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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해전지순례(1)】해양탐험가 조원옥 선생과 ‘이순신 장군의 임진전쟁 49개 해전지 탐사’를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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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李舜臣) 임진왜란(壬辰倭亂) # 군함도 # 백의종군길 # 오가사와라 제도 # 오문수 # 조원옥
최근 3개월 조회수 : 47 (2 등급)
【문화】
(게재일: 2024.03.11. (최종: 2024.03.11. 12:03)) 
◈ 【이순신해전지순례(1)】해양탐험가 조원옥 선생과 ‘이순신 장군의 임진전쟁 49개 해전지 탐사’를 기획
해양탐험가 조원옥 선생, 김옥균-유길준 유배지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정비 마치고 출항
여수에 사는 오문수 형님이 “궁 선생! 4월에 뭐 해?”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필자는 그냥 “책 보고, 글 쓰고, 여행 가고 그러지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형님은 “순천 조원옥 선생이 요트로 전 세계 일주 항해를 계획하고 있는데, 출항하기 전에 이순신 장군의 해전지를 전부 순례하고 싶어 팀을 구성하려고 해, 조금 도와줘!”라고 말했다.
해양탐험가 조원옥 선생, 김옥균-유길준 유배지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정비 마치고 출항
 
여수에 사는 오문수 형님이 “궁 선생! 4월에 뭐 해?”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필자는 그냥 “책 보고, 글 쓰고, 여행 가고 그러지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형님은 “순천 조원옥 선생이 요트로 전 세계 일주 항해를 계획하고 있는데, 출항하기 전에 이순신 장군의 해전지를 전부 순례하고 싶어 팀을 구성하려고 해, 조금 도와줘!”라고 말했다.
 
 
▲ 이순신 장군의 주요 해전
 
 
조원옥 형님은 여수에 정박한 범선 코리아나 호에 승선하여 15년간 일본과 중국을 항해했다. 필자는 2017년에 일본 나가사키 범선 축제에 참여했다. 코리아나 호가 일본 항구에 입항하면 관광객들이 배에 올라와 배 안의 시설을 구경해 선원들은 자유롭게 외출한다.
 
 
▲ 일본 나가사키 군함도 앞에서 선 조원옥(장소; 수선화 언덕)
 
 
형님이 아침 일찍부터 외출 준비를 하길래 “어디 좋은 데 가시나요?”하고 물었다. 형님은 “나 볼 일이 좀 있어.” “어디 가시는데요, 같이 가면 안 돼요?” 말하니까 “매년 가는 곳이 있는데, 조금 멀어 같이 갈까?” 형님과 함께 2시간 정도 걸리는 군함도가 보이는 곤겐야마 공원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갔다. 나가사키 반도 남단에 있는 군함도 온천은 여러 번 방문했지만, 온천 옆에 있는 바닷가 수선화 언덕은 처음이었다.
 
 
▲ 나가사키 군함도 온천
 
 
형님은 군함도가 보이는 수선화 언덕에 올라 군함도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쑥 “나 동생에게 고백할 게 있어, 태평양을 한번 건너고 싶어!, 세계 일주도 하고 싶어”라고 말을 했다. 필자는 “형님! 자기의 간절한 소원이 생기면 실천하려고 노력해야지요.”라고 가볍게 답했다. 당시 태풍 14호가 대마도 지역을 통과해 집이 많이 파괴되고 피해가 많이 발생해 그냥 하는 이야기로만 알았는데, 농담이 아닌 진짜였다.
 
 
▲ 나가사키 군함도 기념관
 
 
필자는 수선화 언덕에서 군함도를 오래 바라보면서 군함도 하시마 해저 탄광에 끌려온 강제징용자들과 노역에 지친 노동자를 생각했다. 나가사키에 사는 기무라 선생님은 범선이 항구에 입항하면 시간을 내어 우리 일행에게 주변의 관광지를 알려주었다. “군함도에서 노동하다 탈출해 육지까지 헤엄쳐 와서 거의 기진맥진해 숨진 청년들을 바닷가에 사는 일본인들은 경찰 몰래 숨겨주고, 죽어서 땅에 묻어주고 비석을 세워주었다.”라고 말하며 조선 청년의 묘를 안내했다. 처음에 갈 때는 언덕까지 갈 수가 있었는데, 다음에 방문했을 때는 출입하는 길을 막아 놓아 도로 옆에 있는 묘를 방문하여 슬프게 돌아가신 영혼을 위로했다.
 
