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김정희(金正喜)
김정희
자 료 실
지식지도
원문/전문
시민 참여 콘텐츠
관련 동영상
2023년 12월
2023년 12월 30일
궁인창의 독서여행
세한도 소장 일본인, 손재형 전달 후 자택 미공습 받아 전소
궁인창의 독서여행
2023년 12월 28일
궁인창의 독서여행
궁인창의 독서여행
2023년 12월 26일
궁인창의 독서여행
2023년 5월
2023년 5월 8일
문화재·역사·전
2020년 7월
2020년 7월 1일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2019년 10월
2019년 10월 10일
제주특별자치도 보도자료
2019년 10월 2일
제주특별자치도 보도자료
2019년 8월
2019년 8월 23일
제주특별자치도 보도자료
2019년 7월
2019년 7월 12일
김영환 교수의 사마천 사기 강의
2018년 12월
2018년 12월 12일
김영환 교수의 사마천 사기 강의
2018년 11월
2018년 11월 27일
김영환 교수의 사마천 사기 강의
2015년 9월
2015년 9월 3일
문화재·역사·전
about 김정희


내서재
추천 : 0
김정희(金正喜) 봉은사(奉恩寺) 손재형(孫在馨) 완당 세한도(阮堂歲寒圖) # 후지츠카 지카시
최근 3개월 조회수 : 2 (5 등급)
【문화】
(게재일: 2023.12.30. (최종: 2023.12.31. 14:45)) 
◈ 세한도 소장 일본인, 손재형 전달 후 자택 미공습 받아 전소
추사의 세한도-1
후지츠카 지카시(1879~1948) 교수는 1939년 환갑을 기념하여 애착이 깊은 〈세한도〉 100부 인영본(印影本)을 제작하고 자필로 글을 작성해 지인들에게 전했다. 후지츠카 교수는 이듬해인 1940년에 경성제국대를 정년퇴직하고 일본에 건너간다.
추사의 세한도-1
 
 
후지츠카 지카시(1879~1948) 교수는 1939년 환갑을 기념하여 애착이 깊은 〈세한도〉 100부 인영본(印影本)을 제작하고 자필로 글을 작성해 지인들에게 전했다. 후지츠카 교수는 이듬해인 1940년에 경성제국대를 정년퇴직하고 일본에 건너간다.
 
1944년 말 서예가 손재형은 후지츠카 교수가 입원한 도쿄의 병실을 찾아가 〈세한도〉를 청했다. 손재형은 일본에 건너간 후 2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후지츠카 교수를 만나 추사(1786~1856)에 얽힌 이야기로 정담을 나눴다. 어느 날 후지츠카 교수는 손재형 선생에게 아무 조건 없이 무상으로 세한도를 건넸다. 그가 손재형에게 〈세한도〉를 건네주면서 한 말은 “조선의 문화재를 사랑하는 성심에 감탄하고, 그대가 이것을 오래오래 간직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사숙한 동문이 아닙니까?””하고 손을 잡았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받아 귀국하고 나서 3개월 후 후지츠카 교수의 창고는 미군 비행기의 도쿄 대공습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세한도(사진:국립중앙박물관)
 
 
추사가 1844년 제주에서 그린 〈세한도〉는 그를 평생 따르던 우선(蕅船) 이언적(李彦迪)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붓을 든 서화다. 이언적은 역관으로 13번이나 연경(燕京)을 방문하면서 추사가 원하는 책들을 모두 구해서 제주도에 계신 스승에게 전달했다. 추사가 제주도로 귀향을 떠난 이후 모든 제자가 스승의 곁을 떠났지만, 이언적은 소나무처럼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사연이 많은 〈세한도〉를 손창근(1926~) 선생이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의 길이는 108.2cm, 폭은 23.9cm이다. 그림에는 문인 22명이 쓴 감상의 글이 있어 전체 길이는 1,469.5cm이고, 두루마리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 번째 부분은 753.7cm로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 선생이 1949년 쓴 3편의 글이 있고 비어 있는 부분이 약 5m 정도 된다. 세 번째 부분에 청나라 문인 16인이 1845년에 쓴 글이 있다.
 
