雨祭) 문무 대왕릉(文武大王陵) 부석사(浮石寺) 용(龍) 처용(處容) 통도사(通度寺) 황룡사지(皇龍寺址) # 2024년 # 용신제 # 용왕굿 # 용왕제 # 풍어제 # 황룡사
최근 3개월 조회수 : 4 (5 등급)
【문화】
(게재일: 2024.01.08. (최종: 2024.01.08. 09:25)) 
◈ 용(龍)의 전설(傳說)은 뭐가 많을까?
2024년은 갑진년으로 용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우리나라에 일찍부터 용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 오고 있다.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가 계룡(鷄龍)을 배경으로 탄생하였고, 탈해왕은 일찍이 28 용왕이 다스렸던 용성국(龍城國)에서 신라로 와서 신라의 4대 왕이 되었다. 또 신라의 거타지(居陁知)는 활을 쏘아 여우를 잡아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게 된다는 등 용에 얽힌 갖가지 설화들이 전래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전설, 설화, 용왕굿 및 기우제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2024년은 갑진년으로 용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우리나라에 일찍부터 용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 오고 있다.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가 계룡(鷄龍)을 배경으로 탄생하였고, 탈해왕은 일찍이 28 용왕이 다스렸던 용성국(龍城國)에서 신라로 와서 신라의 4대 왕이 되었다. 또 신라의 거타지(居陁知)는 활을 쏘아 여우를 잡아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게 된다는 등 용에 얽힌 갖가지 설화들이 전래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전설, 설화, 용왕굿 및 기우제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 용왕의 아들 처용(處容)과 부적
 
처용은 동해 용왕의 아들로 신라 헌강왕(재위 875~886)을 따라 경주로 와서 정사를 도왔다. 역신(疫神)이 처용의 아름다운 아내를 탐해 동침했으나 노여워하지 않고 춤추며 노래(처용가)를 부르자 감동하여 향후 당신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처용의 모습을 그린 부적(符籍)을 문 앞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는 풍습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 경주 황룡사(皇龍寺) 창건 설화 및 황룡사 9층 탑
 
553년(신라 진흥왕 14) 2월,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 궁성인 월성(月城) 동쪽에 있는 용궁(龍宮)의 남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고 하는데, 그곳에 황룡(皇龍)이 나타나자 궁궐 대신 절을 짓고 황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황룡사는 17년간의 공사 끝에 569년(신라 진흥왕 30)에 완공되었다.-삼국유사(三國遺事)-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 율사가 왕에게 청하여,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구층탑을 조성하게 하였다. 백제에서 온 공장(工匠)인 아비지(阿非知)로 하여금 목재와 석재로 탑을 지었다. 이후 탑은 여러 차례 벼락을 맞아 계속 중수되었는데, 1238년(고려 고종 16)에 몽고의 병화(兵火)로 장육존상, 황룡사 전각과 함께 불에 타 버렸다.
 
▼ 양산 통도사(通度寺) 창건 설화
 
신라 자장율사가 석가모니가 설법을 했던 인도 영축산과 닮은 축서산(현재 영축산)에 절을 짓기로 했다. 하지만 절터 큰 연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이미 살고 있었다. 자장율사는 절을 짓겠다며 떠나줄 것을 요구했지만, 용들은 응하지 않았다. 이에 자장율사가 종이에 '화(火)'자를 써서 하늘로 날리자, 연못의 물이 끓어올랐고 용들이 도망하기 시작했다. 아홉 마리 용들 중 다섯 마리는 남서쪽으로, 세 마리 용은 동쪽으로 각각 달아났다. 마지막 한 마리 용은 '눈이 멀어 갈 수 없으니 연못에 남아 절을 지키겠다'고 간청했고, 자장율사는 조그만 연못을 만들어 그곳에 살도록 했다. 그 연못이 통도사 대웅전 옆에 있는 구룡지(九龍池)이란다.
☞아래 사진은 구룡지와 장엄등(용)
 
☞여기 구룡지(九龍池)처럼 비슷한 내용은 원주 치악산 구룡사(대웅전 자리에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을 메우고 사찰 창건), 여주 신륵사의 구룡루(누각 아래에 물이 모여 연못이 되었고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 함)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사찰 전각에 용조각과 운용도(雲龍圖)가 있다.
▼ 문무 대왕릉(암)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년)은 유언에 따라 동해에 묻혔다. 그의 유언은 불교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침략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유골은 동해 입구의 대왕암에 수장되었다.
682년 용이 된 문무왕을 위해 신문왕(神文王)은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기슭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우고 동해 쪽으로 구멍을 뚫어 용이 들어와 쉴 수 있도록 하였다. 이어 용이 일러준 대로 동해에 솟아난 작은 산의 대나무로 피리로 만들어서 불자 천하가 화평해지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이룰 수 있었다. 만 가지 파도를 잠재워 평온하게 한다는 뜻에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른다.
 
