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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암리 영모재(永慕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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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영모재
최근 3개월 조회수 : 4 (5 등급)
【향토】
(게재일: 2024.01.02. (최종: 2024.01.02. 20:40)) 
◈ 오암리 영모재(永慕齋)
이 재실은 오수면 오암리 오촌마을 남쪽 끝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 2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4292년(1959)에 지었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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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암리 영모재(永慕齋)
 
이 재실은 오수면 오암리 오촌마을 남쪽 끝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 2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4292년(1959)에 지었다.
 
 
 
 

1. 오암 영모재운(永慕齋韻)

 
雲水之南一境清  운수의 남쪽 맑은 한 지역에
兌峯翠屹紫霞生  푸르게 솟은 서쪽 봉우리에 노을이 지네
龍頭低處孤亭立  용두봉 아래에 정자하나 외로이 서 있고
虎尾高原大路橫  호미고원에 큰 길이 지나네
庭前種菊金成色  뜰 앞에 심은 국화에 금빛이 물들고
檻外鳴泉玉有聲  난간 밖에 흐르는 샘물에선 물소리 들리네
卜水占山基此地  산수간을 살펴서 이곳에 터를 잡으니
杜門遯跡讀而耕  문닫고 흔적 감춘 후에 독서하며 밭간다네
 
후손 영경(永慶) 일봉(一峯)
 
 

1.1. 敬次

 
晚六祖翁節義清  만육 선조의 맑은 절의를 본받아
清風不絕死猶生  맑은 기풍 끊이지 않으니 죽었어도 살아있네
盡誠芬苾春秋享  진심을 담아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니
永添精灵夜月橫  영원히 정령들이 밤달이 흐르네
青山無變千秋色  변함없는 청산에 가을 빛이 물들고
碧澗長鳴万古聲  길게 흐르는 석간수는 만고에 흐르네
孝悌為稼禮為穑  효제를 심고, 예로 거두니
心田有地我馴耕  마음 밭에 땅이 있거든 나도 밭을 갈리라
후손 영학(泳學) 주암(周庵)
 
 
 

2. 오암 영모재기(永慕齋記)

 
운수의 남쪽 오산은 녹림과 골짜기가 매우 아름답고,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고 우뚝하니 몇 척이나 솟아있고, 위아래에 봉분이 있으니, 곧 선조조 통덕랑 전주 최공 휘 언주(彦周)와 그의 둘째아들 성균생원 휘 숙(俶) 호 금재공(琴齋公) 두 분의 의리가 묻힌 곳이다.
 
고려시대 완산부원군 휘 충익 만육선생(晩六先生) 휘 양(瀁)께서 망복(罔僕)219)의 의리를 지키고자 남하하여 두문동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세상을 마치셨다. 이후 전주의 서산서원과 남원의 덕암서원 또 진안 영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진명(進明)은 이조정랑을 지냈고, 여관(汝寬)은 진원(珎原)과 진안(鎭安) 두 고을의 현감을 지냈다. 팔준(崔八俊)은 예문관 한림 전라강원도도사를 지냈으니, 이분들은 식(寔) 공의 고조, 증조, 조, 부가 되신다.
 
금재공은 일재 이항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셔서, 문장과 덕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 공의 아들인 만손(萬孫)이 후에 남원군 산동면 부동에 살게 되면서 자손들이 번창하여 수백 호에 이르게 되었고, 큰 덕을 가진 사람과 큰 선비가 세대를 번갈아 나와서 선세의 명절을 생각하고, 벼슬길에 나설 때는 담백하게 보았다.
 
아침에는 밭 갈고, 저녁에는 책을 읽는 것은 곧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이고, 가난에 편안하고 뜻을 지키는 것은 곧 가문의 심결이다.
 
말이 충신(忠信)하고 행실이 독경(篤敬)하여 세상의 법이 되니, 고향의 인사들이 대부분 모범으로 삼았다. 통덕랑공이 두 분의 제사를 지내는 때에 목욕재계할 집이 없어서 자손들이 여한으로 여기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십 수대를 지났다. 겨를이 없은 것인지, 아니면 때를 기다려서 그런 것인가, 사람을 기다려서 그런 것이 아닌가. 다행히 종중에서 모두 거사를 부르짖었다. 그 후손인 이현(利鉉)과 판암(判岩), 영룡(泳龍), 동치(董治)가 그 역을 맡아서 무술년 11월에 시작해서 다음해인 기해년 4월 하순에 준공하였으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규모는 비록 협소하지만, 지은 것으로는 원사(元舍)가 세 칸집이고, 동실과 서실이 있으며, 가운데로 청사가 있으며, 앞에는 난간이 있다. 또 창고는 세 칸이다.
 
