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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자룡 #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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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일: 2023.07.17. (최종: 2023.11.03. 16:22)) 
◈ 완도이순신기념관, 진린, 등자룡 장군(하)
전남 완도 신지면에서 개최된 제13회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2023년 7월 6일 ~ 7월 8일)에서 돌아온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부터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에서 일고 싶었던 논문들을 읽었다.
제13회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개최지: 전남 완도 신지면 조선대학교 해양생물연구교육센터
 
 
전남 완도 신지면에서 개최된 제13회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2023년 7월 6일 ~ 7월 8일)에서 돌아온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부터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에서 일고 싶었던 논문들을 읽었다. 오후에는 중국사연구 제142집(2023년 2.)에 실린 순천향대 박현규(朴現圭) 교수님이 발표하신 <명 장수 鄧子龍과 副將의 정유재란 참전 기록 고찰> 논문을 통해 등자룡 부장인 진신, 오송, 이흥, 풍용을 공부했다.
 
등자룡 장군이 이끈 절강수군 3,154명은 1598년(만력 26년) 3월경에 중국 산동성 덕주(德州)을 지나 조선 수역으로 들어왔다. 당시에 조선에 파병한 명 수군은 계금 장군이 이끄는 3,000명의 수군뿐이었다. 은퇴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병을 치료하던 등자룡은 신속하게 조선에 출전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아 노구를 이끌고 과거 전투에서 함께 활약했던 부장들을 규합하여 어렵게 원 심무의 절강수군 인수인계를 마친다. 그러나 물자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출전이 계속 지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 조정의 대신들은 조선 해역의 상황이 아주 급한데 장수들이 계속 물자를 핑계로 출전을 기피한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과신(科臣) 장보지(張輔之, 1547년~1629년, 字爾贊,號容宇)는 장군을 탄핵했다.
 
등자룡 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일정은 제갈원성(諸葛元聲)이 저술한 《兩朝平攘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군 방일신(方日新)은 절병 3천 명을 거느리고 해로로 의주에서 양곡을 싣고 조명연합수군의 주둔지인 고금도로 향했다. 9월 29일 충청도 구룡도(九龍島)에 도착할 때 갑자기 돌풍이 일면서 파도가 솟구치는 바람에 누선의 선두와 선미가 모두 부서졌다. 소선으로 갈아타고 간신히 뭍 근처에 도달했으나 선체가 뒤집혀 모두 몰살당했다. 구룡도가 어딘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고 추정만 난무하다. 등자룡은 바다에 빠진 수군을 수습하며 항해를 계속했다.
 
등자룡 장군의 동생인 등용신이 작성한 <등유신등보>을 통해 명 수군의 고금도 도착일이 10월 12일에 해로를 통해 임지인 고금도에 도착했고, 11월 17일에 순천 광양만에 도착, 18일 삼경에 조명연합수군 군사가 출발하여, 11월 19일 날이 밝을 때 조명연합군의 일원으로 조선 판옥선에 타고 출전하였다가 전투 중에 등자룡 장군이 탄 선박에 불이 나고 일본군이 선상에 올라타서 싸우다가 장군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탈취해 달아났다. 바다에서 전투를 지휘하며 이를 지켜보던 이순신 장군이 등자룡 장군을 구하려 앞으로 나아가다가 왜군의 총에 맞아 배에서 절명했다. 동생 등용신은 등자룡 장군의 잃어버린 목을 대신하여 침향목을 손수 깎아서 목을 만들어 유해를 고정시키고 육로를 통해 고향에 운송했다. 선조실록 110권에 의하면 “선조 32년 3월 6일 총병 등자룡의 상차(喪次)에 가둥하여 치제례(致祭禮)를 행하였다.”고 기록이 있다.
 
 
순국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묻었던 월송대
 
중국 풍성시(豐城市)두시진(杜市鎮) 무계(茂溪) 등가촌(鄧家村) 등자룡 묘역
 
 
정조실록 35권, 정조 16년 8월 19일 을유 1번째 기사를 보면 "황조(皇朝)의 부총병(副摠兵) 등자룡을 康津 탄보묘(誕報廟)애 배향하고 치제(致祭)하였다. 전교하기를...."하면서 제문을 친히 지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고금도에서는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사라졌다.
 
