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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리 호산재(壺山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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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任實郡) 재실(齋室) # 호산재
최근 3개월 조회수 : 8 (4 등급)
【향토】
(게재일: 2024.01.03. (최종: 2024.01.02. 21:14)) 
◈ 주천리 호산재(壺山齋)
이 재실은 오수면 주천리 상지밑 마을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대산재(臺山齋)는 호은(壺隱) 이수(李洙)의 재실로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원래 이 지역에 거주하는 전주이씨 칠산군파(漆山君派)의 서숙(書塾)이었다고 한다. 1922년에 중수를 하 였으며, 솟을대문 위에는 취성문(聚星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동과 서쪽에 쪽문이 있다. 현판 9개와 주련이 6개가 있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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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리 호산재(壺山齋)
 
 
이 재실은 오수면 주천리 상지밑 마을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대산재(臺山齋)는 호은(壺隱) 이수(李洙)의 재실로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원래 이 지역에 거주하는 전주이씨 칠산군파(漆山君派)의 서숙(書塾)이었다고 한다. 1922년에 중수를 하 였으며, 솟을대문 위에는 취성문(聚星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동과 서쪽에 쪽문이 있다. 현판 9개와 주련이 6개가 있다. 대산재 뜰에는 단기 4330년(1997)에 세운 대산재 기실비가 세워져 있으며, 담장은 조선식 담장으로 돌과 흙으로 쌓아져 있다.
 
 
 

1. 주천 호산재 동서문 건립 실적기(壺山齋 東西門 建竪 實蹟記)

 
운수의 남쪽 주천동(酒泉洞)은 선조 호은공(壺隱公)이 남쪽으로 내려와 거주한 옛터로, 재각 위쪽의 침자원(枕子原)은 호은공이 묻힌 곳이다. 지금까지 400여 년이 흘러 자손들이 곧 여러 읍에 거주하였다. 호산재가 건설된 후로 여러 차례 수선하였다. 세월이 상전벽해[滄桑]하여 세상풍조가 매우 달라져 지금 세태는 물질만능의 시대가 되었다. 조상을 숭배하고 친척과 돈독하게 지내는 정성과 윤리도덕같은 행위는 다 가려져서 남은 것이 없다. 이 같은 때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호산재(壺山齋)의 일부를 중수함에 큰 공적을 한 자손들이 있다. 재각의 동·서 양문이 무너져 중건이 시급하였다. 지난 임술년 제사를 행할 때, 호은공의 주손(胄孫)인 태우(台宇) 공의 다섯째 아들 정의(正儀)씨의 큰아들 기은(起銀)군이 그 어려운 지경을 보고, 홀로 담당하여 완공의 미를 거두었다. 선조에 대한 보본성심(報本誠心)은 물론이고, 앞의 일이 모든 자손에 모범이 되기에, 공로를 새겨 기록한다.
 
단기 4316년 계해년 봄
12대손 수의(壽儀)가 삼가 기록한다.
 
 
雲水南酒泉洞은 先祖壺隱公 南下舊址 而齋上枕子之原은 壺隱公 體魄攸藏也라 迄今四百餘載에 子孫이 仍居數邑하다 壺山齋建設後로 累次修葺而滄桑이 一變에 風潮殊異하야 現今世熊은 物質為主의 萬能時代라 崇祖敦族之誠과 倫理道德之行이 掩蔽無餘라 如此當時도 不拘하고 壺山齋 一部重修에 큰 功績이룬 子孫이 있니 東西兩門이 頹廢되여 重建時急이라 去壬戌 享祀時에 壺隱公胄孫 台宇 公之五男 正儀氏 長子起銀君이 見其難境하고 獨自擔當하야 完工의 美을 거두엇다. 先祖에 對한 報本誠心은 勿論이요 為先事에 諸子孫에 模範키로 功勞을 記刻하다
 
檀記 四千三百十六年 癸亥春
十二代孫 壽儀 謹識
 
 
 

2. 주천 호산재기(壺山齋記)

 
우리 이씨는 세상에서 명족(名族)이라고 하는 가문으로 도학(道學)과 명절(名節)이 벼슬을 하였거나 하지 않았거나 밝게 드러나있다. 후손들이 조상의 어짐과 아름다움을 계승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국사(國史)에 밝게 전해오고 있다.
 
아! 우리 족조(族祖) 호은(壺隱)선생은 천성이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아서 일찍이 과거(科擧) 공부를 폐하고248) 오로지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전수받았다. 당시 사우(士友)들이 모두 조정에서 크게 쓰일 것이라고 지목하였다.
 
종숙부(從叔父) 주계군(朱溪君)이 참화(慘禍)을 당하던 날에 드디어 자정(自靖)할 뜻을 정하고 호남(湖南)의 운수(雲水) 고을 주천리(酒泉里)로 내려오게 되었다. 서까래 몇 개 세워 부옥(蔀屋)을 짓고 소연(蕭然)하게 담을 두르고서 단사표음(簞食瓢飮)으로 편안하게 여겼다.
 
