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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 조총(鳥銃) # 다네가시마 # 왕직
최근 3개월 조회수 : 41 (2 등급)
【문화】
(게재일: 2024.03.13. (최종: 2024.03.13. 17:11)) 
◈ 【이순신해전지순례(3)】임진전쟁의 조총과 왕직
명나라에서 해적 취급... 장사 기술 일본에 전수해 상인의 전범으로 추앙
임진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이순신 장군이 조총에 맞아 절명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문헌을 조사했다. 일본인이 조총을 처음 본 것은 1543년 음력 8월 25일(양력 9월 23일) 규슈 가고시마 남쪽에 있는 다네가시마(種子島) 카도쿠라 곶(門倉岬)에 표류한 명나라 무역상 왕직(汪直?, ~1559)의 난파선 때문이다.
명나라에서 해적 취급... 장사 기술 일본에 전수해 상인의 전범으로 추앙
 
 
임진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이순신 장군이 조총에 맞아 절명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문헌을 조사했다. 일본인이 조총을 처음 본 것은 1543년 음력 8월 25일(양력 9월 23일) 규슈 가고시마 남쪽에 있는 다네가시마(種子島) 카도쿠라 곶(門倉岬)에 표류한 명나라 무역상 왕직(汪直?, ~1559)의 난파선 때문이다.
 
 
▲ 제54회 種子島 철포 축제, 불꽃놀이(2023.8.20.)(사진:일본 가고시마현 관광연맹)
 
 
명나라 왕직은 五峰, 五峰船主라고 하며 휘주(徽州) 흡현(翕懸) 자림(柘林) 출신이다. 왕직은 1530년대에 남해에서 활동하던 상인 허동(許棟)과 이광두(李光頭) 밑에서 일했다. 허동과 이광두는 명나라 군사에게 체포되어 복주에 갇혔다,
 
1539년 탈옥해 김자노의 부하가 되어 쌍서도(雙嶼島)로 들어갔다, 1514년부터 광동 연안에 몰려든 포르투갈인은 무역 중심지로 떠오른 쌍서도에 1,200명이나 거주했다. 허동은 1542년 쌍서도를 차지했다. 허동은 명나라 절강순무 주환(朱紈)이 밀무역을 금지하자, 바로 해적으로 변신하여 명나라 해안을 침범했다. 1548년 순무가 군사를 이끌고 쌍서도 무역기지를 파괴할 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일본 히라도(平戶) 왕직상(사진:바이두백과)
 
 
왕직은 1540년부터 서유학(徐惟學), 섭종만(葉宗滿)과 협력하여 광둥에서 큰 배를 건조하여 유황, 명주, 목면을 싣고 일본, 섬라(暹羅, Siam)에 왕래하며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일본 오도(五島)에 거점을 마련하고 多郞, 次郞, 四助四郞 등 왜인과 협력하여 큰 배를 건조했다.
 
왕직은 1542년 히젠국 센코쿠 다이묘인 마쓰라 다카노부(松浦隆信, 1529~1599) 초청으로 시라도(平戶島)에 해상무역 근거지를 마련했다. 1543년에는 왕직의 배가 폭풍으로 일본 규슈 남쪽에 있는 다네가시마에 표착했다. 명조가 해금 정책을 강화하자 포르투갈 상인들은 푸젠성 오서항과 월항에서 왕직과 거래했다.
 
무역 중심지였던 주산 쌍서도가 사라지자, 장주(蔣洲, 揚州)가 새롭게 번창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광둥의 주강 삼각주로 옮겨갔다. 도지휘사 황경은 뇌물을 받고, 1557년 마카오(澳門) 거주를 허용(黙許)했다. 마카오라고 부르게 된 것은 중국의 민간 신앙인 바다의 신 마조(媽祖)를 모시는 낭마각묘(娘瑪角廟)에서 유래되었다.
 
 
▲ 저장성 쌍서도(雙嶼島, 舟山 六橫島)(사진:바이두백과)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안주하게 된 것은 당시의 많은 해적을 총으로 퇴치해 준 보답이었다. 예수회 메키올 누네스 바레토 신부는 1551년 인도 고아 관구장을 지내고 1555년 일본으로 가던 중에 마카오에서 6개월간 머물렀다.
 