이에 제사음식을 올릴 때에 제기에 담겨서 각각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들이 만든 아름다운 웅장한 집들은 지금이후로는 선조의 정령들이 오르내리며 애연히 그 탄식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종친들의 모임이 즐거워지고, 집안의 자제들을 모아서, 시와 예를 강론하고, 벗들을 초대하여 읍양의 예를 행하며, 나물을 캔다. 세시에 따라서 제물을 올리고, 울울히 기장으로 신명의 하강을 구하니, 신이 이르러서 이처럼 큰 종류의 복을 주시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시경』에 “이에 증제를 올리니 향기롭고 향기로워 제사 섬김이 심히 밝거늘 선조께서 이에 강림하시어 큰 복으로 갚아주니 만수무강이로다”하였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 듣건대, 최씨가문은 효로서 이름이 난 사람이 많다고 한다. 통덕랑공의 8대손 여항(與恒)은 늘 시묘살이를 삼년동안 하였고, 통덕랑공의 11대손 재형(在衡) 또한 태조단 아래 미륵동에서 시묘살이 삼년을 하였다. 그 일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져, 고종30년 10월에 그 마을에 정려를 명하셨으니 이 어찌 효의 지극함이 아니겠는가.
 
오늘 성심을 다해서 재실을 세운 것도 또한 효의 한 가지이고, 또한 재실을 “영모”라고 이름한 것도 또한 그 뜻이 깊다. 맹자가 “오십이 되어서도 사모하는 것을 나는 대순에게서 보았다.”라고 말했다. 만약 자손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대대로 선조를 사모하게 하는 것을 ‘영모’라고 한다면, 그 (재실의)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는 정성을 가히 알 수가 있다. 무릇, 효란 백행의 근원이다. 일마다 그 근원을 생각한다면, 어찌하여 선한 일을 하지 않으며, 어떤 복이 마땅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이에 내가 진실로 최씨가문이 효로서 창대하게 될 것임을 알았다. 이현(利鉉)께서 나에게 옛친구로서 재실의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글을 짓지 못하겠다고 짐짓 사양하니, 큰 개울을 건너고, 눈을 밟고서 두세차례나 오시었다. 이에 그 성의를 느끼고, 집안내력을 듣고서, 그 지난 자취를 발췌하여, 참람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않고, 대략 오른쪽과 같이 기록하였다.
 
기해년 임월 중완에
부녕 김형준 삼가쓰다.
 
 
雲水之鄕 鰲山 麓林壑尤美 松杉鬱蒼而有穹然數尺之 封於上下卽我 宣廟朝 通德郞 全州崔公 諱彦周 及其次子成均生員諱俶號琴齋公之 兩世衣履之藏也 麗朝 完山府院君 謚忠翼 晩六先生 諱瀁 守罔僕之義 南下入杜門洞 遯跡終世 而後享全州西山書院及南原德岩書院 且鎭安靈溪書院 曰進明吏曹正郎 曰汝寬珎原鎭安二縣監 曰八俊 藝文館翰林 全羅江原道都事 寔公之高曾祖考也
 
琴齋公受業于一齋李先生之門 文章德行著于一世 公之子萬孫 後擇居于南原郡山東面釜洞 子孫蕃衍 數百戶 碩德鴻儒間世而出 思先世之名節 其於仕進 宦路視之澹如也 朝耕夕讀 乃其世氊也 安貧守志 乃其心訣也
 
言忠信行篤敬220) 處世之規矩也 故鄕里人士 多取以矜式焉 通德郞公 兩世修祀之日 未有齋沐之室 子姓之茹恨 爲如何而閱十數代未遑者 抑待時而然歟 待人而然歟 幸於宗訆僉同擧 其裔孫利鉉與判岩泳龍董治其役焉 經治於戊戌十一月而竣工於己亥四月下旬 何其幸歟 規模雖曰狹小 其爲制也元舍三間而東西爲室 中爲廳事 前有欄襤也 且庫舍三間也
 