그 이름이 조정에 알려져 세 차례 징소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매번 관고(官誥)249)가 내려와도 번번히 흐르는 물에 침부(浸浮)하며 말하기를, “내가 세상과 더불어 서로 잊고 산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그 뜻을 부귀(富貴)로 옮기겠는가? 또한 후세의 자손들도 나의 뜻을 체득하여 영도(榮途)에 나가지 말고 안분(安分)하며 빈궁해도 편안히 여기며250) 집안의 명성을 추락시키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후 이 고을에 세거하면서 농사짓고 글을 읽으면서 가업을 이었다.251) 왕왕 문인달사(聞人達士)가 있었으나 세상에서 쓰이지 못하였으니 애석하구나!
 
선생께서 생전에 시골에 무덤을 만들어 두신 이후로252) 반걸음 내딜 만한 땅에서 지금까지 수백년 동안 제향(祭享)을 드리고 봄가을로 춘추(春秋)로 재실을 살피었다. 재실(齋室)이 오래되어 풀이 덮이고 무너져가는 것에 대해 중건하자고 의논하였다. 그런데 공사가 커서 재물을 계속 마련해야 하는 것이 근심이었다.
 
후손 태우(台宇)씨가 위선(爲先)하는 일로 재각에 힘을 다 못 쏟아서 일문(一門)에 모의하여 약간의 재물을 모아 옛터를 개척하여 10여 칸의 기와집을 건축하였다. 인근 마을의 족친으로 힘을 보태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몇 년되지 않아 공사를 마쳤다. 드디어 ‘호산재(壺山齋)’라는 편액을 달았다. 대개 호은공이 호산에 거처하신 진취(眞趣)의 뜻을 담았다.
 
탁 트인 재각의 모습에 정결하고 풍족하게 제수를 마련하였으니 이것이 후손의 성효(誠孝)가 아니라면 그럴 수 있겠는가? 누군들 축하하지 않겠는가? 내가 외람되이 종족을 화목하게 하는 자리에 있어서 듣고서 기뻐서 이렇게 적는다.
 
갑자 10월 상순에 족손(族孫) 규장각(奎章閣) 직각(直閣) 기원(起元)이 삼가 쓰다.
 
 
吾李之世稱名族者 道學名節 表著於縉紳 韋布之間 而後裔之趾仁踵美者 炳朗乎 國史野承矣 猗我族祖 壺隱先生 天性不羈早廢功 今之文專治性理之學 受業 業于寒暄堂門下 得意鉢之傳 而當時士友 皆以廊廟器目之矣 値從叔父朱溪君 慘禍之日 遂定自靖之意 因流落于湖南 雲水之鄕 酒泉之里 數椽蔀屋 環堵蕭然簞瓢屢出 自晏如也 朝廷聞之三徵不就 每有官誥輒浸浮於流水曰吾與無相忘者久 豈以富貴移其志哉 且後世子孫 亦體吾志 勿苟於榮途 安分固窮 勿墜家聲也 厥後 世居玆鄕 以畊讀爲箕裘之業 往往有聞人達士 而不能需世惜乎 先生壽藏在於邨後 跬步之地 迄今數百年 俎豆之享 春秋齋懈 且齋室之年久 荒頹者議營重建而 工鉅財絀庸是憂懼 嗣孫台宇氏 凡於先事齋不用極迺謀於一門鳩得若干財拓 其舊地築十餘棟瓦屋 隣里族親無不助力 不數年工告訖 遂扁其齋曰壺山 盖所壺隱之居山眞趣 故屋制軒敞享需豊潔 此莫非後孫誠孝所然也 孰不贊賀哉 余忝在敦敍之列 聞而嘉之 遂爲之記
 
甲子 十月 上澣 族孫 奎章閣 直閣 起元 謹稿
 
 
 

3. 주천 호산재기(壺山齋記)

 
임실[雲水]의 남쪽 노산(魯山)의 아래 주천은 곧 우리 호은공 선조가 내려와 거주한 옛터이다. 무오사화에 주계군이 화를 입고 유배를 가게 되자 기미를 보고 대담하게 행동하여 산에 은거하며 문을 닫고 경서를 궁구하고 학문도덕을 닦아서 세상에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예로부터 영재와 석학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사화가 가라앉고, 조카 추천공(秋泉公)이 공을 조정에 천거하여 재상에 의망되어 세 번이나 징소(徵召)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권세가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며, 자손들에게도 훈계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아름다운 지혜를 지니고, 스스로 즐김으로써 높이고, 노래 부르며 늙어가, 산림 속에서 그 자취를 마침내 감추었다.
 
