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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024년 2월 15일
궁인창의 독서여행
주원장, 탐관오리 죽여 껍질 벗긴 뒤 몸통 짚에 쑤셔 넣어 사당 전시
about 홍무제


내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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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성(山西省) 핑야오고성(平遥古城) 홍무제(洪武帝) # 성황묘 # 성황신 # 소격루 # 토지사 # 핑야오 성황묘
최근 3개월 조회수 : 27 (2 등급)
【문화】
(게재일: 2024.02.15. (최종: 2024.02.17. 10:33)) 
◈ 주원장, 탐관오리 죽여 껍질 벗긴 뒤 몸통 짚에 쑤셔 넣어 사당 전시
핑야오 성황묘 토지사-2
핑야오고성 성황묘 침궁을 방문하여 2층 계단을 올라갔다. 위에 올라 사방이 둘러보니 문묘 건물이 웅장하고, 멀리 성곽이 보였다. 핑야오 고성 내부는 넓어 끝이 없었다. 주택들이 많은데 건물은 휘주(徽州) 건축의 영향으로 대부분 높고 웅장했다.
핑야오 성황묘 토지사-2
 
 
핑야오고성 성황묘 침궁을 방문하여 2층 계단을 올라갔다. 위에 올라 사방이 둘러보니 문묘 건물이 웅장하고, 멀리 성곽이 보였다. 핑야오 고성 내부는 넓어 끝이 없었다. 주택들이 많은데 건물은 휘주(徽州) 건축의 영향으로 대부분 높고 웅장했다.
 
성황 침궁을 구경하고 걸어 나오다 소격루를 보았다. 소격루는 성황묘 도교 사원에서 하늘과 별에 제사 초제(醮祭)를 지냈던 곳이다. 초제는 도교(道敎)의 도사(道師)가 성안에 퍼지는 재앙을 사전에 물리치고, 복을 빌기 위해 하늘과 별 및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제사이다.
 
 
▲ 소격루(昭格樓)
 
 
조선왕조에서도 경복궁의 동쪽에 예조의 관청 소격서(昭格署)가 있어 하늘에 초제를 지냈다. 백제의 도교 의식으로 산천 제사를 모셨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일본 《古事記》 에는 근초고왕 때 왕인 박사와 아직기가 도교 의식과 서적을 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소격서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소격동이 되었다가, 1975년 10월 1일 삼청동에 통합되었다. 소격동에 있었던 국군기무사령부와 국군서울지구병원은 이전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건립했다. 소격루를 구경하고 돌아서 나오니, 성황묘의 토지신을 모신 토지사(土地祠)가 앞에 있었다. 전각은 화려하지도 않고 수수했다.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평민 출신으로 토지묘(土地廟)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명나라 홍무(洪武) 2년(1369)에 황제의 명으로 성황의 지위를 더 높게 중시하도록 엄격히 규정지었다.
 
황제는 성황을 천하성황(天下城隍)에 봉하여 성황의 지위를 확고히 하여 성, 도(都), 140개의 부(府), 주(州), 1000개의 현(縣)급 도시에 반드시 성황묘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하였다. 토지사는 보통 토지공(土地公) 할아버지를 모시지만, 당시 탐관오리를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방편이었다.
 
 
▲ 토지사(土地祠)
 
 
아침에 열리는 조회(朝會)에서 뇌물을 먹은 부패한 관리를 적발하여 황제가 처벌해도, 저녁이면 부패한 관리들은 또다시 뇌물을 받았다. 황제는 부패한 탐관오리들을 계속 처벌하겠다고 선포하고, 녹봉을 적게 주고, 강력하게 호소해도 확실한 개선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새로운 생각을 한다. 명나라 주원장은 부패한 관리를 억제하기 위해 각 현 관아의 대문과 이문 사이에 특별히 토지 사당을 건립했다.
 
그런데 명나라 현의 관아에 있는 토지사는 일반 토지 아버지를 숭배하여 모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허수아비(稻草人)를 모셨다.
 