명나라는 조공감합무역(朝貢勘合貿易)을 시행해 외국 상인은 시박사에서 공품을 조공으로 바치고 상품을 하사하였다. 1550년에 왕직은 해적을 모두 소탕해 바다를 안정시킨 공로로 명조에 해금을 요청했으나, 명나라 조정은 기습으로 왕직을 공격했다.
 
왕직 세력은 다시 일본으로 탈출하여 세력을 늘린 후, 명나라 연해 상인들과 교역했다. 명나라 조정은 왕직을 잡지 못한 3명의 총독을 교체했다. 왕직은 1552년 복건성 진사반(陳思盼)의 해상세력을 규합하여 히라도에서 국호를 송(宋)으로 정하고 휘왕(徽王)이라 칭했다. 당시 바다에서는 왕직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왕직은 주산군도 역항(瀝港)에 무역항을 건설하려고 시도했다.
 
고려 시대에 왜구들은 40년 동안 394번이나 고려를 침공하며 사람을 잡아가고 곡식을 약탈했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때의 기록을 보면 1555년 음력 5월 11일 오도(五島)에 근거를 둔 중국인과 왜적 6,000명이 70여 척의 배를 타고 영암의 달량포(達梁浦) 근해에 머물다 달랑포와 이진포로 상륙한 후, 영암, 강진의 마도진, 장흥 회령포, 고흥, 진도의 남도포와 금갑포, 완도의 가리포, 전라병영을 약탈했다.
 
이때 절도사 원적(元績), 장흥부사 한온(韓蘊, 1511~1555)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은 포로가 되었다. 전라우수사 김빈과 광주 목사 이희손이 구원하러 왔지만 모두 연패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사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 남치훈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왜구를 격퇴하라고 보냈으나 전라방어사 김경석은 영암 읍성에서 그냥 바라만 보았다.
 
전주 부윤이 여러 번 전투를 권했으나 답이 없어 이윤경(李潤慶)이 군사들과 함께 출전하여 왜적의 머리 100급을 베어버리자, 왜구들은 5월 말에 배를 타고 바다로 도주했다.
 
 
▲ 제주도 화북성조(사진:다빈치지식지도)
 
 
왜구들은 음력 6월 21일에 제주(목사 김수문) 화북포(별도표)에 나타나 정박했다. 6월 27일에 왜구 1,000명이 40여 척의 배를 타고 화북포구로 밀려 들어와 새로운 근거지를 확보하려고 시도했으나 제주 군사들의 강한 저항에 도주했다. 제주는 고려 충숙왕 때부터 조선 명종 때까지 250년간 43차례 왜구 침입을 받았다.
 
1555년 10월에 이르러 대마도주는 왜구들의 목을 베어 사죄하고, 세견선(歲遣船) 부활을 요청해 조선은 세견선 5척을 허락하였다.명 가정 34년(1555년)에 왕직의 해양세력을 없애려고 간계를 꾸몄다. 호종헌(1512~1565)은 옥중에 갇힌 왕직의 노모와 처자를 풀어주며 명 조정에 귀순할 것을 권유했다
 
여러 차례 협상을 통해 왕직은 1557년 9월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주산군도의 잠항(岑港)에 정박하여 귀순한다. 조정 대신들은 호종헌이 왕직의 뇌물을 먹었다고 주장하며 호종헌을 압박한다. 순안어사(巡按御使) 왕본고(王本固)이 음력 2월 5일 왕직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다.
 
명나라 조정은 三司 회의를 열어 왕직이 倭夷를 끌어들이고 악행을 저질렀다고 결의하여, 1559년 음력 12월 25일 왕직은 항주에서 참수되었다. 왕직은 20여 년간 일본에서 살면서 명나라 휘상(徽商)의 전통적인 규범을 받아들여 일본에서 더욱 발전시켰다. 명나라에서는 왕직을 해적(海賊)으로 여기지만, 일본에서는 대명국의 유생으로 존경한다.
 
왕직은 일본의 언어와 문자를 습득하고, 일본의 상품시장을 연구하며, 일본 상인들을 신의로써 응대하며 이익을 취했다. 상인들은 왕직에게서 장사 기술을 배웠다. 그는 일본 상인의 전형적인 모범이 되었다.
 