공의 이름은 수(洙)이고, 자는 도원(道源)이며, 호는 호은(壺隱)이다. 효령대군, 서원군, 고림군, 공산군이 곧 공의 고조, 증조, 조, 부이다. 정덕 기묘년(1519)에 태어나서 임오년(1582)에 졸하셨으며 수는 64세였다. 유명에 따라 부자(負子) 언덕에 예장하였으니 주천은 은거하여 묻히신 곳이다.253) 부인은 광산김씨 예조판서 김우성(金友誠)의 딸이다. 묘는 공의 무덤 남쪽 언덕 저전동 신산 자락에 있다. 자손들은 대대로 선제의 유명을 지키어 과거에 나아가 공리를 다투지 않았다. 장지가 동네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무릇 종계와 방계의 선조묘는 다 기록하지 못하겠다.
 
지난 임술년에 마을 오른편에 묘광을 만들었으나, 갖추어진 것이 아주 심약하여, 겨우 일주갑이 되었으나, 땅이 무너지는 지경이 되었다. 이내 여러 종족원이 함께 자금을 모으기를 여러 해 하여 올해 경술년 봄 언덕아래에 재실을 중건하였다. 일은 크고 힘은 부족하여 하나하나 절실히 하여 공사를 마치었다. 아! 일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만 잘 끝마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니 증자께서 말씀하신 ‘신종추원(愼終追遠)’이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우리 제족들은 멀리 선조의 경계를 이어서 효우문학을 업으로 삼아서 나아가면 곧 영원히 사모하는 뜻을 더욱 멀리 이어가야 하니 조금이라도 욕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경술년 가을 9월 하한에
11세손 태우 삼가 쓰다.
 
 
 

3.1. 壺山齋記

 
雲水之南 魯山下 酒泉 卽我壺隱先祖 洛下舊址也 自戊午史禍 朱溪君 被禍以流 見機高擧 隱壺遯山 閉戶窮經 學問道德 爲世所重 舊英宏碩多出其門 及史禍平 姪子秋泉公254)薦公于朝 擬之卜相三徵 皆不就 以盈滿爲戒 戒其子孫 勿赴 公令仁智中 自娛以緔絴 酣歌經老于林下其跡遂泯 公諱洙 字道源 壺隱其自號也 孝寧大君 瑞原君 高林君 柒山君 寔公之高曾祖與考也 生于正德己卯 卒于壬午 壽六十四 以遺命 葬于厓後負子之原 酒泉 是大歸之葬也 配光山金氏 禮判友誠女 墓公兆南麓楮田洞辛山 子孫世守先制 不擧功利 葬不出洞 凡宗傍先之墓不可盡記 前壬戌 建墓廣于村右 而制甚約 僅周一甲 至於頹地之境 乃謀於諸族 鳩金幾年 今庚戌春 重建瓦棟于壠下 事巨力綿 至一箇利切告訖 嗟夫有始易善終尤難 曾氏之慎終追遠者 是不云乎 凡吾諸族緬 昔祖先之戒 以孝友文學爲業 而替引之永慕玆齋 愈久嗣葺 則庶幾無忝萬一云爾
 
庚戌 秋九月 下澣 十一世孫 台宇謹識
 
 
 

4. 주천 호산재 모선재기(慕先齋記)

 
공의 이름은 수(洙)이고 자는 도원(道源)으로 조선 왕실의 후손이다. 고조(高祖)는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이다. 효령대군과 양녕대군을 태백(太白)과 우중(虞仲)255)이라고 칭송하였다. 증조는 서원군(瑞原君) 이친((李𡩁)으로 행병조판서(行兵曹判書)를 지냈다. 조부는 고림군(高林君) 이훈(李薰)이다. 아버지는 칠산군(漆山君) 이선손(李璿孫)인데 주계군(朱溪君)과는 재종형제이다. 함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도 여기에서 학업을 청하였다. 학문하며 지조를 지켜 세상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겼다.
 
주계군이 사화를 당한 이후로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와 임실[雲水]의 남쪽 주천(酒泉)에 은거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일생을 마치셨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동유록(東儒錄)』에 실려 있다.
 
어머니는 밀산현부인(密山縣夫人) 박씨(朴氏)인데, 부마(駙馬) 동돈령(同敦寧)256) 박갱(朴賡)의 증손(曾孫)이다.
 
공은 정덕(正德) 기묘년(1519)에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남다르게 뛰어나고 도량이 크고 활달하였다. 자라면서 칠산군이 매우 그를 어여삐 여겨 이름과 자설(字說)을 지어 주셨다. 대개 수사(洙泗257))을 사모한데서 연원(淵源)하였다. 스스로 우거한 이후로 호산(壺山)에 은둔하여 한가롭게 노니며 노래 부르는 것을 일상으로 여기며 호은(壺隱)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항상 연산군의 사화(士禍)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되면 흐느끼며 눈물을 떨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조카(姪子) 이직언(李直彦)이 이조판서가 되어 공을 조정에 재상으로 추천하였다. 공께서 끝내 응낙하지 않았다. 해질녘에 샘물을 한 움큼 쥐는 것으로 즐기며 노는 것의 밑천으로 삼았다. 임오년(1582)에 향년 64세로 돌아가셨다. 샘가[泉上]에 묻어달라고 유명(遺命)하시어 부감원(負坎原)에 안장하였다. 부인 광산김씨(光山金氏)는 판서 김치기(金恥其)의 증손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방언(邦彦)이고 둘째는 공언(公彦)이다. 무릇 내외(內外)의 자손은 모두 약간이다.
 