 
▲ 토지사 ‘朱元璋剥皮揎草’ 형벌(사진:Sohu, 搜狐)
 
 
명나라 태조는 부패한 탐관오리를 조사하여 죽인 다음에 그 시체의 껍질을 벗겨내고, 몸통에 짚을 쑤셔 넣어 사람의 형상을 크게 만들어 관아의 토지 사당에 넣어 사람들이 모두 참관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명나라 주원장의 강력한 부패 척결의 의지였다.
 
【출처】「因为明朝县衙里的土地祠,供奉的不是一般的土地公公,而是披着人皮的稻草人。 贪官被杀之后,还要把他们的皮剥下来,塞上稻草,做成人形,放到县衙的土地祠里供人参观。」
 
 
▲ 주원장(朱元璋, 명 太祖)(사진:대만국립고궁박물관)
 
 
명나라를 새운 주원장은 원나라 말기의 관료가 극도로 부패해 관리들에게 성실성을 옹호하고 모든 직급의 관리들에게 법을 준수하고 정직하고 일하라고 요구했다. 홍무 2년에 그의 대신들에게 “짐은 예전에 백성일 때 탐관오리가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외면하는 것을 자주 보고 마음속으로 그들을 미워했다. 이제 짐은 황제가 되었으니 앞으로 탐관오리를 엄하게 처벌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탐관오리에게 엄격한 법을 적용할 대명률(大明律)이 공포되었다.
 
대명률은 예전의 당송 이래 정치 제도와 기구의 설치는 다르지만, 현아의 배치는 대문, 계석, 고루, 이문 이런 구조는 비슷했다. 그런데 대문과 이문 사이에 토지사를 하나 더 두었다. 이 토지사는 뇌물을 먹은 사람의 껍질(人皮)을 벗기는 데 사용되었던 곳이다.
 
 
▲ 토지사 형벌(사진:Sohu, 搜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홍무(洪武) 9년 호부의 공인 사건(空印案)이 터지고, 호유용(胡惟庸)의 반역으로 곤란을 겪었다. 명 홍무 18년(1385년)에 호부시랑 곽환(郭桓, 궈환)의 식량 횡령 사건으로 6부(六部)의 좌우 시랑 이하를 모두 처벌했다.
 
이때 전국의 성에서 살해된 관리들과 부자들은 무려 3만 명에 달했다. 이 사건은 곽환과 성의 관리들이 내통하여 조정의 관곡 2천4백만 섬을 횡령하고 은으로 되팔아 경제 분야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컸다. 이때 장물을 추적하다 명나라 지주와 중산층이 모두 관계되어 모두 사라졌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조정이 부패한 관리를 엄격하게 처벌하여 관리가 많이 죽고, 관리의 선발과 임용이 계속 늦어 한동안 명나라의 지방 관리가 심각하게 부족하여 백성들의 높은 원성을 들은 적도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횡령에 연루된 부유한 백성이 늘어나 원한이 깊어지자, 민원을 해결하려고 태조는 사형집행관을 처벌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곽환 사건의 주심 법관으로 무수한 관리들을 죽이도록 명령한 우심형(右審刑) 오용(吳庸)이었다.
 
명나라 주원장은 횡령 사건을 처리하면서 죄가 없는 깨끗한 청관(淸官)을 많이 죽였다. 태조 주원장은 신하들과 탐관오리 처벌을 논하면서 “朕才疏德薄, 控御之道竭矣! “짐은 재능도 없고, 덕(德)도 보잘 것이 하나도 없다. 탐관오리를 통제하는 것도 지쳤다!”라고 말했다.
 
 
▲ 어제대고(御制大誥)
 
 
태조 주원장은 부패 방지 형법 《대고삼편(大誥三篇)》를 직접 만들어 관리가 뇌물을 받으면 돈을 어디서 받았는지 반드시 확인하고, 단계별로 추적해 횡령자를 일망타진(一網打盡)해야 한다고 엄격하게 규정하였다. 주원장은 재위 31년 동안 부패한 관리 10만 명을 숙청했다.
 
