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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올림픽 대회(Berlin Olympic大會) 손기정(孫基禎) 페르시아 전쟁(Persia戰爭) # 그리스 청동 투구
최근 3개월 조회수 : 2 (5 등급)
【문화】
(게재일: 2023.10.06. (최종: 2023.11.03. 22:41)) 
◈ 손기정 선수의 우승을 상징하는 상징물 되찾아
지금부터 2509년 전인 BC 490년에 페르시아 제국은 지금의 이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지방과 이집트를 통치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Darius, BC550~486) 대제(大帝)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무조건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그리스 청동 투구와 손기정(하)
 
 
지금부터 2509년 전인 BC 490년에 페르시아 제국은 지금의 이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지방과 이집트를 통치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Darius, BC550~486) 대제(大帝)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무조건 항복하라고 요구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리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페르시아 사신을 우물 속에 매장해 죽여 버렸다. 이에 다리우스 대제는 다티스(Datis) 장군을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정복할 것을 명령한다. 보병 100,000명, 기갑부대 10,000명과 전함(戰艦) 600척의 페르시아 원정군은 그리스 본토 나티카주의 동쪽 해안에 상륙했다.
 
페르시아 군대가 그리스를 침략했다는 소식을 접한 아테네는 위기에 몰려 도시국가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막강한 병력을 당해낼 수가 없어 올림피아 경기의 달리기 선수인 필리피데스(Pheidippides)를 스파르타로 사신으로 보낸다. 필리피데스는 250km를 달려가 스파르타의 군대를 아테네로 파병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스파르타는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필리피데스는 “보름달 이전에는 출병할 수 없다.”는 스파르타의 회신을 가지고 아테네에 급하게 달려와 소식을 전한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BC 500~479년) , 사진: 위키백과
 
 
누란(累卵)의 위기를 맞은 아테네는 지장(智將)인 밀티아데스(Miltiades) 장군을 선봉장으로 10,000명의 기갑병으로 아테네 동북방 42km 지점에 있는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 군사들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군사력이 10배나 우세한 페르시아군은 밀티아데스 장군의 신출 기묘한 전술에 말려서 마라톤 협곡(峽谷)에서 참패했다.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군은 6,400명이 전사하고 그리스 전사자는 192명에 불과했다. B.C 490년 9월 2일, 한 병사가 “그리스 군대가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이겼다.”고 아테네 시민들에게 외치고는 숨을 거둔다. 사람들은 병사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병사는 여러 날 식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매일 같이 소식을 전달하느라 매일 뛰어다녀 기력이 다해 죽음에 이르렀다.
 
손기정은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박물관에 자기 이름이 새긴 투구가 전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기뻤다. 올림픽 규정에 “메달 이외의 부상을 수여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에게 전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억지 이야기였다. 당시 일본 선수단은 손기정에게 이런 사실도 전달하지 않았고, 국제올림픽위원회에 항의도 하지 않은 채 50년을 맞이했다.
 
“청동 투구를 손기정에게 보내달라.”는 국제캠페인을 세계적으로 확산하였다. 한국 언론과 대한체육회뿐 아니라 브라디니 신문과 그리스 올림픽위원회도 국제캠페인 확산에 앞장을 섰다. 그러나 독일올림픽위원회는 청동 투구 반환을 완강히 거부하고 대신 복제품을 보내겠다고 손기정에게 제안했다. 독일올림픽위원회의 공식적인 제안을 받은 손기정은 이를 거부했다.
 
1981년 8월 한국 MBC 방송사의 촬영 팀이 베를린에 도착하여 투구를 촬영하러 왔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다가 올림픽 유치단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고 촬영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바로 그날 저녁에 사마란치 위원장은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대한민국 서울을 선포하였다. 촬영 팀이 급히 철수한 이유는 서울과 나고야가 최종 경합이 되었는데, 투구 뉴스가 나가면 한국에 불리한 측면이 발생할 것을 고려했다고 했다.
 
1986년에 유물을 기증했던 그리스의 언론사 브라디니 측에서 이 투구는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려고 그리스 정부가 반출 허가를 해준 것이라는 공식 문건이 독일올림픽조직위원회에 전달되었다. 다행히 이 투구는 아덴박물관과 비스바덴박물관을 전전하다가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루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었다.
 
독일올림픽위원회는 베를린올림픽 5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독일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전 IOC 부위원장인 빌리 다우메(Willi Daume, 1913~1996)는 “손기정 씨, 돌려드릴 물건이 있으니 찾으러 오세요.” 하는 메시지를 한국에 보내왔다.
 
 
독일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빌리 다우메(Willi Daume), 사진: 위키백과
 
 
10년간 이어진 청동 투구반환 운동에는 이건희 IOC 위원, 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 그리스 올림픽위원회, 독일 올림픽위원회, 국내 언론사, 그리스의 언론사 브라디니, 일본 마이니치신문 체육부장 오오지마 가마구치, 한국-그리스 친선협회 타키스 회장, 베를린 거주 노수웅 대표, 노순근 회장, 베를린 교포, 일반 시민 등 많은 사람의 지원과 국제적인 협력이 있었다. 마침내 1986년 베를린 올림픽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독일 올림픽위원회는 투구를 손기정에게 헌정했다.
 
 
베를린 올림픽 개최 50주년 기념 - 투구 헌정, 사진: 위키백과
 
 
문화재청은 손기정 선수가 독일올림픽위원회로부터 받은 투구를 약 2,600년 전에 제작된 귀중한 유물이라는 중요성을 인정하여 1987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 제904호로 지정하였다. 문화재청은 투구는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시절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우리 국민에게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보물 선정 이유를 밝혔다.
 
베를린 올림픽(지구촌운동회)에서 우승한 지 50년 만에 투구를 전달받은 손기정은 투구를 머리에 쓰고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국민들과 투구 반환 과정에 수고 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손기정은 1994년 8월 8일 “이 투구는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것입니다.”라는 뜻을 밝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투구를 기증했다.
 
 
그리스 청동 투구 내부 ,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청동 투구의 안쪽에는 “1936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올림픽 게임에서 마라톤 우승자에게 수여하기 위해 아테네의 부라디니(Vradyni) 신문사에서 기증한 그리스의 코린트식 청동 투구: Sonkitei(손기정), 2시간 29분 19초.”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리스 청동 투구를 들고 있는 손기정 선수
 
 
2023.10.3. 21:25
 
생활문화아카데미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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