아! 공의 저술이 매우 많았는데 별안간 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백년이 지난 뒤에 그 실덕(實德)과 의행(懿行)에 대해 전부 남기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주계군이 사화를 당한 이후로 세상에 나아갈 길을 끊어 버리고 다만 산수(山水)를 즐기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 샘가에 한가로이 지낸 것은 오직 때를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주계군의 청문(淸門)을 얻어 서승(緖承)을 전하였으니 또한 불우(不遇)한 가운데 족히 청풍(淸風)을 이었다고 할 만하다.
 
철종이 즉위한 지 8년 되는 정사년(1857) 중춘(仲春)에 9세손 각(珏)이 삼가 짓다.
 
지난 임술년에 증왕고가 살아 계실 때에 마을의 우측 모선재를 건립하고 본 문서를 기록하여 걸었다. 그후 임술년에 옛 터에 기와집 아래에 중건하면서 현판을 다시 이곳에 걸었다. 증손 광의가 삼가 쓴다.
 
 
 

4.1. 慕先齋記

 
公諱洙 字道源 系出璿源 孝寧大君諱補爲高祖 孝寧與讓寧大君 並稱太白虞仲 曾祖諱𡩁 瑞原君 行兵曹判書 祖諱薰 高林君 考諱璿孫漆山君 與朱溪君再從兄弟也 同時淵源 于寒暄堂金先生門 公亦請業于此 學問操守爲世所重 自朱溪被禍後 遂南下遯跡 于雲水之南酒泉 杜門終身 事載東儒錄 妣密山縣夫人朴氏 駙馬同敦寧賓之曾孫也 公生於正德己卯 稟賦秀異 器度宏達 及長漆山君 甚嘉之名命 名字說 盖慕洙泗淵源也 自僑居以後 隱壺遯山 緔絴酣歌爲日事 自號壺隱 常語及燕山禍 未嘗不隕涕也 姪子直彦爲吏判 擬之卜相 薦公于朝 公終不應落 日掬泉水以資娛遊 卒于壬午 享年六十四 以遺命葬于泉上負坎之原 配光山金氏 判書諱恥其之曾孫也 生二子 長邦彦 次公彦 凡內外諸孫摠若干 鳴乎 公之著述甚多 而輒付水滅跡 百歲之下 難以盡其實德懿行 然而以朱溪君之餘禍 謝絶世路 只以山水自娛 豈非命也耶 其所酣歌于泉上者 維近于醉鄕之不遇 而得朱溪君之淸門 以傳其緖承 則亦可謂不遇之中 足可爲世淸矣
 
上之八年 丁巳 仲春 九世孫 珏 謹識
 
前壬戌曾王考在世時 建慕先齋于村右而懸 記板本文矣 後壬戌重建瓦棟 于路下舊址 板文移揭于此 曾孫光依謹書
 
 
 

5. 주천 호산재(壺山齋) 중수기(重修記)

 
무릇 우리들 조상을 위하여 건립된 묘각(墓閣)이니 재실(齋室)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일은 집안의 손자들의 의무인 동시에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유지상태의 좋고 나쁨 하나가 자손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항상 선조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의 발로이며 종족간 친화단결(親和團結)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호산재는 지난 1953년(임술)에 건립되어 보수가 시급히 요구되었으나 그 보수할 재원(財源)의 갹출이 어렵기 때문에 각 문중의 종현(宗賢)의 발의로 협찬하고, 의무적으로 백미(白米)를 부담시켜 호당 2되씩 걷게 하고, 개인적으로 희사하거나 의연(義捐)한 돈과 곡식을 모재(募財)로 그 보수를 마쳤기로 이에 그 의연한 종현의 방명을 기록하고서 새겨 걸었으니 뒷날에 기념(記念)으로 삼아 관람하게 하노라.
 
단기 4308년(1975) 을묘년 10월 1일
13세손 이기성(李起盛)
종손 이기훈(李起勳)
유사 이수의(李壽儀)
 
 
 

6. 주천 호산재기(壺山齋記)

 
예부터 있었던 묘려(墓廬)에는 진(晉)의 병사(丙舍)와 당의 향정(享亭)이 있다. 세상에서 종족과 화목하게 지내 칭찬을 받은 경우로는 범씨(范氏)의 동오(東吳)와 장씨(張氏)의 하남(河南)을 들 수 있다. 뒤에 묘사(墓舍)를 두게 된 것은 대개 선조에게 제향을 드리고 종족이 모여서 추모하는 뜻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운수(雲水)의 남쪽 노산(魯山) 아래 주천(酒泉)은 바로 우리 호은(壺隱) 선조가 낙향하신 옛터로 주천 위에 집이 있었고 집 위에 산이 있는데, ‘독산(獨山)’258)으로 그 자좌원(子坐原)이 호은공이 안장된 곳이다.
 
