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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023년 9월 8일
궁인창의 독서여행
최치원 기념관과 두순학 (하)...연화각 2층 자료전시관
궁인창의 독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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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보시(宁波市) 최치원(崔致遠) # 두순학 # 양저우 최치원기념관
최근 3개월 조회수 : 2 (5 등급)
【문화】
(게재일: 2023.09.08. (최종: 2023.11.03. 20:00)) 
◈ 최치원 기념관과 두순학 (하)...연화각 2층 자료전시관
당나라 17년 발자취 자료 모아 전시 / 젊은 두순학은 집안이 대대로 훌륭하지만 집이 아주 빈한하고 돈도 없었다. 사람들은 집안이 대단하면 재산이 많은 줄 알지만 선비 집안은 대체로 청빈한 가문들이 많았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도 관직 청탁을 통해 겨우 관리가 되었다.
당나라 17년 발자취 자료 모아 전시
 
젊은 두순학은 집안이 대대로 훌륭하지만 집이 아주 빈한하고 돈도 없었다. 사람들은 집안이 대단하면 재산이 많은 줄 알지만 선비 집안은 대체로 청빈한 가문들이 많았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도 관직 청탁을 통해 겨우 관리가 되었다. 시인 두순학은 당나라의 사회적 병폐를 고치려고 했으나 힘이 미력했다. 당시에는 지방관이 발호하고, 왜적이 쳐들어오고, 그래서 실력이 있는 청년들은 시험을 낙방하여 실의에 빠지고 불만이 점점 쌓여갔다.
 
 
연화각(최치원 역사자료전시장, 1980년 건립, 2001년 전시운영)
 
 
두순학의 시「산속의 과부(山中寡婦)」라는 시에서 산속에 사는 늙고 병든 과부(寡婦)의 말을 빌려 당시 당나라 백성들의 고통을 단적으로 묘사했는데 시를 한번 읽어보자.
 
夫因兵死守蓬茅,
麻苧衣衫鬢髮焦.
 
桑柘廢來猶納稅,
田園荒後尙徵苗.
 
時挑野菜和根煮,
旋斫生柴帶葉燒.
 
任是深山更深處,
也應無計避征徭.
 
지아비는 병사로 나가 죽고 혼자 초옥을 지키느라,
삼베 모시로 만든 옷 입고 머리털은 누렇다네.
 
뽕나무가 모두 다 베어졌건만 그래도 세금을 내라 하고,
논과 밭이 황량하게 된 후에도 오히려 세금을 걷네.
 
시시때때로 들판의 풀과 뿌리를 삶고,
금방금방 잎 달린 생나무 잘라 때어야 하네.
 
깊은 산 더 깊은 곳에 가더라도,
역시 당연히 세금과 부역을 피할 계책은 없을 것이네.
 
 
「낙제(落第)」로 시작하는 제목의 시들이 특히 그렇다.
 
 
落第愁生曉鼓初,
地寒才薄欲何如.
 
不辭更寫公卿卷,
却是難修骨肉書.
 
御苑早鶯啼暖樹,
釣鄕春水浸貧居.
 
擬離門館東歸去,
又恐重來事轉疏.
 
새벽 북소리 들으니 낙제의 근심이 생겨나지만,
집안이 미미하고 재능이 박하니 어찌하겠는가?
 
포기하지 않고 권세가에게 바치는 글을 더욱 많이 쓰지만,
도리어 피붙이에게는 편지 쓰기 어렵네.
 
황제의 정원에는 일찍부터 꾀꼬리가 봄을 맞은 나무에서 울지만,
낚시하던 고향에서는 봄비에 허름한 집이 젖을 것이라네.
 
문관을 떠나 동쪽으로 돌아가려고 생각도 해 보지만,
다시 일이 잘못될까 봐 두렵네.
 
 
두순학의 시는 326수가 모두 근체시다. 그중 오언율시(五言律詩)가 127수, 칠언율시(七言律詩)는 140수로 가장 많다. 관로가 순탄했던 시인과 비교하면 역시 불우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당나라 후기에는 두순학과 유사한 시인들이 많았다. 나은(羅隱, 833년-910년)과 교류를 드러낸 시가 있다. 그러나 그밖에는 우인(友人)이라고 했을 뿐, 직접적으로 시인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은 것을 보아 별다른 교류는 없었던 것 같다.
 
최치원은 당에서 17년간 머물면서 고운(顧雲), 오만(吳巒) 등 많은 문인들과 사귀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최치원과 나은(羅隱)이 서로 시를 보여주며 교유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두순학을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한 임원빈 교수님이 있어 논문과 책을 구해 읽었다. 임원빈(任元彬)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 푸단대학 고전문학 박사과정에 입학해 1998년 《唐宋之際文學與思想政局硏究》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숭실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천 년의 기억을 뛰어넘어 - 최치원과 양주(최치원 기념관)
 
 
두순학은 시에서 붉은색을 통해 백성들의 수탈에 대한 정황을 선명하게 연상시켰다.
 
 
또다시 호성현을 지나며(再經胡城縣)
 
去歲曾經此縣城,
縣民無口不冤聲.
 
今來縣宰加朱紱,
便是生靈血染成
 
작년 일찍이 이 호성현을 지나갔는데,
마을 사람들이 말만 하면 원성이 자자했네.
 
오늘 다시 와서 보니 현의 관리들이 붉은 인끈을 매었는데,
바로 백성들의 피와 혼이 물든 것이라네.
 