2014년 7월 14일 중국 쉬진핑 주석이 서울대를 방문하여 5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한국과 중국은 발전의 동반자>라는 강연을 하면서 35분 동안 많은 말씀을 하였다, 쉬진핑 주석은 특히 양국 역사에 공통되는 인물로 서복, 김교각, 최치원, 공소, 김구, 정율성, 등자룡을 거명했다. 그 자리에 있던 대다수의 정치지도자, 기업인, 대학원생들은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칠순의 등자룡 장군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남해군수는 2015년 1월 중국 강서성 픙성시를 방문하여 등자룡 장군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와, 2016년에는 남해에 ‘이순신순국공원’을 조성하고 ‘노량해전 전몰 조명 연합수군 위령탑’에 등자룡 장군의 부조를 넣었다. 현재 남해군과 풍성시는 청소년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노량해전 전몰 조명 연합수군 위령탑(露梁海戰 戰殁 朝明 聯合水軍 慰靈塔), 남해
 
 
출전(出典):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35권, 정조 16년 8월 19일 을유 1번째 기사 1792년 청 건륭(乾隆) 57년
 
“황조의 부총병 등자룡을 강진 탄보묘에 배향하고 관리를 보내 황조(皇朝)의 부총병(副摠兵) 등자룡(鄧子龍)을 강진(康津) 탄보묘(誕報廟)에 배향하고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전교하기를,"
 
"근래에 이 충무(李忠武)의 유사(遺事)를 보다가 노량진 싸움을 추억하면서 저도 모르게 넓적다리를 만지면서 길게 탄식하였다. 중국의 부총병 등자룡은 70세의 노장(老將)으로 2백 명의 용사(勇士)를 이끌고 넓은 바다 위를 마음대로 횡행하면서 손에 침을 뱉으며 교활한 왜적을 섬멸할 것을 맹세했으니, 그 호탕한 담력은 대장부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수공(首功)을 차지하고자 하여 충무공의 배로 뛰어올라 곧장 앞으로 돌격하여 수없이 많은 포로를 잡았으나 우연히 화기(火器)를 건드려 중류(中流)에서 불이 붙자 적이 달라붙었는데도 오히려 힘껏 싸웠다. 충무공이 달려가 구해주다가 함께 죽었으니, 이 일은 서희진(徐希辰)의 《동정기(東征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내가 일찍이 불쌍하게 여겨 《명사(明史)》 본전(本傳)을 상고해 보니 ‘조선에서 묘식(廟食)을 받고 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애당초 묘식함이 없고 강진의 도독(都督) 사당에도 또 배향하지 못했으니, 흠전(欠典)·궐사(闕事)로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는가. 평양 무열사(武烈祠)에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추가로 배향하자고 도백이 건청(建請)하여 이미 허락하였다. 같은 때 같은 일을 한 사람의 공덕을 보답하는 전례가 어찌 한 사람은 하고 한 사람은 하지 않아서 중국 장수의 영혼이 깃들 곳이 없게 하겠는가. 중국 부총병 등자룡 공을 진 도독(陳都督)의 사당에 승배(陞配)해야 하는데 처음에 듣기로는 사당이 남해(南海)에 있다고 하여 이제 평양의 낙공을 추배할 때에 미쳐서 함께 거행하고자 하였다. 다시 듣건대 도독은 충무공과 강진 땅 탄보묘 옆에 배향하였다고 하니 등공의 별사(別祠)도 마땅히 이 사당에 배향해야 한다. 승배(陞配)하는 날에 관원을 보내 치제하되 충무공을 이미 함께 배향하였으니 일체로 치제하라. 제문은 모두 마땅히 친히 짓겠다. 치제는 비록 명이 있지만 이때에 주전(廚傳)하는 데 폐단이 있으니, 헌관(獻官)은 부근의 문관인 원 가운데서 차출해 보내라. 등 총병은 충무공과 동시에 노량에서 목숨을 바쳤는데 충무공은 남해의 충열사(忠烈祠)에서 전향(專享)하고 있다 한다. 충무공의 유사를 근래에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전서(全書)로 찬(撰)하게 하였으니 인쇄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1본(本)을 본 사당에 보관하고 인하여 치제를 행하라."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표지(국가기록원 사진)
 
 
2023년 4월에 개관한 완도이순신기념관에는 노량해전의 영웅인 등자룡 장군의 치적만 적혀있다. 조선 정조 대왕이 이순신 장군의 노량진 전투를 추억하면서 길게 탄식한대로 이국땅에서 싸우다 죽은 노장 등자룡을 이순신 장군과 함께 사당에 배향하든지, 아니면 따로 사당이나 흉상을 제작해 모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13회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 3일째 답사를 통해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을 확인했다. 완도문화원의 거듭된 등자룡 배향 문제 등 여러 가지 요청에도 불구하고 현재 문화재청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임진왜란 검증과 실사를 통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1792년)에 내용처럼 등자룡 장군에 대한 예우는 반드시 회복되어야한다.
 
조선왕조 제22대 국왕인 정조대왕의 간곡한 말씀대로 치제(致祭)가 행해지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이순신 장군과 마주 앉아 일본군이 도발한 정유재란 해전(海戰)을 의논하는 등자룡 장군의 모습을 꼭 보고 싶다.
 
 
조명 연합수군(朝明 聯合水軍)의 이순신 장군 (완도이순신기념관)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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