아아! 호은공은 우리 효령대군의 현손(玄孫)으로, 서원군(瑞原君), 고림군(高林君), 칠산군(漆山君)이 바로 공의 증조부, 조부, 아버지이시다. 재종숙(再從叔) 주계군(朱溪君)과 더불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학문과 도덕을 세상에서 소중히 여기었다. 무오년(1498)에 이르러 사화를 입고 이곳에 은둔하였는데 조카 재상 추천공(秋泉公)259)이 사화(史禍)가 잠잠해진 이후에 재상으로 조정에 세 번 천망하여, 공께서 세 번 징소되었지만 나아가지 않고 이르기를, ‘나는 한가로이 주천 가에서 노닐며 노래나 부르며 남은 생애를 마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특별히 장령(掌令)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으시고 직첩(職帖)을 물에 적셔 그 흔적을 없애 다시는 나가지 않았다. 또한 유언으로 집 뒤에 있는 주천에 묻혀 오래오래 안장할 곳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그에 대해서는 『동유사우록(東儒士友錄)』과 『여지지(與地誌)』에 실려 있다. 그래서 언덕 아래 지었던 호산재를 중건하였다.
 
아! 공의 이름은 수(洙)이고, 자는 도원(道源)이며 호는 호은(壺隱)이다. 정덕(正德) 기묘년(1519)에 태어나 임오년(1582)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64세였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우함(金友諴)의 딸이다. 무덤은 공의 무덤 남쪽 기슭 저전동(楮田洞) 신산(辛山)이다. 이방언(李邦彦)을 낳으셨는데. 그의 호는 소천(小泉)으로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으로 사람들이 추천하였다. 무덤은 훤강(萱岡) 건산(乾山)에 있으며, 부인은 청주한씨(淸州韓氏)와 함께 안장되었다. 둘째 아들 이공언(李公彦)은 학문과 효성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무덤은 선산[獨山] 왼쪽 임산(壬山)에 있는데 부인 현풍곽씨(玄風郭氏)와 합장하였다.
 
소천공은 이성(李晟)을 낳으셨는데 이성의 호는 삼회(三晦)이다. 효행과 학문이 모두 문아(文雅)하여 남쪽 사람들의 중망(重望)을 얻었으며 향강(鄕綱)을 부식(扶植)하였다. 무덤은 저전동 임산(壬山)에 있다. 부인은 남원양씨(南原梁氏)로 참봉 양수(梁澍)의 딸과 영광유씨(靈光柳氏) 현감 유화춘(柳華春)의 딸이다. 묘는 부장(祔葬)하였다.
 
7대 조비(祖妣) 청주한씨(淸州韓氏)의 묘는 장산(長山) 신원(辛原)에 있으며 6세조 이서휘(李瑞輝)는 학행으로 덕망이 있어 여러 차례 제향(祭鄕)되고 도천(道薦)되었다. 묘는 저전동 임산에 있다. 부인은 남원윤씨(南原尹氏)로 부장하였다.
 
5세조 이완귀(李完龜)은 집안에서 내려오는 효행과 학문을 세습하여 그의 문하에서 학문하는 이름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묘는 운산(雲山)의 병좌원(丙坐原)에 있다. 부인은 문화유씨(文化柳氏)이며 무덤은 저전동 건산(乾山)에 있으니 6대가 잇달아 안장된 산등성이다. 저전동에 안장된 후손들의 무덤에 대해서는 모두 기록할 수 없다. 아! 후손들은 저 봉강(封岡)을 바라보며 유연(油然)하게 앙모(仰慕)하는 마음이 생기니 필시 봄이슬 가을서리를 밟으면 서글퍼지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리라.
 
임술(壬戌)에 증왕고(曾王考)께서 살아 계셨을 때에 마을 오른쪽에 초동(草棟)을 세웠는데 집 만듦새가 매우 간소하여 비바람에 마모되어 겨우 1주갑(周甲)을 버티더니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여러 종족이 모의하였는데 5년 동안 성금을 모으기로 약속하였다.
 