《두순학 시선》, 두순학 지음, 임원빈 옮김, 136쪽.
 
 
두순학의 문집으로 《당풍집》(唐風集) 3권이 있으며, 당나라 시인 고운(顧雲)이 그 서문을 지었다. 송대 엄우(嚴羽)는 《창랑시화》(蒼浪詩話) · 시체(詩體)에서 그의 시체를 두순학체(杜苟鹤體)로 분류하였다. 한편 고려 말기의 저본을 바탕으로 조선 초기에 성립된 《협주명현십초시》(夾注名賢十抄詩) 중권에 최치원, 박인범 등 신라의 빈공제자 4인과 함께 두순학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은 유교에 전래와 학교교육의 시작으로 삼국이 모두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냈다. 특히 신라 27대 선덕여왕 9년(640년)에는 왕의 자제들을 당의 국자감(國子監)에 유학시키고 당의 뛰어난 학문과 선진물물을 배우게 하였다. 이때 당태종은 천하의 명유(名儒)를 불러 모으고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다. 이때 학생이 무려 3,260명이었다. 이때 수도 장안은 정말 대단했다. 신라에서 보낸 유학생들의 유학기간은 10년이었고 유학을 마치면 귀국을 시켰다. 많은 때는 유학생이 100여 명에 달했다. 유학생들의 서적비는 은화로 300냥을 신라 본국에서 부담하였고, 의식(衣食)은 당나라에 설치한 홍로사(鴻臚寺)에서 전담했다.
 
홍로사는 정부 관청의 명칭으로 북제(北齊, 550년-577년)에서 처음 설치되었다. 九寺의 하나였는데, 과거 大鴻臚의 직권을 이어받아 빈객(賓客)의 대접과 조례(朝禮), 吉凶弔祭의 의례를 관장했다. 장관인 鴻臚卿과 차관인 鴻臚少卿, 鴻臚寺令과 鴻臚寺丞, 京邑薩甫, 奉禮郞 등의 관리가 있었다. 수대(隋代)에도 홍로사의 명칭을 계승했다.
 
신라에서 당에 유학을 시키고 권장하여 당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빈공과(賓貢科)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58명이었다. 빈공과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당나라의 과거제도이다. 헌덕왕 13년에 김운경(金雲卿)은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사관(仕官)하고 문성왕 3년(841년)에 신라에 돌아왔다. 당시 뛰어난 인물 중에는 최치원, 김가기(金可記), 박인범(朴仁範), 김악(金渥), 최인곤(崔仁滾)이 있었다. 김악은 예(禮)로 유명했고, 박인범은 詩가 유명하여 당나라 시인들과 잦은 교유(交遊)를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인 최해(崔瀣)는 820년∼906년 사이에 신라인이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한 이가 58명이라 하였고, 다시 907년부터 오대말(五代末)까지 32명이 급제하였으나 여기에는 10여명의 발해인(渤海人)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특히 신라 말 육두품(六頭品)으로서 빈공과에 급제한 자가 많았는데 최치원, 최승우(崔承祐), 최언위(崔彦撝) 등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송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한 사람으로 김행성(金行成), 강진(康鄑), 최한(崔罕), 왕림(王琳), 김행적(金行績), 강무민(康撫民), 권적(權適), 조석(趙奭), 김단(金端) 등은 고려의 과거에 급제한 뒤 유학하여 급제하였으며, 대부분 귀국하여 문한관(文翰官)으로 명성을 떨쳤다. 문한관은 문장이 뛰어난 이로 외교문서나 왕의 전교나 책문 등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원나라의 제과에서는 안진(安震), 최해, 안축(安軸), 안보(安輔), 조렴(趙廉), 이곡(李穀), 이색(李穡), 이인복(李仁復), 윤안지(尹安之) 등이 급제하였다. 명나라의 과거에는 김도(金濤)만이 급제하였으나 명나라에서 빈공 과거제도를 곧 폐지하였다.
 
 
중한(中韓)관계 진열품을 관람하는 장보고유적답사단(최치원기념관 자료전시관, 연화각 2층)
 
 
최치원기념관 안에 있는 연화각 2층 자료전시관에서 최치원의 당나라 17년간의 발자취를 돌아보았다. 최치원 선생은 이곳에서 유명한 《桂苑筆耕》을 남겼다.
 
청조 반사성의《해산선관총서(海山仙館叢書)》에 실린 《桂苑筆耕集》
 
 
《삼국사기》 권46, 열전 6에는 당나라 시인들이 고운 최치원에게 송별시로 건넨 「신선 선비의 노래, 儒仙歌」가 있다.
 
我聞海上三金鰲
金鰲頭戴山高高
山之上兮,
珠宮貝闕黃金殿
山之下兮,
千里萬里之洪濤
傍邊一點鷄林碧
鰲山孕秀生奇特
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
 
내 듣건대 바다 위에 세 마리의 금빛 자라 있고,
금빛 자라는 머리에 높고 높은 산을 이고 있다네.
산 위에는 진주로 만든 궁궐이 찬란하고,
산 아래엔 파도가 끝없이 넘실대리라.
한 켠에 한 점 계림(鷄林)이 푸르고
금오산(金鰲山)이 잉태하여 빼어난 인재 낳았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으로 온 중국을 감동시켰지
열여덟에 사원(詞苑, 한림원)을 누비며 글 솜씨를 겨루더니
화살 하나로 금마문(金馬門)의 대책(對策)을 쏘아서 맞혔더라.
 
 
2023.9.7. 11시 15분
 
생활문화아카데미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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