 
▼ 의상 대사 귀국을 도운 선묘(善妙)와 영주 부석사(浮石寺) 창건 설화
 
신라 의상을 흠모하던 당나라의 여인 선묘는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알고 그에게 줄 법복과 여러 집물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이들을 배에 싣기도 전에 의상의 배가 신라로 떠나가자 잘 되기를 바라고서 상자를 바다에 던졌고 배를 호위하는 용이 되어 무사히 신라에 도착하게 하였다.
신라에 도착한 의상은 태백산에 화엄의 중심 사찰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그곳에 들끓고 있던 도적 무리의 방해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선묘가 큰 바위로 변해 공중에 뜨자 혼비백산한 도적들이 흩어져 사찰을 창건하게 되고, 사찰을 부석사(浮石寺)라 하였다. 조선시대 부석사 우물에 선묘 용이 머무른다고 하여 기도처가 되었고 선묘각을 세웠다.
 
▼ 백제 무왕(武王)
 
『삼국유사』의 백제 무왕 전설(百濟武王傳說)에 따르면 백제의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남쪽 연못 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그를 낳고 어릴 때 이름을 서동(薯童, 감자 파는 애)이라고 하였다. 부여 서동 연꽃 축제(궁남지)와 익산 서동공원 이름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아래 사진은 부여 궁남지의 포룡정(抱龍亭)과 익산 서동 공원의 무왕 동상
 
 
▼ 고려 태조 왕건(王建)
 
≪고려사≫ 세가(世家)에 수록된 왕건의 선대 이야기로 왕건의 할아버지는 작제건(作帝建)이라 하는데, 중국으로 아버지를 찾아가다 황해에서 용왕을 만나 용궁을 혼란하게 하던 여우를 퇴치해 준 대가로 용왕의 딸인 용녀와 혼인하고 왕가를 이루게 된다.
작제건은 용녀에게서 네 아들을 얻었는데, 장남을 용건이라고 하였다. 용건은 후에 이름을 융(隆)으로 고치고 자는 문명이라고 하였으니 이가 곧 왕건의 아버지다. 용건은 어느 날 꿈에 한 미인을 만나 부부가 될 것을 약속했다. 꿈을 깨고 송악산 영안성으로 가는 길에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가 바로 꿈에서 본 여자였다. 그래서 용건은 그녀와 혼인했다. 사람들은 용건이 꿈에서 보았다 하여 그녀를 몽부인이라 불렀다. 그리고 혹자는 말하길 그녀가 삼한의 어머니가 되었기에 성을 한씨라고 했다고 한다. 그녀가 곧 왕건의 어머니 한씨(韓氏)다.
 
 
▼ 용왕제(풍어제)
용은 어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숭배 대상이다. 그것은 용이 바다 밑의 용궁에 살면서 바다를 지배하는 용왕으로 전승되어왔기 때문이다. 용왕의 음우(陰祐:넌지시 도와줌)로써 안전한 항해와 조업, 그리고 풍어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용왕제 · 풍어제이다.
용왕제는 주로 어촌의 부녀자들이 음력 정초나 2월 초의 만조 때를 택하여 부두, 구석진 바닷가, 방파제 끝 등지에
선장이나 선주가 제주를 맡고, 선장실( 배 위)나 해변가에 촛불을 켜 놓고 메·건포 등 간단한 제수를 마련하여 용왕에게 가족의 안전과 풍어를 비는 의식이다. 그러한 의식이 끝나면 차려놓았던 제물을 골고루 조금씩 떼어 세 덩이를 만드는 것이 원칙이지만, 가족 중에 익사한 사람이 한 사람 있을 때는 제물 덩이를 한 덩이 더 만든다. 제물 덩이를 백지로 싸서 한 덩이 한 덩이 멀리 바다에 던지며 용왕으로 하여금 기꺼이 그 제물을 받아주기를 마음속으로 빈다(충청남도 보령군).
풍어제는 어촌의 전 주민들이 온갖 정성을 모아 공동의 제장에서 그들의 공동 목적인 항해의 안전, 안전한 조업, 풍농, 풍어, 그리고 마을의 태평을 기원하는 집단의 집단의식으로, 이를 당굿 또는 별신굿이라 하기도 한다.
 