이번 봄 임술에 무덤 아래 용마루를 올리고 기와를 얹어 중건하였는데 호은공이 남하하여 살던 옛 터이다. 그 재각의 이름을 ‘호산(壺山)’이라고 지었다. 선대에 호산(壺山)에 은거한 것에서 뜻을 두었다. 우로(雨霜)에 슬퍼하며 무덤을 살피고 빗질하면서 사모하는 마음을 펴고260) 경건하고 정결하게 향을 피우며 제수를 올려서 혼백에게 보답한 후에야 백세토록 자효(慈孝)하는 곳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일을 삼가며 변함없이 계속 이어갈 것이며 강론(講論)을 해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효우(孝友)로써 자손에게 교훈을 남기고 문학으로 업을 삼아 지성으로 이어받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한다면 오래도록 보존하는데 근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진당(晉唐)의 병사(丙舍)와 향정(享亭)이나 범씨와 장씨의 돈족(敦族)이 어찌 옛 일로 홀로 아름답겠는가?
 
공사를 아뢰는 날에 여러 종족에게 말하기를, “시작하는 것은 쉽지만 잘 끝마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증자께서 상례와 제례에 예법과 정성을 극진히 한다고 하였으니261) 어찌 아니겠는가? 후손들은 우리와 함께 같은 뜻으로 잘 보존한다면 우리 재각은 영원할 것이고, 주천은 넘실넘실거릴 것이며, 호산은 창창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임술년 가을 7월 하순에 12세손 광의(光儀) 삼가 짓다.
유사(有司) 춘우(春宇), 경우(卿宇), 상의(相儀)
 
 
古之有墓廬者 晉之丙舍 唐之享亭是也 世之稱敦宗在者 范之東吳 張之河南是也 後之有墓舍者 盖以享祖先而合宗族 寓追慕之義歟 雲水之南 魯山下酒泉卽 我壺隱先祖落下舊址 而泉上有屋 屋上卽山 曰獨山其子原 是壺隱公之墳菴也 噫乎 壺隱公 惟我孝寧大君之玄孫 瑞原君 高林君 漆山君 寔公之父祖曾也 與再從叔朱溪君 踵學于寒暄堂金先生門 學問道德爲世所重及 戊午禍遂遯于此 姪子秋泉相公士禍平復後 以卜相三薦于朝 三徵不起曰 我徜徉酣歌于泉上 以終餘年 特除掌令 不受應仕 職帖付水滅跡 不復出沒 亦以遺命 葬于屋後 酒泉爲大歸之藏也
 
事載東儒士友錄 及與地誌焉 且壺山齋之作于壟下是重建也 嗟乎 公諱洙 字道源 號壺隱 生于正德己卯卒于壬午享六十四 配貞夫人 光山金氏 禮判 友諴女 墓公兆南麓 楮田洞□山 生諱邦彦 號小泉 道學文章爲世所推 墓萱岡乾山 配淸州韓氏同兆 次生諱公彦 孝學並著於世 墓獨山左壬山 配玄風郭氏祔 小泉公 生諱晟 號三晦 無以孝學文雅望重 南州扶植鄕綱 墓楮田壬山 配南原梁氏 參奉澍女 配靈光柳氏 縣監華春女 墓祔七代祖妣 淸州韓氏墓 長山□原 六世諱瑞輝 以學行德望累祭鄕道薦 墓楮田壬山 配南原尹氏祔 五世諱完龜世襲庭孝帷學 右文名碩 多出其門 基雲山丙原 配文化柳氏 墓楮田乾山 凡六世連岡宗傍先之墓 不出洞之葬 不可盡記焉 嗟 我後昆者 瞻彼封岡油然 有慕仰之心 履玆霜露 必有怵惕之心矣 前壬戌曾王考在世時 建草棟于邨右 而家制甚約 風雨相磨 僅周一甲 至於圮頹之境 故乃謀於諸族鳩金預約者 凡五箇年矣 今春壬戌重建 瓦棟于壟下 是壺隱公 南下舊址也 名其齋曰 壺山 盖取先時隱壺遯山之趣也 雨霜悽愴 瞻掃以伸慕 香火䖍潔 灌薦以報魄後 百世孝慈之所 固然而謹事于斯 勿替引之 不待講論而自明矣 以孝友貽謨 文學爲業 至誠紹述終始惟一則 愈久嗣葺無足慮也 然則晉唐之享舍 笵張之敦族 奚獨專美於古也 功告之日 敬告諸族曰 刱始易也 善終尤難 曾氏之愼終追遠者豈不云乎 後來在與我同志嗣以葺之 玆齋之壽如 酒泉之洋洋 壺山之蒼蒼云爾
 
壬戌 秋七月 下澣 十二世孫 光儀 謹識
有司 春宇 卿宇 相儀
 
 
 

7. 주천 호산재기(壺山齋記)

 
선생의 이름은 이수(李洙)이고 자는 도원(道源), 호는 호은(壺隱)이다. 효령대군의 현손으로 서원군(瑞原君), 고림군(高林君), 칠산군(柒山君)은 선생의 증조부, 조부, 아버지이시다. 재종숙(再從叔) 주계군(朱溪君)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선생 문하에서 학문과 도덕을 배워서 세상 사람들이 추천하였다.
 