 
▲ 명가정호종헌면관좌상(明嘉靖胡宗憲冕官坐像),저장성 여요(餘姚) 승귀산(勝歸山)(胡公岩摩崖石刻)(사진:위키백과)
 
 
호종헌(胡宗憲, 1512~1565)은 왕직 해상세력을 이용해 해상무역을 합법화하면 해적도 소탕되고, 해상무역을 다시 열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허사였다. 호종헌과 군장들은 모두 왕직의 죽음을 슬퍼했다. “호종헌은 몸소 해변에 나가 멀리서 처형 장면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내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는 군장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며 놀라운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출처】 「親臨海邊望祭之. 慟哭不己, 軍將皆墮淚不能仰視。」
 
호종헌은 감옥에서 간신들을 통박한 후 시를 남기고 자살했다. 이후 해적을 소탕했던 척계광(戚繼光, 1528~1588)도 우울증에 걸려 죽고, 왜구는 더욱 극성을 부렸다.
 
 
▲ 정화 군단, 중국 영파 중국항해박물관(2019.11.25. 촬영)
 
 
1543년 명나라 정크선이 표류해 도착한 섬은 사타미사키에서 동남쪽으로 약 40km에 있다. 섬은 남북으로 오이처럼 길쭉하게 생겼고, 면적은 한국 제주도의 1/3 규모로 주민은 28,350명이 살고 있다. 우치노우라 우주발사기지가 1969년에 들어섰다.
 
섬 주민들은 큰 배가 밀려왔을 때 너무 커서 놀랐다. 배의 길이는 무려 45m로 1492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넜던 산타 마리아호보다 2배나 컸다.
 
 
▲ 다네가시마 토키타카(種子島時堯) (사진:위키백과)
 
 
다네가시마 토키타카(種子島時堯, 1528~1579) 도주는 필담을 통해 어디에서 배가 어디에서 출항했는지 어디로 가는 배인지 확인하고, 섬의 배 12척을 모두 동원해 배에 탄 사람들을 모두 구해 절로 보냈다. 배는 원래 일본 북부의 규슈 북단의 히라도(平戶島)로 가려고 했는데, 폭풍을 만나 배가 항로를 벗어나 표류해 다네가시마에 도착했다.
 
도주는 배에서 내린 110명의 사람을 모두 쳐다보다가 얼굴이 다르게 생긴 키가 크고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는 남만인(南蠻人)을 보고는 재주도 많고, 가지고 있는 물건도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다.
 
명나라 무역선(정크선)에는 남양에서 올라온 신기한 물건이 많이 실려 있어, 도주는 망원경과 작은 구멍에서 하얀 불꽃이 나고 소리가 크게 나는 철포가 신기해 자주 구경했다. 선원들이 배를 수리하는데 큰 못이 없어 표류민들은 6개월 동안이나 고생하며 섬에 머물렀다.
 
도주는 포르투갈 여행가 페르낭 멘데스 핀투(Fernao Mendes Pinto, 1509~1583)에게 철포의 사용법을 배우고, 돈을 주고 사들였다. 소년 핀투는 1524년 범선을 타기 시작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탐험하다 13번 붙잡혔고, 17번 상인에게 팔려 갔다. 핀투는 1558년 리스본 고향에 돌아가서 〈핀투 여행기〉를 남겼다. 모험가 핀투가 죽은 후 1614년에 책이 출간되었다.
 
 
▲ 《핀투여행기》(사진:포르투갈 국립도서관)
 
 
다네가시마는 사철(沙鐵)이 풍부해 칼 제조업이 발달했다. 다네가시마 도주는 철포를 복제 생산하고 싶어 칼을 만드는 기술자 八板金兵衛(1502~1570)를 불러 철포 제작을 부탁했다. 기술자는 철포를 만드는 데 화기의 제조 방법, 화약의 배합 방법을 몰라 포르투갈 여행자를 사위로 삼아 제작 기술을 습득해 1년이 지나 1544년에 완성했다.
 
다네가시마 도주는 1정을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에 철포를 바쳤다. 시마즈 가문은 센코쿠(戰國) 시대에 합당한 철포의 높은 가치를 깨달았다. 시마즈는 조총을 쇼군 아시카가(足利)에게 선물로 올렸다. 포르투갈의 식민지 인도 고야에서 처음 제작된 철포는 일본에서 개량되어 일본 통일에 사용되었다.
 