▼ 용왕굿(용신제)
 
사람은 물을 외면하고서는 잠시도 살아갈 수 없다. 특히, 농경민족에게 있어서 물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물을 지배하는 것으로 믿어져온 용은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신라시대의 ‘사해제(四海祭)’ · ‘사독제(四瀆祭)’(『三國史記』 卷 三十二 雜志 第一), 고려 시대의 ‘사해 사독제’(『高麗史』 世家 四十二), 조선시대의 각처에서의 각종 용신제 등이 모두 그러한 용을 대상으로 한 국가 의식으로서, 그것은 생명의 원천이면서 농경의 절대적 요건인 물을 풍족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승되고 있는 용왕굿은 촌락 사회 어디에서나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으로서 식수의 고갈을 예방하고자 하는 의식이다. 어느 마을에서나 언제든 농악대가 우물곁을 지날 때는 반드시 그 우물에 들러 우물 주위를 빙빙 돌며 빠른 농악을 울리다가 갑자기 농악을 뚝 그치고 나서 상쇠 잡이가 우물을 향하여 “물주쇼, 물주쇼. 용왕님네 물주쇼. 뚫어라, 뚫어라. 물구멍만 펑펑.” 하고 기원한다. 기원하고 나서 다시 빠른 가락의 농악을 한바탕 울린 다음 그 우물을 떠나는 것이 하나의 관례이다. 이를 보통 샘굿 또는 용왕굿이라 한다. 한편, 농가에서는 음력 6월 15일 (유두일)이 되면 논의 물꼬에 보리개떡이나 밀개 떡을 한 덩이 쪄다 놓고 마음속으로 풍년을 비는 일이 있는데 이를 유두제 또는 용신제라고도 한다.
 
▼ 기우제(祈雨祭)
 
용은 비를 오게 하거나 멈추게 할 수 있는 조화 능력을 지닌 수신으로 믿어 가뭄 때 기우(祈雨)의 중요한 대상인 신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이미 신라시대에서부터 기우에 용이 등장되었던 사실은 여러 문헌을 통하여서도 살필 수 있다.
왕실에서는
ⓐ용의 화상을 그려놓고 비를 빌었다거나(夏大旱移市 畫龍祈雨, 『三國史記』 卷 三十四 眞平王 五十年條),
ⓑ 흙으로 용상(龍像)을 만들어놓고 무당들로 하여금 비를 빌게 하였다.(庚午 造土龍於南省庭中 集巫覡禱雨, 『高麗史』 世家 四十 顯宗 十二年 四月條; 四月癸巳 又禱 辛丑 司以久旱 請造土龍 又於民家畫龍禱雨, 『高麗史』 志 八 五行二)
ⓒ또한 오해신(五海神.동 · 서 · 남 · 북 · 중앙의 다섯 용왕)에게 비를 빌기도 하였다.(己亥 祈雨于五海神, 『高麗史』 世家 十 肅宗十三年 四月條).
ⓓ비가 오지 않아 동교(東郊)에서 토룡제를 거행하기도 하였고(祭土龍于東郊禱雨, 『朝鮮王朝實錄』 太宗 十四年 六月條),
ⓔ기우제 차례를 개정하다.
첫 번째로 삼각산(三角山. 북한산)·목멱산(木覓山. 남산)·한강(漢江)에 3품관(三品官)을 보낸다.
두 번째로 용산강(龍山江)과 저자도(楮子島. 서울숲과 응봉산 사이의 섬으로 현재 사라짐)에 재신(宰臣)을 보낸다.
세 번째로 풍운 뇌우(風雲雷雨)· 산천(山川)· 우사(雩祀)에 재신을 보낸다.
네 번째로 북교(北郊, 창의문 밖)에는 재신을 보내고 사직(社稷)에는 중신(重臣)을 보낸다.
다섯 번째로 종묘(宗廟)에 중신을 보낸다.
여섯 번째로 삼각산·목멱산·한강·침호두(沈虎頭.범 모양을 만들어 용산강龍山江에 잠그는 것)에 근시(近侍)를 보낸다.
일곱 번째로 용산강과 저자도에 중신을 보낸다.
여덟 번째로 풍운 뇌우·산천·우사에 중신을 보낸다.
아홉 번째로 북교에는 중신을 보내고 모화관(慕華館. 현 서대문 독립관) 연못가​의 석척 동자(蜥蜴童子. 푸른 옷을 입고 도마뱀을 잡아넣은 독을 들고 물가에 가서 기우제를 지내는 동자)는 무신(武臣)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보내며, 여염(閭閻. 백성 살림집)에는 병류(屛柳. 처마 끝에 버드나무 가지 마개를 한 물병을 거꾸로 매다는 것) 한다.
열 번째로 사직에는 대신(大臣)을 보내고, 경회루(慶會樓. 고종 때 중건) 연못가의 석척 동자는 무신 가선 대부를 보낸다.
열한 번째로 종묘에는 대신(大臣)을 보내고 춘당대(春塘臺, 현 창경궁) 연못가의 석척 동자는 무신 가선 대부를 보내며, 남문(南門)을 닫고, 북문(北門)을 열며 저자[市. 시장]를 옮긴다.
열두 번째로 오방 토룡제(五方土龍祭)를 지내고, 양진(楊津)·덕진(德津)·오관산(五冠山)·감악(紺岳)·송악(松岳)·관악(冠岳)·박연(朴淵)·화적연(禾積淵)·도미진(渡迷津)·진암(辰巖)에는 분시(焚柴, 섶을 태워 연기를 피워 올려서 하늘에 비를 비는 일)하되, 모두 본도(本道)로 하여금 설행(設行) 하게 한다. -1704년(숙종 30) 6월 26일 -
 