무오년(戊午)에 이르러 주계군이 참화를 당하게 되자 공이 먼저 재앙이 미칠 기색을 느껴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와 운수현[雲水]의 남쪽 주천(酒泉)에 은거하였다. 산수(山水)를 즐기면서 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사화(史禍)가 진정되고 나서 조카 추천공(秋泉公)이 조정에 추천하여 세 번 징소되었으나 모두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특별히 장령(掌令)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살이에 나아가지 않고 직첩(職牒)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날마다 샘물 한 움큼을 받았는데, 샘물이 솟구쳐서 술내음이 나기에 한가로이 노닐며 흥겹게 노래 부르면서 문을 걸어 잠그고 궁항(窮巷)에서 남아있는 경전을 홀로 끌어 안고 성리학[性理之學]을 공부하였다. 당시 뛰어난 준걸들과 큰 인물이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으며, 그 사적이 『동유록(東儒錄)』에 실려 있다.
 
항상 그 자손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내 평생 단지 어버이를 멀리 하지 않았으며, 임금을 속이지 않고 자립하였다. 무릇 후손 가운데 만일 과거에 보고 관직에 나가는 자가 있다면 나의 자손이 아니다. 세세토록 이 유훈을 지키면서 드러내지 말라’고 하였다.
 
아아! 선생은 임오년(1582) 10월 11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64세였다. 유명에 따라 자원(子原)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예조판서를 지낸 김우함(金友誠)의 딸로, 병오년 4월 4일에 돌아가셨으니 그때 나이 88세였다. 묘는 공의 무덤 남쪽 기슭 저전동(楮田洞) 신산(辛山)에 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은 방언(邦彦)으로 묘는 훤강 건산(萱岡乾山)에 있다. 둘째는 공언(公彦)으로 묘는 공의 무덤 왼편 임산(壬山)에 있다. 무릇 이어지는 구릉에 종친과 방계[宗房]의 여러 선조들의 무덤을 다 기록할 수 없다.
 
임술년에 주천 마을의 오른편에 초동(草棟)과 묘재(墓齋)를 지었는데 만듦새가 매우 검약하였다. 풍우에 닳아졌고 헌청(軒廳)도 무너져서 제사를 지내려고 하면 근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러 가문에서 의논하여 재물을 모았는데 여러 해가 지나서 올해 임술년 봄에 중건하였다. 선생의 무덤 아래 옛터에 기와를 얹고 기둥을 세워 완공하였다. 동우(棟宇)는 헌앙(軒昻)하고 푸른 비파소리 명랑하니 봄이슬 가을서리 맞으며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기에 거의 유감이 없을 것이다. 무릇 우리 후손들은 선조께서 남긴 가르침을 잊지 말고 오직 효도와 우애, 이것을 영원토록 바꾸지 말고 대대로 수리하여 백세토록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임술년 10월 상한(上澣)에 10세손 이회인(李會寅)이 삼가 글을 짓다.
유사(有司) 이동우(李棟友), 이석우(李錫宇), 이봉의(李鳳儀)
 
 
 

7.1. 壺山齋記

 
先生諱洙字道源號壺隱 孝寧大君玄孫 瑞原君高林君柒山君 爲父祖父曾祖父 與再從叔朱溪君 踵學于寒暄堂金先生門 學問道德 爲世所推 及戊午裾朱溪被慘之日 公先擧裾色 遂南下遯蹟于雲水南酒泉 以山水自娛 若將終身 及史禍平復後 侄子秋泉相公薦于朝 署三徵皆不屑 特除掌令 不受歷仕 職牒皆爲滅跡 日掬泉水 泉洌而酒 徜徉酣歌閉戶 窮巷獨抱遺經 沈究性理之學 當時雋英宏碩多出其門 事載東儒錄 常戒其子孫曰 乃翁生平 但以無遠親不欺君 爲自立矣 凡爲來裔者 若赴擧公令者 非吾子孫 世守是訓 竟至不顯 嗚呼 先生卒于壬午十月十一日 享年六十四 以遺命葬于屋後子原 配光山金氏 禮判友諴女 卒于丙午 四月四日 壽八十八 墓公兆北南麓楮田洞辛山 有二男 長諱邦彦 墓萱岡乾山 次諱公彦 墓公兆左壬山 凡連岡之宗房先墓 不可盡記 前壬戌建草棟墓齋于酒泉村右而制甚約 風雨相磨 軒廳頹敗 將事之日 未嘗不念念懼懼矣 族議詢同 鳩財經年 去壬戌春 重建瓦棟宇 洛下舊址 卽先生之墓下也 棟宇軒昻 亦□淸瑟明朗 春露秋霜 可以將事於期庶無遺憾矣 凡我後昆者 不忘祖先之遺戒 惟孝友是則 永世勿替 嗣以葺之 來世後百代庶幾無忝也云爾
 