 
▲ 하시마 섬(군함도)을 탈출한 징용자들의 묘비(2016.4.23.촬영)
 
 
조원옥 형님은 전남대학교 상대를 졸업하고, 교직에 있다가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러나 고향 바다가 그리워 고향 순천에서 묘목 정원수를 30년 생산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배를 타고 다니면서 항해술을 배워 어릴 적의 소원을 이루고 싶어 일본 나가사키 범선 축제가 끝나자, 미국 서부에 있는 항구 도시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갔다.
 
미국에 건너가 85세로 투병 중인 요트맨 소트버그(Sorteberg)의 요트 Midnighr Star호를 구입했다. 노인은 젊은 시절 요트대회에서 자주 우승한 선수였다. 현지에서 여러 날 머물면서 요트가 항해가 가능한지 시운전을 하였다. 통신 항해 장비를 모두 갖추고, 2018년 1월 6일 로스앤젤레스를 김현곤과 함께 22일간 항해하여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비록 항해 중에 돌풍으로 메인 세일 트랙이 파손되고, 제노아 세일이 파손되고, 오토파일럿이 고장이 났지만, 항해에 큰 지장은 없었다.
 
휴식을 마치고 2월 16일 혼자서 출항했는데 엔진이 이상하고, 자동항법장치가 고장이 나 바로 회항했다. 전문가가 요트를 점검하다가 돛과 돛대를 지탱하는 스테인리스 와이어를 고정하는 뱃머리 말뚝이 부식한 것을 발견해 수리했다.
 
3월 17일 오키나와를 목표로 하와이를 출항했지만 새로 산 오토파일럿 장치가 다시 말썽을 일으키고, 고장이 나서 수동으로 전환했다. 전기를 공급하는 변압기도 고장이 나고, 바람도 제대로 불어오지 않았다. 여러 날 항해했는데 항상 제자리에 있었다. 태평양 큰 바다에서 둥둥 떠다니다가 살아야겠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이순신 장군의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면 산다.”라는 글이 떠올랐다. 그렇게 70여 일이 지났는데 멀리서 생선 냄새가 났다. 5월 20일 아침 지도를 보니 동경에서 1,000km 떨어진 오가사와라 제도 지치지마 섬 옆이었다.
 
 
▲ 태평양에서 항적이 표시된 해도(사진:조원옥)
 
 
오가사와라 제도는 김옥균이 머문 섬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이 하도 송환요청을 하고 암살단이 자주 파견되어, 1886년 8월 8일 일본 경찰이 김옥균을 요코하마에서 불법으로 체포하여 태평양 고도인 오가사와라 제도로 유배를 보냈다. 23일 만에 도착한 섬은 너무 멀어 1년에 4번밖에 배가 다니지 않는다.
 
김옥균은 섬에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다가 1881년 1월 50km 떨어진 하하지마로 이주했다. 김옥균은 질병으로 일본 정부에 청원을 신청하여 1887년 7월 홋카이도 삿포르에 이송하였다가 1889년 10월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김옥균은 1894년 청나라 실세인 리홍장의 양아들 리진펑(李經芳)의 초대를 받아 상하이로 건너가 리홍장을 만나 조선의 장래에 대한 협상을 구상한다. 후쿠자와 유키치 등 많은 사람이 김옥균에게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3월 34일 경호인 와다 겐지로, 홍종우와 함께 고베항을 떠나 3월 27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3월 29일 오후 4시 김옥균은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다. 경호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조선에서 보낸 밀정 홍종우가 침입하여 3발의 총을 쏴 절명했다. 조선을 개혁하려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혁명가 김옥균은 안타깝게 43세로 눈을 감았다.
 
 
▲ 4년간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유배당한 유길준
 
 
또 한 명의 개혁가 유길준(俞吉濬, 1856~1914)도 일본 정부의 의해 1902년 강제로 오가사와라 제도 하하지마, 하치조지마에서 4년간 유배를 당했다가 풀려났다. 유길준을 먼 섬으로 보낸 이유는 조선 병탄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미리 조치를 가했다. 유길준은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제 합방을 강력하게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유길준은 곧바로 흥사단을 조직해 대항을 시작했다.
 