일본의 천주교 전래는 1549년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co Javier, 1506~1552) 사제가 최초이다. 하비에르는 1541년 4월 7일 리스본을 출항하여 1542년 5월 6일 인도 고아에 도착하여 1948년까지 세일론, 말라카, 물루카 제도, 인도 연안을 다니며 포교 여행을 하였다.
 
하비에르는 포르투갈 알파르스 선장을 통해 사쓰만 번 무사(武士) 야지로를 소개받아 천주교를 전도하고, 1549년 9월 29일 사쓰마를 방문해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다이묘 시마즈 다카히사(島津隆久, 1514~1571)가 초대했을 때 하비에르는 화승총을 선물했다. 다이묘는 총을 받고 기뻐하며 전도를 허용했다. 하비에르는 가톨릭 책을 일본어로 인쇄해, 이후 천주교는 일본 전역에 널리 퍼져 키리스탄이 75만 명이 이르게 되었다. 이에 막부는 천주교 신부를 추방하고, 천주교 금지령을 내렸다.
 
1637년 3월 25일 고니시 유키나가 가문을 포함한 여러 세력이 단합하여 시마바라에서 4만 명이 항쟁을 시작하였다. 막부는 중앙에서 12만 명의 군대를 보내 키리스탄을 공격해 4개월 만인 1638년 2월 14일 신앙을 버리지 않는 키리스탄 3만 명을 모두 죽였다. 포르투갈인들은 모두 추방되고 일본은 문호를 닫는다.
 
시마즈 가문에서 만든 총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오다 노부나가였다. 천하인(天下人)으로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을 이용한 전술을 개발하고 병사를 훈련했다. 1575년 나가시노(長絛) 전투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 군대를 물리쳤다.
 
처음에 기마부대가 우세했으나, 말이 움직이지 못하게 여러 장애물을 만들고 숨겨둔 철포(뎃포)부대 조총수 3,000명을 3교대로 전진시켜 가며 운영하여 다케다 병사 12,000명을 섬멸한 오다 노부나가 장군이 일본을 처음으로 통일했다.
 
 
▲ 1575년 5월 나가시노 전투 장면(사진:위키미디어)
 
 
1589년(선조 22) 7월에 쓰시마 도주(對馬島主) 소오 요시토시(宗義智)가 조선 조정에 2개의 조총을 진상하였다. 조정은 조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군기시(軍器寺)에 넣었다. 1590년 3월 요시토시는 9개월간 한양에 머물면서 일본의 침략을 거듭 알렸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할 때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이었던 젊은 왜장이 휘하의 철포부대 500명과 함께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4월 20일 귀순했다. 그 인물이 사야가(沙也可, 金忠善, 1571~1642)로 조선에 철포와 화약 제조법을 전수했다.
 
 
▲ 김충선의 후손(1904년 촬영/사진:위키백과)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는 왜적으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가지고 우리에게 맞는 우수한 조총을 개발하려고 애썼다. 정사준(鄭思竣, 1553 ~1599)은 순천 출신으로 선조 17년(1584)에 무과 별시(別試) 을과(乙科) 4위(5/202)에 급제한 인물이다.
 
이순신 장군의 온갖 궂은일을 맡아 했던 정사준은 정철총통 만드는 방법을 터득하고는 야장(冶匠, 대장장이), 낙안 수군 이필종(李必宗), 순천 사노비 안성(安成), 김해 절 노비 동지(同之), 거제 절 노비 언복(彦福)과 함께 정철을 두드려 왜놈들이 사용하는 조총을 1593년 9월 13일 만들었다.
 
 
▲ 순천 옥계서원 현판
 
 
이순신은 수군 각 진영에서 조총을 만들게 하고, 조총 1개를 권율 장군에게 보냈다. 임금에게 5개를 진상하며 장계 〈封進火砲狀〉에 그 공을 대장장이에게 돌리며 이름을 남겨 포상을 요청했다. 이순신 장군이 걸었던 길고 긴 고난의 길, 호국의 길을 다시 기억한다.
 
 
 
생활문화아카데미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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