壬戌 十月上澣 十世孫 會寅 謹識
有司 棟友 錫宇 鳳儀
 
 

 
각주
248) 원문의 功令은 고려와 조선 시대, 문과(文科) 과거의 시험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문체(文體)를 가리키던 말이다.
249) 관고(官誥) : 지금의 사령장(辭令狀)과 같은 것이다.
250) 원문의 고궁(固窮)은 도의(道義)를 고수하면서 빈궁한 처지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아무리 빈궁해도 이를 편안히 여기면서 도의를 고수하지만, 소인은 빈궁하면 제멋대로 굴게 마련이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251) 원문의 箕裘는 키와 가죽옷이라는 뜻으로, 가업(家業)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의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가죽옷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고, 활을 잘 만드는 궁장(弓匠)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키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252) 원문의 수장(壽藏)은 생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무덤을 이른다.
253) 원문의 대귀(大歸)는 출가한 부인이 시집에서 나와 영원히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 말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은퇴하여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254) 李直彦(1545∼1628).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시언(時彦). 자는 군미(君美), 호는 추천(秋泉)·졸암(拙菴). 효령대군 보(孝寧大君補)의 5대손이며, 고림정(高林正) 훈(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손(璿孫)이고, 아버지는 부호군 형(泂)이다.
255) 고대 중국 주나라 때에 태왕이 큰아들 태백(太白)과 둘째 아들 우중(虞仲)을 뒤로 두고 세째 아들인 계력(季歷)에게 양위하려는 부왕의 뜻을 알고 두 형제는 형만(荊蠻)이란 곳으로 가서 머리를 깍고 은거하며 양보한 미덕을 후일에 공자께서 높이 칭송한 말이 논어에 있다.
256) 역사] 조선 시대, 돈령부(敦寧府)에 속한 종이품 벼슬.
257) 魯의 洙水와 泗水를 말한다. 말한다. 사기공자세가에 “공자가 수·사의 사이에서 설교하여 시서·예악을 닦자 사방에서 제자가 더욱 많이 왔다”고 한다. 후에 수사를 유가의 대칭으로 삼았다.
258) 독산 한집안에서만 대대로 묏자리를 쓰는 산(山)
259) 이직언(直彦) 1545(인종19)~1628(인조6)]초명은 시언(時彦), 자는 군미(君美), 호는 추천(秋泉) 또는 졸암(拙庵),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칠산군 선손(璿孫)의 손자이고 증 좌찬성 형(泂)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동래정씨로 별좌 응운(應雲)의 딸이며, 부인은 정경부인 단양우씨로 진사 사겸(思謙)의 딸이다. 1573년(선조6) 사마시를 거쳐 1576년(선조9)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전적(典籍)·호조좌랑·정랑·지평·사성(司成)을 역임하고 평산군수로 나갔다가 1589년 사직했다. 그 후 상의원정(尙衣院正)을 거쳐 태복시정(太僕寺正)을 지내고 강릉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그 뒤 장령·사재감정을 거쳐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통어사(統禦使)의 종사관이 되었다가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사예(司藝)에 보직되고 이어 헌납·장령 등을 역임한 뒤 명나라에 가서 군량미의 원조를 청했다. 이듬해 사간으로 경상도 진휼어사(賑恤御史)가 되어 백성을 선유(宣諭)하고 돌아와 <시사8조(時事八條)>를 상소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며, 이 때 정철(鄭澈)의 죄를 추론(追論)하는 의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여 파직되었다. 1596년 해주목사에 기용되고 이어 인천·수원 등지의 수령을 거친 다음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601년 승지에 올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뒤에 여주목사·경주부윤을 역임하며 치적을 쌓아 경기도 관찰사와 1605년(선조38)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1) 대사헌이 되었으나 이 해 임해군(臨海君)의 옥사로 사직했다. 1612년(광해군4) 개성부 유수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고 이듬해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은퇴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우참찬에 기용되고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우찬성으로 임금을 강화에 호종(扈從), 척화를 주장했다. 유고로는 <추천선생집(秋泉先生集)> 1권(규장각 소장)과 사단법인 청권사가 간행한 <국역 추천문집(秋泉文集)>이 있다.
260) 원문의 첨소(瞻掃)는 살피고 쓴다는 말이다. 묘제 축문에 “무덤을 살피고 쓴다.〔瞻掃封塋〕”라는 말이 있고, 산신 축문에 “모친모관부군의 묘에 세사를 공손히 거행한다.〔恭修歲事于某親某官府君〕”라는 말이 있다.
261) 원문의 신종추원(愼終追遠) : 상례와 제례에 예법과 정성을 극진히 한다는 뜻으로, 《논어》〈학이(學而)〉에 “어버이 상을 당했을 때 신중히 행하고 먼 조상들을 정성껏 제사 지내면 백성들의 덕성이 한결 돈후해질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고 한 증자(曾子)의 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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