해양탐험가 조원옥은 10일간 정비를 마치고 6월 1일 일본 오가사와라 제도를 출항했다. 선각자 김옥균과 유길준을 생각하며 항해를 계속했는데, 규슈 근해에서 강력한 태풍을 연속으로 만났다. 너무 바람이 세고 항해를 도저히 할 수 없어 요트 선내에 들어가 밧줄로 몸을 묶고 태풍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요트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나 폭풍과 사투 끝에 2018년 6월 23일 여수 소호요트경기장에 입항했다. 그때 나이가 67세였다.
 
 
▲ 해양탐험가 조원옥(2018.6.23. 여수 도착 사진)
 
 
필자는 해양탐험가 조원옥 형님이 하고 싶어 하는 ‘임진전쟁 49 해전지 항해’에 참여하기로 약속하고 한 달간 이순신 장군에 관한 책과 해전지 49곳을 모두 조사했다. 특히 이봉수 이순신학교 교장이 저술한 《이순신이 지킨 바다》는 임진전쟁의 참혹상, 일본 장수들의 간계와 음모, 조선 선비들의 충성,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지략, 해전도(海戰圖), 사찰과 승려들의 헌신적인 참여, 섬 주민들의 공헌을 알 수가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정유년(1597) 초에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는 정유재란을 앞두고 이순신을 반간계로 몰아낼 구상에 몰두했다. 일본에서 고니시의 지령을 받은 요시라는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모월 모일에 부산 쪽으로 쳐들어오니 바다에서 미리 기다렸다가 습격하면 일본 해군을 모두 전멸시킬 수 있다.”라고 군사 정보를 흘려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가 전 함대를 이끌고 부산 해역에서 도착하도록 작전을 꾸몄다.
 
이순신은 이를 간계로 의심하고, 일체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게 단속했다. 이런 첩보를 경상우병사로부터 받은 선조와 조정은 거듭 이순신에게 출전을 권유했지만,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는 출전의 부당함을 계속 주장했다.
 
 
▲ 백의종군길 670km(사진:한국체육진흥회)
 
 
이후 사헌부는 통제사 이순신을 잡아 법률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국왕에게 건의했고, 선조는 2월 6일 이순신의 파직을 명하고, 승정원 동부승지 김홍미(金弘微)에게 이순신을 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이순신은 2월 10일 부산포로 출전했다 복귀했다.
 
이순신은 2월 25일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었다. 다음날 2월 26일에 원균에게 군사를 인수인계하고 한양으로 끌려와 3월 4일 옥에 구금된 이후 심문과 고문을 당하는 등 모진 고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원익과 행지중추부사 정탁의 눈물 어린 호소로 사형을 면하고 음력 4월 1일 방면되었다. 4월 2일 류성룡을 만나고, 권율 장군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순신은 곧장 군영으로 가다 4월 5일 선영인 아산 묘소에 잠시 들렀다.
 
 
▲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
 
 
아들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 변 씨는 여수에서 서해로 가는 배를 얻어 타고 상경하다가 안개와 강풍, 뱃멀미 속에 6일간 표류하다 지병이 깊어져 4월 11일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본가에서 맞이하려고 해안으로 가던 이순신은 4월 13일 외가 친척인 변흥백 집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처음 들었다.
 
이순신은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 197-2에 있는 해암(蟹巖, 향토문화유산 제12호) 포구 바닷가에서 하늘이었던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卞氏, 1515~1597)의 시신을 맞이하여 배에서 입관했다.
 
 
▲ 아산 해암리 게바위 유적(사진:연합뉴스)
 
 
이순신은 4월 16일 배를 아산 중방포까지 끌어와 영구(靈柩)를 상여에 옮겨 실었다. 이순신은 어머니의 초상을 제대로 치르지도 못하고, 4월 19일 금부도사의 재촉을 받아 금곡을 떠났다.
 
 
▲ 정경부인 초계변씨 추모제(사진:iPTV NEWS)
 
 
이순신 백의종군로의 고증은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에서 발행한 《이순신 연구 논총》 제25집 정진술 선생의 논문 〈이순신 백의종군로의 고증〉에 상세하게 적혀있다.
 
(계속됩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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