기우제를 지내 효험이 있었던 곳(47)은
경기(4) 【적성의 용지(龍池)와 용두산(龍頭山), 안성(安城)의 서운산(瑞雲山), 금천(衿川)의 대택(大澤).】
강원도(6) 【간성(杆城)의 오음산(五音山), 홍천(洪川)의 가리산(加里山), 안협(安峽)의 제당연(祭堂淵), 삼척(三陟)의 황지(黃池)와 두타산사(頭陀山祠), 양구(楊口)의 사명산(四明山).】
충청도(3) 【덕산(德山)의 용연(龍淵), 목천(木川)의 취암산(鷲巖山), 단양(丹陽)의 상악산(上嶽山).】
전라도(7) 【영광(靈光)의 무악산(毋岳山), 금구(金溝)의 용지(龍池), 무장(茂長)의 고산(高山), 함열(咸悅)의 지묵정(池墨井), 고산(高山)의 용연(龍淵), 순창(淳昌)의 적성진(赤城津), 여산(礪山)의 격항(隔項).】
경상도(8) 【울산(蔚山)의 입암연(立巖淵), 영산(靈山)의 법사지(法師池), 성주(星州)의 태자암(太子巖), 선산(善山)의 이매연(鯉埋淵), 고성(固城)의 용수암(龍水巖)과 벽산(碧山), 의성(義城)의 혈동천암(穴洞穿巖), 밀양(密陽)의 백연(白淵).】
황해도(4) 【신계(新溪)의 노연(蘆淵), 은율(殷栗)의 구월산(九月山), 신천(信川)의 천봉산(天奉山), 장연(長淵)의 용정(龍井).】
평안도(10) 【귀성(龜城)의 부연(釜淵), 성천(成川)의 박연(博淵), 평양(平壤)의 구룡산(九龍山)과 우정(牛井), 중화(中和)의 마정(馬井), 맹산(孟山)의 원지(圓池), 영원(寧遠)의 무연강(無淵江), 영변(寧邊)의 용추(龍湫), 운산(雲山)의 백벽산(白碧山)과 운대산(雲臺山).】
함경도(5) 【영흥(永興)의 국태산(國泰山), 이성(利城)의 회산(檜山), 경성(鏡城)의 장자택(長者澤), 경흥(慶興)의 백악산(白岳山), 회령(會寧)의 쌍개암(雙介巖).】 등이었다. -1531년(중종 26) 5월 17일-
일반 민가에서는 비가 오지 않으면 특히 용자(龍子:용왕의 아들)가 들어 있는 연못(池 · 淵 · 潭 · 沼)이나 내 · 강 · 바다 · 산 · 바위 등지에서 기우제를 지내거나 그곳의 물을 병에 넣어 솔잎으로 막아 사립문에 거꾸로 매다는 등 주술적인 방법으로 비를 빌기도 하였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시사뉴스피플, 민족문화 대백과, 국립민속박물관. 문화재청, 익산시, 경주시, 조선왕조실록, 규장각,구글, 네이버,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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