於是乎供粢盛221) 藏籩豆 各有區劃 何羨乎 人之綺構傑間也 從今以后 精靈陟降 僾然聞乎其容聲222) 宗族團會怡然 講論其世德會子弟隷詩禮之業 邀賓朋行揖讓之禮 采蘩采蘋 隨時序而薦享 而鬱以秬求神明之降臨 神其格 斯錫類錫福 豈不徽哉 詩曰是烝是享 苾苾芬芬 祀事孔明 先祖是皇 報以介朴 万壽無疆 其此之謂歟
 
余聞 崔氏以孝著聞者多矣 通德郞公 八世孫與恒侍墓三年 同十一世孫在衡 亦侍墓三年 於太祖壇下 彌勒洞 事聞于上 高宗三十年十月日 命旌其閭 豈非孝之至者乎
 
今日之竭誠力 建墳菴 亦孝之一事也 且齋以永慕名者 其義深矣 孟子曰 五十而慕者223) 予於大舜見之矣 若使子子孫孫 永世慕祖先則 是曰永慕也 可知其顧名思義之誠也
 
夫孝者 百行之源也 事事逢其源 何善不做 何福不宜 吾固知崔氏一門 以孝昌大也必矣
 
利鉉甫 以余謂舊知 請其齋記 余以不文固辭 而涉大川踏氷雪 再三來懇 故感其誠意 問其世德 採其往蹟 不揆僣越畧記如右云
 
屠維大淵獻 臨月中浣
扶寧 金炯準 謹記
 
 

 
각주
219) 망복(罔僕) : 망국의 신하가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으려는 절개를 가리키는데, 은나라가 망할 무렵 기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했던 말을 가리킨다. 《書經 微子》 송(宋)나라는 은나라 주(紂)가 서형(庶兄) 미자계(微子啓)에게 봉해 준 나라이다.
220) 언충신행독경(言忠信行篤敬) :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말이 충신(忠信)하고 행실이 독경(篤敬)하면 만맥의 나라에서도 행한다.[言忠信行篤敬 雖蠻貊之邦行焉]” 하였음.
221) 자성(粢盛) : 그릇에 담아 제물(祭物)로 바치는 기장 따위의 곡식
222) 애연문호기용성(僾然聞乎其容聲) : 《예기》 〈제의(祭義)〉의 “제삿날에 방에 들어가면 애연히 자리에 모습이 보이는 것이 반드시 있고, 주선(周旋)하며 문을 나가면 숙연히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반드시 있고, 문을 나가 들으면 개연히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반드시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왕의 효는 눈에서 모습이 떠나지 않고, 귀에서 소리가 끊이지 않고, 마음에서 심지와 기욕이 잊히지 않는 것이다. 애모(愛慕)함이 극에 이르면 엄연히 존재하는 듯하고, 성각(誠慤)함이 극에 이르면 눈앞에 드러나서, 드러나고 존재하는 것이 마음에 잊히지 않는 법이니,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祭之日入室 僾然必有見乎其位 周還出戶 肅然必有聞乎其容聲 出戶而聽 愾然必有聞乎其歎息之聲 是故先王之孝也 色不忘乎目 聲不絶乎耳 心志嗜欲不忘乎心 致愛則存 致慤則著 著存不忘乎心矣 夫安得不敬乎〕”라는 말을 발췌하여 인용한 것이다.
223) 오십이모자(五十而慕者) : <맹자> 만장장구 상.
사람이 어리면 부모를 사모하고 색이 좋은 것을 알면 예쁜 여자를 사모하고 처자가 있게 되면 처자를 사랑하게 되고 벼슬하게 되면 임금을 사모해 임금에게서 마음을 얻지 못하면 마음속에 열이 나게 된다. 그러나 큰 효는 평생 부모를 사모할 뿐이다. 50세의 나이에도 부모를 사모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순임금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다(人少,則慕父母 知好色,則慕少艾 有妻子,則慕妻子 仕則慕君,不得於君則熱中。大孝終身慕父母。五十而慕者,予於大舜見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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