명나라 초기에 태조 주원장은 세계를 호령하던 강대한 대원(大元)이 힘도 없이 모래성처럼 무너진 원인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것은 강력했던 원나라 조정의 권위가 떨어지고, 황실의 쇠퇴로 말미암아 하층 관리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난리를 일으키고, 부정부패와 뇌물이 극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고대의 진시황제처럼 엄한 처벌과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 나라를 통치하는 데 유익하다고 보았다.
 
태조 주원장은 부패 방지 형법을 직접 만들기 시작하여 홍무 18년(1385년) 8월, 19년 3월과 11월, 20년 12월에 《대고(大誥)》 총 236조를 연속적으로 편찬하여 공포하였다. 법률 중에 150개 항목이 탐관오리를 처벌하는 것이었다.
 
 
▲ 명나라 1500년 강역도(사진:知乎)
 
 
명나라 주원장인 만든 명대고(明大誥)는 《상서(尙書)》 중의 〈대고편(大誥篇)〉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4년 18일(1612년) 일기를 보면 조정에서 《상서》를 강독하는 것이 나온다. 명대고의 법적 지위는 대명률(大明律)보다 높고 형량도 대명률보다 높았다.
 
육형(六刑)이 다시 복원되었다. 뇌물 60냥 이상의 은을 횡령한 자는 “효수시중(枭首示众)하고, 그의 가죽을 벗긴다.”라는 규정이 생겼다. ‘효수시중’은 사람의 목을 잘라 성벽에 내걸어 대중들에게 보여 미리 경계토록 하는 것이다. 명나라 태조는 나라에서 수천만 권의 책을 인쇄하여 전국의 신하들에게 한 권의 책을 나눠주었다.
 
명나라 시대 개인 집에 《명대고》가 소장되어 있으면, 태장(笞杖)이나 사류(徙流)의 죄명을 범했을 때 처벌을 감하거나 약하게 처벌했다. 홍무 24년 태조는 “앞으로 과거를 준비하는 생원들에게, 시험문제 출제는 모두 《대고(大誥)》에서 출제할 것이다.”라고 알렸다. 이런 방식을 통해 《명대고(明大誥)》는 중국 법제 역사상 유례없는 대중적인 법률이 되었다.
 
【출처】明大诰的法律地位高于《大明律》,量刑也远重于《大明律》,其中恢复了肉刑,甚至包括许多法外酷刑,例如规定了贪污六十两银子以上者“枭首示众,仍剥皮实草”之刑,并将之挂于官府公座两旁。明太祖以国家力量强行推行明大诰,印制了数千万册,要求全国臣民户有一册。在整个明朝一代中,如果家中收藏有明大诰,那么在若犯笞杖、徙流罪名时可以减轻一等处罚。洪武二十四年下令:“今后科举岁贡生员,俱以大诰出题试之”。这样,明大诰就成为了中国法制史上空前普及的一部法律。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통일국가를 이룬 인물로 학자들은 주원장을 “성현의 풍모와 호걸의 기풍과 도적의 성품을 모두 가진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부패 사건의 발생을 더욱 방지하기 위해 주원장이 《대고(大誥)》를 편찬한 덕분에 명나라는 정직하고 충성스러운 관료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었고, 백성들은 밤에 집을 닫지 않았고 길에서 물건을 줍지도 않았다고 한다.
 
고전(古典)을 공부하며, 역사책을 읽어 보면 진리는 한결같이 모두 같았다. 고대 국가의 흥망을 보면 현명한 신하는 간신배에 의해 모함을 받아 빨리 도태(淘汰)되어 사라지고, 간신배와 탐관오리들이 조정의 권력을 모두 장악하고 무리를 이루어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빠져 민심(民心)을 져버렸다. 민심에 등을 돌린 왕조(王朝)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중국 산시성 핑야오 고성을 방문하고, 성황묘 토지사(土地祠)를 통해 역사적 교훈을 얻고 길을 떠났다.
 
(계속)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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