최종수 과천문화원장은 추사 선생님 39살 때에 행적을 살펴보다가, 한성 판윤을 지낸 추사 아버지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1824년 과천 청계산 북쪽 옥녀봉 아래에 별서(別墅) 과지초당을 지은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추사는 63세인 1848년 음력 12월 6일에 제주에서 유배 생활이 풀렸다. 그리고 다시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 1852년 겨울에 유배가 풀렸다. 그때 추사의 나이가 68살이었다. 추사는 12년의 걸친 오랜 유배 생활을 마치고는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가지 않고, 아버지가 지어 놓은 경기도 과천에 지은 초당으로 갔다. 추사는 과천 초당에서 가까운 뚝섬 봉은사를 자주 방문했다.
 
 
추사의 글씨 판전, 「七十一果病中作。」
 
 
봉은사는 신라 원성왕 10년(794) 연희국사가 창간한 견성사라는 작은 사찰이었다. 조선왕조에 들어 성종의 계비 정현황후가 선릉(성종의 능)의 원찰(願刹)로 삼고 사찰 이름을 봉은사로 고쳤다. 성종의 아들 중종도 이곳에 묻혀 사찰은 왕실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게 되었다. 봉은사는 승려 보우가 머물렀을 때 융성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최근에 다 복원되었다. 봉은사의 백미는 대웅전 옆에 있는 전각 판전에 있다. 봉은사 판전은 남호 영기(南湖永奇, 1820~1872) 대사가 간경소를 설치하고 대승경전 화엄경 80권을 1855년 판각한 것을 보관한 장소이다. 영기대사와 추사는 각별한 사이로 사람을 보내 글씨를 부탁하자, 추사는 병중에 글을 써서 봉은사로 보냈다. 이 글씨는 추사가 죽기 3일 전에 써준 현판 글씨이다.
 
오랜 세월 봉은사 판전 글씨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신암(薪菴) 김약슬(金約瑟, 1913~1971) 선생이 이 글씨를 발견하고. 1966년 잡지 〈도서〉 10월호에 〈秋史放見記〉 라는 글을 기고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추사는 임종 전에 여러 달을 봉은사에 기거하며 승려들과 똑같이 수행하며, 발우공양하고, 부처에게 귀의하고 참회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염불도 하고 사경도 열심히 했다.
 
추사가 봉은사에서 수행 정진을 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돌았다. 13세 소년 상유현(尙有鉉, 1844~1923)은 문사를 따라 봉은사를 방문했다. 소년은 절에서 보고 들은 것을 〈秋史放見記〉에 기록했다. 상우현은 추사를 만나려고 봉은사에 갔다가 실제로 추사의 생활을 목격하고 있는 그대로 적었다. “노인은 체격이 단소하고, 수염이 희기가 눈 같고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눈동자는 밝기가 칠같이 빛나고, 머리엔 머리카락이 없고, 스님들이 쓰는 대로 짠 원모를 썼으며, 손에 한 줄 염주를 쥐고 만지며 굴리고 있었다.” 어린 소년은 노인이 팔에 향불로 연비를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추사는 10여 년 동안 유배를 하느라 가세가 기울어 영조가 증조부에게 하사했던 한양 집을 처분했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심한 풍토병에 괴로움을 겪었고, 함경도 북청에서는 매서운 추위에 떨었다. 나이가 들어 몸은 약해졌지만, 마음은 강건했다. 추사는 자기가 가진 학식과 명예를 부처님 전에 모두 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슬슬 떠날 준비를 했다.
 
추사는 세상을 떠나면서 천진난만한 글씨로 크게 두 자를 남겼다. 현판을 자세하게 보면 글자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현판 판전(板殿)의 殿에서 文이 드러나게 강조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글씨를 불가(佛家)에서는 선필(禪筆)이라 부른다. 71세 병든 나이 「七十一果病中作。」 에 이렇게 큰 글씨를 가식이 없이 쓸 수 있는 것은 오랜 수행에서 나온 정말 놀라운 정신력이다.
 
 
생활문화아카데미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심화항목(D)
▣ 참조정보
백과 참조
조선 실학
 
부 : 김노경
 
스승 : 박제가
제자 : 허련, 조희룡
목록 참조
 
외부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